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67)
러스트 [RUST]-67
서늘한 채로 회의가 끝났다.
사실 따지고 보면 회의라고 할 것도 없었다. 계약은 계약대로 해야지 계약이지, 좆대로 하면 계약인가? 마루와 기순의 의견이 일치했다. 무엇보다 마루의 약점인 오버 히트로 인한 부작용 알고 있다고 은근히 압박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치료를 해줬으니 부심을 부리는 건 이해를 하겠는데, 그래도 마루가 해준 게 있지 않나? 자기 입으로 말했듯 로열 마리나 근방에서 마루가 입구 컷 해주지 않았으면 호텔 샬롯의 피해는 엄청났을 거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번에 보트 6대 덤빈 것만 보더라도 마루가 없었으면 엔딩크레딧 올라갔다. 김 양이 있다고? 김 양이 작은 보트는 어떻게 처리했겠지만, 30m짜리 요트가 돌격하는 걸 어떻게 막음?
마루가 달려들어 끝장내지 않았다면 최소 30명 넘는 적들과 배 위에서 난전을 벌였어야 했고, 김 양이랑 호위 둘이서 중무장한 30명을 아무 피해 없이 처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그러니까 한 번 호구 잡히면 계속 호구 잡으려고 한다니까. 있는 것들이 더 해요. 더. 흥.”
기순이 코웃음을 쳤다. 재벌 한두 번 보나, 하는 짓이 다 그렇지, 호의로 접근하는 것처럼 하지만 결과는 등에 빨대 작업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호텔 사장 누님도 그래. 바로 본색은 좀 너무하지 않아? 대놓고 치자니. 호텔 입장에서는 본사 새끼들 줄여 놓고, 일본에서 본사 영향력도 같이 줄일 수 있으니까 좋겠지만, 우린 무슨 죄냐고?”
마루도 동의했다. 방금은 정말 선 세게 넘었다.
“말 잘하기는 잘했는데, 아까 너랑 이야기했었지만, 괜찮겠어?”
“자기가 무서운 여자면 어쩌겠어? 내 친구가 빡치면 샬/롯 호-텔이 될 텐데. 나도 친구 믿고 막 가보자 좀.”
“아요. 말이라도 못하면, 아무래도 찝찝하다. 너 그거 얇은 방탄복 있지, 그거 속에 입고 다녀라. 말 나온 김에 지금 입자. 나도 입고. 음- 김 양? 김 양도 입고.”
“네.”
다소곳하고 뭔가 조신한? 느낌마저 드는 김 양의 목소리였다.
크음- 큽.
뭔가 웃음을 참으려는 기순이었고, 마루는 사레들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어쩐지 다소곳해진 김 양은 그냥 착했다.
피해가 거의 없었다고 하지만, 기어 올라탄 해적들 처리하면서 여기저기 엽총에 맞은 자국이 있었고, 작살총이 박힌 자국이 있었다. 샬롯 본사에서 보낸 보트들과 싸우면서 생긴 총알구멍도 제법 있었고.
이게 구멍 좀 났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문제는 일본 순시선을 마주쳤을 때였다. 호텔 샬롯의 이름으로 피해 갈 건 간다지만, 본사 샬롯의 입김이 들어간 순시선이라면 배에 난 총알구멍을 핑계로 승선해서 배를 나포하려고 할 게 분명했다.
결과는 몰살 엔딩일 거고.
“그래서 전파 방해 장치를 떼어왔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자칭 사장 누님이 조종실 한쪽에 박아 넣은 기계 장비를 보며 뿌듯해했다. 일단 작동하면 반경 3~4km까지는 무전기가 먹통이 된다고 하니, 충분하긴 충분했다. 근데 충분한 게 문제가 아니고. 떼어왔으니 본사 입김 닿은 순시선이 알짱거리면 바로 전파방해 ON. 마음 놓고 썰든 쏘든 하란 소리 아닌가?
기순은 기분이 순순하지 못했다.
“아니, 저 사장님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무조건 널 투척해서 몰살각만 재고 있잖아.”
아무리 뭔가 인상에 콱 박혀도 그렇지. 이건 숫제 사람이 아니라 무적의 엑스-취급 아니던가? 하지만 앞에 엑스 붙은 거 치고 제대로 된 거 보기 힘들었다. 엑스-와이프(이혼한 부인) 라든지, 엑스-트라라든지. 설마 익스팅트(extinct 멸종)을 노리는 것일까? 아니겠지?
“일단 항로를 최대한 육지에서 떨어지게 잡고 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아주 멀리 떨어져서 가면 어쩌겠어? 이렇게 멀찍이 떨어져 가는데도 오는 건 의도가 있어서 오는 거니까 대비해야지 뭐.”
그렇게 항로가 또 수정됐다.
항구에서 기다리던 샬롯 본사 공격팀들은 예정된 날짜가 지났음에도 목표물이 오지 않자, 중간에서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유식별번호와 GPS로 위치추적이 가능했지만, 이 정보는 호텔 샬롯에서 중간에 조작해 제대로 된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는 것이 실착이었다.
“이대로 가면 전부 모가지야.”
“순시선을 수배해서 인근 해역을 뒤지는 수밖에.”
“순시선이 발견하면 바로 나포해서 처리하는 것으로 입을 맞춰야지.”
“그나마 현재 상황이 엉망이라 순시선을 수배하기 쉬워서 다행이야.”
“어디로 샜을까?”
“일단 관몬 해협과 세토 내해를 중심으로 찾고. 그곳이 복잡하니 큐슈를 돌아서 갔을 가능성도 배제하긴 어렵겠지. 그쪽도 일단 돌아보는 거로 하는 수밖에.”
본사 샬롯 휘하에 들어가기로 한 일본 큐슈 세력들이 힘을 합해 마루가 탄 카타마란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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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하늘로 뻗은 마스트. 삼각형으로 크게 부푼 돛은 바람을 가득 담고 있었다. 북에서 부는 바람을 타고 파도 위를 통통 내달리는 카타마란은 물수제비 같았다.
“와 무슨 붕붕 나는 것 같냐?”
마루도 이건 진심 놀랐다. 30m를 넘나드는 큰 배가 파도 위를 살짝살짝 점프할 때면 간이 쫄깃쫄깃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달려도 실제 속도는 얼마 안 돼. 기껏해야 25노트 왔다 갔다 할걸.”
“설마. 이렇게 붕-붕- 날아오르는 느낌인데?”
“자동차 타고 시속 40~50km로 방지턱 밟아봐라. 확 튀지. 딱 그 정도라고 생각하면 돼.”
기순은 태연자약했다. 마루는 우오- 감탄사를 내뱉고는 3층 소파에 풀썩 누웠다.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가을 하늘이 정말 높고 파랬다. 문득, 호텔 사장의 말에 청개구리처럼 대응했던 게 생각났다.
“야- 진짜 괜찮겠냐?”
“안 괜찮아도 괜찮아야지, 우리가 사람 죽이고 돈 벌자고 튀는 게 아니잖아. 일상으로 돌아가겠다고 튀는 건데, 사람들 계속 죽여대면 그게 모순 아니겠냐? 할 수 있으면 안 죽이고, 안 엮이고 신분 세탁하고 조용히 살면 되는 거야. 너 그러겠다고 한 거 아니었어?”
기순의 말에 마루가 시선을 돛으로 옮겼다. 팽팽하게 부푼 하얀 돛이 웅웅- 소리 냈다.
“그랬지. 근데 그게 짜증 나게 꼬이니까. 그냥 싹 밀고 가버려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런 생각이 들 때 더 조심해야 하지 않겠냐? 성질대로 썰어버리고 그러다 훅 오버 히트 찾아오고, 약 빨고 다시 열 받는다고 날뛰고, 또 오버 히트. 그렇게 중화제 박아 넣고 그렇게 성질대로 밀다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냐? 목적이 흔들리고 수단이 좆같아지면 혁명군이 카르텔로 변하는 것처럼. 나락은 순간이다.”
그래 그들도 시작은 혁명군이었고, 그들도 처음에는 혁명가였으며, 그들도 단지 일상을,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총을 들었다. 지금은 마약 카르텔이지만.
“그래 나락은 순간이지.”
행복한 가정이 박살 나는 것도 순간이었고, 배다른 형제간의 우애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는 걸 아는 것도 순간이었고, 깨달음은 언제나 순간이었다.
마루와 기순은 잠시 고요 속에서 곱씹었다.
삐익!
삐익!
삑삑삑삑삑
잠시간 고요를 음미하던 기순이 통신기를 켰다. 자칭 사장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레이더에 고속으로 움직이는 배가 관측됐어요.]“설마 이쪽으로 오는 건 아니겠죠?”
[그 설마가 맞네요. 레이더 영상으로 봐서는 대략 200~250톤급 선박으로 보이고, 속도는 27~28노트. 그 정도 크기에 저 속력, 거기에 이쪽으로 직진하는 것을 고려하면 일본 순시선 같군요.]“···통신 요청은 없었습니까?”
[우리가 도망치지 못할 정도의 거리까지 좁혀와서 하겠죠?]“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제가 무슨 생각이랄게 있겠어요?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나포당하시든, 어쩌시든 계약대로 제 안전만 지켜주시면 됩니다. 이 대답을 원하신 것 아닌가요? 그렇게 하세요.]“하- 알겠습니다.”
기순이 자기 머리카락을 쥐고 흔들었다.
“아아아아아악! 빡쳐. 저 누님 진짜. 뒤끝 좋아. 좋다고.”
기순은 대충 기억을 떠올렸다. 200~250톤급이면 스루기급 순시선이고, 엔진 3개짜리 고속 순시선이다. 최고 속력은 대략 40노트 이상, 씨발 빠르네. 지금 타고 있는 카타마란은 고속으로 기동하기엔 무리가 있는 요트였다. 대신 넓고 끝내주는 살롱과 라운지, 콕핏이 있지만, 지금 상황에선 쓸데없었다.
바람을 최대한 받고 엔진을 풀로 가동하면 30노트는 나오려나? 대충 27노트까지는 나왔는데, 일단 거리가 있으니까 런하자. 지금도 공해를 걸쳐서 이동하는데 이쪽으로 온다는 건 아무래도 사장 누님 잡겠다고 샬롯 본사에서 수배한 애들 같은데···.
“마루야 수상스키 준비하고, 김 양에게 저격 준비하라고 해줘.”
마루가 쿼드 스키로 날려 버린 요트에 수상스키 2개가 있었다. 쿼드 스키가 하나 남았지만 그건 수륙양용이 가능한 거라 아껴야 했다. 마루가 주섬주섬 허리에 아재칼을 차며 말했다.
“보위 나이프가 아웃이라, 이제 칼날이 긴 건 아재칼 밖에 없다. 이것도 나가면 막말로 단검 쪼가리랑 중식도 밖에 없어.”
“아니, 이 상황에서 칼 타령이냐? 총 쏴 총! 총 두고 뭐해. 우리 총 존나 많잖아.”
기순의 말에 마루가 시무룩했다.
총을 어떻게 믿나? 방탄복 입었으면 의미 없고, 헤드샷 하겠다고 하다 눈 마주치면 좆같고, 죽었는지 확인 사살도 해야 하고 여러모로 뒤끝이 좋지 않았다.
저지력도 약하고, 좀 괜찮은 저지력 하려면 45구경을 써야 하는데. 장탄수가 망인 게 대부분이고. 마루의 중얼거림에 언제 왔는지, 김 양이 대답했다.
“글록 좋아요. 글록도 45구경짜리 있어요. 응. 글록 41 장탄수 13발.”
마루가 영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김 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그거 있나?”
“있어요. 우리 그것도 있고. 9mm 기관단총이랑 총알도 있어요.”
“그래. 그거랑 전술 조끼랑 나 쓰는 스타일 알지? 대충 맞춰서 가져다주고. 넌 콕핏에 자리 잡고 저격 준비하고.”
“네-”
마루가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 적응 안 된다. 옛날 나루 보는 거 같아서 더.”
“푸-흐-흡- 그래 진짜 그러네. 살갑게 구니까 더 그래. 좀 맹한 느낌도 있고, 저런 느낌을 백치미라고 하던가?”
“됐고. 어떻게 할까? 순시선이 이쪽에 접근하면 졌다고 봐야 해. 내가 들어가서 난리를 친다고 하더라도 저쪽에서 20mm든 40mm든 발칸으로 여기를 한 번 갈기기만 하면 끝장이니까. 저번처럼 뒤를 받아서 운항 불능 상태를 만들고 튀는 게 제일 좋은데. 일단 내가 받아 버리면. 위로 올라가는 엔딩이니까.”
마루가 올라가면 의미가 없었다. 기껏 ‘되도록 죽이지 말자.’ 의기투합해 놓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몰살 테크 타면 웃기지도 않았다.
“김 양이 폭탄 좀 만질 줄 안다고 하니까. 구명튜브에 폭탄 달아서 후비에 던지고 튀는 방식을 쓸 수 있지 않을까?”
“된다면 그 방법이 최고기는 한데···.”
기순이 뭔가 떠오른 듯 인상을 썼다. 스크류 방식이라면야 효과가 있겠지만, 워터제트 추진이라면?
“워터제트 추진 방식이면 좆되는 건데.”
엔진 3개. 고속추진. 그리고 워터제트였었나? 일본 고속 순시선이? 기순이 통신기로 여사장을 찾았다.
“혹시, 일본 고속 순시선 추진 방식이 뭔지 아십니까? 스크류 방식인지 워터제트 방식인지 아시나 해서요.”
[200~250톤급 고속 순시선은 워터제트로 알고 있어요.]“아- 감사합니다.”
[뭘요. 워터제트 방식이라 후미에 어설프게 뭘 투척해도 소용없을 거예요. 제일 좋은 건 승선해서 정리하는 게 그나마 확실하지 않을까 하군요. 이건 그냥 제 의견이에요.]뚝-
자기 할 말 하고 끊은 심 사장이었다.
“흐으으- 진짜 이 사장님 작렬하네. 하 이걸 어쩐다.”
“어쩌긴 뭘 어째? 던지고 또 던지고 해봐야지. 나 혼자는 힘들 거 같고, 사장님 경호원이랑 둘이서 각각 2개씩 한 4개 던져 보고 그래도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혼자 가면 화력이 집중된다. 최소한 둘 이상 가는 게 좋았는데, 김 양은 오른팔도 그렇고, 저격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래서 광학 은신 장비에 경호원까지 내달라?”
“제일 효과적인 방법이 그겁니다.”
마루와 경호원이 전면에 광학 은신 장비를 댄 수상스키를 타고 고속 순시선 후미에 접근, 김 양이 만든 C4 폭탄을 후미와 20mm 발칸 포대에 투척, 기동력과 공격력을 파괴하자는 것.
“제일 효과적인 방법은 따로 있지 않나요?”
사장이 슬쩍 마루를 보며 말했다. 기순이 낮은 목소리로 반대했다.
“사람은 단순한 무기가 아닙니다. 정말 어이없는 실수를 할 수 있는 게 사람이죠.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실수란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사람이 현장에서 날뛰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위험을 최대한 피할 수 있고, 조금이라도 안전한 방법을 쓸 수 있다면 그걸 먼저 쓰는 게, 합리적이라 생각합니다만.”
자칭 심 사장이 ‘호오-’하는 표정으로 기순을 봤다. 그다지 기분 좋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납득은 하는 표정이었다.
“좋아요. 그러죠. 하지만 이건 분명히 알아두셔요. 지금 제 경호원이 제 곁을 떠난다는 건. 그만큼 제가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임을. 그리고 광학 은신 장비를 제공하는 것도 저로서는 모험이라는 걸. 이번에도 제가 호의를 베풀었다는 걸 기억하면 좋겠군요.”
잠시 뒤, 일렁이는 느낌과 함께 광학 은신 장비를 댄 수상스키 두 대가 파도를 갈랐다.
우우우웅-
잠시 일렁이던 공간에는 하얗게 갈라진 물살만 남았다. 그리고 저 멀리 고속 순시선이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