RUST RAW novel - Chapter (663)
러스트 [RUST]-663
사실상 국제 거래가 이뤄지는 곳 전부가 신성 왕국에 등을 돌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경고.
‘전쟁이라.’
인공지능 디아나와 사만다 또한 전쟁 발발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었다. 이건 좀 웃기지 않은가? 인류를 위해 단호한 결단을 내렸더니 전쟁을 할 판이라니.
‘런던과 파리를 점령한 의태 괴물과 슬러그 괴물 자료를 넘겨줄까?’
아니. 그건 아니었다. 의태 괴물과 슬러그 괴물에 대해 알게 되면 그걸로 또 어떻게 해보겠다고 지랄할 게 뻔했고. 자료를 넘겨준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전쟁 발발 시뮬레이션 결과 EU 국가 절반 이상이 독자적인 핵무장에 들어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미합중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중국 5개국이 공식적으로 핵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였지만, 인도와 파키스탄은 실질적으로 핵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었고 이스라엘과 북한은 비공식적으로 핵보유국으로 보고 있었다.
여기에 핵 개발을 시도하려고 했던 국가들과 핵 공유라는 방법으로 핵을 보유한 국가, 소련이 무너지면서 핵을 보유하게 됐거나 폐지했던 국가들에 더해.
핵 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국가까지 따진다면, 언제든 핵확산이 벌어질 상황이었던 것. 그런 상황에서 신성 왕국의 핵 공격은 핵확산의 불씨가 된 것이었다.
“핵무장을 하겠다고? 그걸 왜 우리에게?”
[···연산 결과 핵확산의 책임을 명분으로 제국을 대표로 내세운 것으로 파악됩니다.]이건 또 무슨 소리지? 핵확산의 책임이 신성 왕국에 있다?
“그러니까 핵확산으로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으로 세계가 개판이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알아서 조용히 협상하자?”
[그렇습니다.]마루는 속으로 웃고 말았다. 인류 역사에서 조용히 협상하고 지나간 일은 자기들끼리 먹잇감 정해 놓고 뜯어 먹을 때뿐이었다.
‘이것들이 신성 왕국을 큼지막한 먹잇감으로 보고 있나?’
사실 마루는 핵확산에 긍정적인 편이었다. 서로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지금 상황에서 지구에서 제일 완벽한 대공체계를 갖춘 나라는 신성 왕국이었다. 신성 왕국에 핵을 쏜다면 요격하면 그만이었고, 향후 수상 도시가 완공되면 미사일류는 대부분 요격 가능했다.
왕국의 기술력을 총동원해 만들고 있는 기술도 있었다. 현재 신성 왕국의 최우선 과제는 새로 건설 중인 수상 도시였다.
수상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고 있는 기술이 바로 이클립스의 초진동 음파를 연구해 만들고 있는 공명(共鳴, resonance)현상을 이용한 베리어(barrier) 기술.
이론상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핵융합을 돌리기 시작한 신성 왕국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았다.
레조넌스 베리어로 수상 도시와 인근을 방어하기 시작하면 극초음속 미사일이나 레일건(Rail Gun)도 막을 수 있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대규모 방어막이 현실에 재현되는 것이었다.
‘방사능 차폐 소자는 이미 건축 모듈에 사용하고 있고.’
방사능 차폐가 신소재로 변이 괴수의 가공물을 혼합해 만든 구조체는 20~30cm 두께로 철근콘크리트 4~5m급 물성을 보여주는 신소재가 사용 중이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신성 왕국은 다른 나라들이 죽창을 찌르거나 말거나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냥 돌려보낼까?”
할 이야기가 뻔한데?
[···명분과 관련된 부분입니다.]인공지능과 동물들은 상관없지만, 국민은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디아나의 조언에 마루는 제국 특사를 만나보기로 했다.
‧
‧
‧
“들어오라고 하지.”
제국 특사는 무려 2개의 뇌둥둥 장치를 들고 들어왔다. 바로 떠오른 것은 정신파 발생기였다. 잭 니스 박사의 뇌둥둥이 나중에 염력과 정신계 능력이 발현됐던 이유가 뭐였나?
바로 남부 연맹에서 숨겨 놓은 생체 정신파 발생기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딴 걸 2개나 들고 왔다고?
제국 특사라고 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더니, 생체 정신파 발생기를 가져왔다고? 마루가 이클립스 손잡이를 잡은 채, 제국 특사를 바라봤다.
“그 장비. 남부 연맹의 정신파 발생기 같은데 말이야. 제국과 남부 연맹이 손을 잡았나?”
“교류가 있지만, 손을 잡은 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파 발생기가 아니라, 생체 통신기입니다.”
마루은 여차하면 썰어버릴 기세를 감추지 않았다. 제국 특사고 나발이고 지금 저딴 걸 들고 들어왔다고?
인공지능 애들이고 친위대고 전부 한 번 뒤집어야지 안보가 중요한데, 테러 병기가 될 수 있는 걸 가지고 들어오게 허가해?
“생체 통신기?”
“예. 아시다시피 신인류는 상위개체가 하위개체에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걸 응용해서 장거리 정보전달이 가능하게 만든 생체 통신기입니다.”
그걸 그대로 믿으라고? 마루는 안전과 생존에 민감했다. 실제로 생체 통신기라고 하더라도, 남부 연맹에서는 저것으로 테러를 시도하지 않았던가?
통신기로 쓰다가 안 먹히면 정신파 공격을 한다면? 내성이 강한 자신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위험에 노출되는 꼴이었다.
“다들 나가.”
“어? 괜찮겠음?”
“괜찮으니까. 나가. 전자파, 정신파 차단기 작동하고.”
마루의 눈치를 살핀 김 양이 고개를 끄덕하곤 제일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후드와 PD가 뒤따랐다.
회의실에는 마루와 제국 특사 그리고 문자로 접속한 기순이 남았다. 마루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남부 연맹과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만으로도 크게 양보했다고 생각했는데, 남부 연맹 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보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루의 날카로운 반응에 제국 특사가 재빨리 두 개의 장비 가운데 하나를 조정했다. 웅- 떨리는 감각이 스쳤지만 그뿐. 연결되지 않았다.
“어? 이게 이럴 리가 없는데. 조금 전에 확인했을 때는 잘 됐었는데 말입니다.”
[그거 정신파 차단기 작동해서 그런 거 아닌가?]기순의 문자가 모니터에 떠올랐다.
“그. 그렇습니까? 이건 그저 통신기입니다. 남부 연맹에서 중요한 사람들과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쪽에는 덴 브라운 총통 각하께서 직접 회담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특사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어째서 뇌둥둥 장치를 2개나 가지고 왔나 했더니, 하나는 남부 연맹 다른 하나는 제국과 연결한 것 같았다.
마루만 볼 수 있는 화면에 기순의 의견이 떠올랐다.
[이거, 남부 연맹과 제국이 붙은 것 같다.]북미자유무역 협정에서도 분위기가 그랬지만, 지금 제국 특사가 가져온 남부 연맹 특산품(?)을 보니 두 나라가 손을 잡은 게 확실했다.
당시 북미자유무역 협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제국에서 신형 비행선을 건조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신성 왕국만 운영할 수 있었던 혹한기 항행 가능 비행선을 제국도 운용할 수 있게 된 것. 제국은 신형 비행선을 이용해 남부 연맹과 멕시코 연합의 대표를 회담장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지금. 제국은 신성 왕국에 특사를 보내는 데 신형 비행선을 사용했고, 남부 연맹에 들렀다는 증거가 바로 생체 정신파 발생기인지, 생체 텔레파시 통신기인지였다.
[외교에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고 하더니 제국이 주적이라고 하던 남부 연맹의 장비를 사용하나니 어이없네. 저 생체 뇌둥둥, 텔레파시 통신기라고 하지만, 정신파 발생도 가능할지 모르는데 덴 브라운 아재가 그걸 받았다는 소리면 좋지 않은 걸.] [덴 아재가 남부 연맹이랑 손잡은 이유가 뭐 같냐?] [제국이랑 남부 연맹이 손잡은 이유?] [그래.]잠시 시간이 지나고 모니터에 문자가 떠올랐다.
[덴 아재 목표야 어떻게 하든 북아메리카의 통일 아니겠냐? 우리 왕국의 독주를 막아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을 수도 있겠고.] [독주는 무슨 씨발. 어이없네.] [지금까지는 제국이 배신한 것도 아니고, 솔직히 제국과 우리가 배신이니 뭐니 할 사이도 아닌 건 사실이잖아.] [······.]따지고 보면 기순의 말대로였지만 마루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덴 브라운 총통과 신성 왕국 건국 당시 했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이 북미를 통일한다면 전쟁 없이 깔끔하게 통일 제국에 합류하겠다고 했던 약속. 물론 자치권을 인정받는 조건이긴 했지만, 전쟁까지 하면서 각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한 약속이었다.
정식으로 한 조약도 아니었고 단순한 약속이었지만, 마루는 진심이었다. 그런데 만약 제국과 남부 연맹이 서로 합의해서 연방제 국가를 만들어 버린다면 그 약속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신성 왕국은 그 연방에 자연스럽게 합류해야 하는 건가? 식인귀들이 인간 농장, 인간 농노 굴리는 연방국가의 일원이 돼, 특이점까지 오른 기술력을 공유해야 하나?
마루의 서늘한 눈빛이 제국 특사를 향했다.
“우선 덴 브라운 총통과 이야기해보지.”
정신파 차단장치가 꺼지고, 웅-하는 느낌과 함께 생체 통신기가 작동했다.
뽀그르르륵-
‧
‧
‧
신성 왕국에 특사를 보낸 제국은 수소 폭탄으로 날아간 런던과 파리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최정예 부대를 동원하고, 1급 경계태세를 유지하도록.”
“알겠습니다.”
조사단에는 제국 최정예 부대가 동원됐다. 신성 왕국이 수소 폭탄을 사용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폭심지(爆心地)를 정밀조사 해야 합니다.”
“수소 폭탄이 터졌는데 폭심지를 조사해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재단의 파편을 생각해보십시오.”
“런던과 파리에 비슷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건가?”
“신성 왕국에서 수소 폭탄을 써놓고도 아무런 정보를 공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과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군.”
검은 촉수 괴물을 없애기 위해 미합중국에서는 도쿄에 전술핵을 사용한 적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술핵의 여파로 도쿄 지하에 있던 제단이라는 것이 파괴됐다.
그 파괴된 제단은 ‘제단의 파편.’이라는 이름으로 일본계 대기업 샬롯 그룹이 북미로 넘어오면서 가져왔다.
심은영 회장의 죽음 이후, 샬롯 그룹이 보유하고 있던 연구자료는 전부 신성 왕국이 독점한 것으로 보였다.
“일본이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있던 자료를 신성 왕국이 흡수했으리라 보입니다.”
“······.”
신성 왕국이 한국의 오진 그룹에 일본의 샬롯 그룹까지 독점하고 있다는 이야기. 거기에 남부 연맹이 결성되기 전, 버니지아 랭리의 비밀 연구소를 탈탈 턴 것도 그쪽이라는 심증이 확실한 상황이었다.
“신성 왕국의 신형 엑소슈트만 보더라도 미국 기업의 기술력을 그대로 흡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만든 비행선만 보더라도 신성 왕국의 기술력은 정상 범위에서 벗어난 발전 속도입니다.”
국토안보국이 보유하고 있던 비행선을 용병질 대가로 뜯어간 놈들이, 고작 1년 조금 지난 무렵 UFO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비행선을 뽑아내고 있었다. 이게 정상인가?
시애틀에 있는 회사들의 자료도 그렇고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기업체들도 신성 왕국이 전부 털어갔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미국, 한국, 일본의 기술을 신성 왕국이 싹 쓸었다는 이야기.
‘그러니 특이점을 먼저 돌파한 것이겠지.’
어쩌면 영국과 프랑스의 기술도 홀라당 빼먹고 증거 인멸로 수소 폭탄을 투하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총통 각하. 특사 자격을 요청한 남부 연맹 요원이 회담을 요청했습니다. 버지니아 랭리 컴퍼니, 죠셉 마이어 회장과 단독 회담 요청입니다.]덴 브라운 총통은 남부 연맹이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생체공학을 접하게 됐다.
‧
‧
‧
뽀그르르르륵-
[덴 브라운 총통이네. 오랜만이군.]“블라디마루 칼린입니다. 그렇군요.”
두 사람을 연결해주고 있는 것은 남부 연맹의 생체 통신기.
“그런데 이거 남부 연맹 생체 장비인데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신뢰의 문제는 필요의 문제라고 생각하네.]믿어야 할 필요가 있어서 믿는다. 그게 믿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본주의 미합중국을 계승한 제국의 총통다웠다.
“그렇군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런던과 파리를 날려 버렸더군.]덴 브라운의 말에 마루는 딱 잡아뗐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놀랍네요.”
마루는 덴 브라운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신성 왕국을 신뢰할 필요가 없어졌나 봅니다?”
[······.]지독한 적막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