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688)
러스트 [RUST]-688
미약하지만 분명히 경고하고 있는 감각.
마루는 이런 느낌을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바람처럼 달리던 마루는 뜀박질을 멈추곤 숨을 골랐다.
리퍼 슈트 헬멧 환기시스템이 작동하며 뜨거운 공기가 뿜어졌다. 영하 47도의 혹한에 습기 가득한 숨결이 하얀 결정으로 흩날리며 숨죽였다.
달리기를 멈추고 천천히 호흡하자 다그치던 감각이 점차 잦아드는 느낌. 덴 브라운이 있는 총통관저와 로아나 블랑이 있는 교역소와 멀리 떨어진 주둔지.
‘어째서 여러 주둔지 가운데 이곳이지?’
세력이 뿔뿔이 흩어진 버지니아 잔당이라고 하더라도 놈들은 이쪽 방면의 전문가였다.
‘테러 조직 그것도 점조직으로 된 새끼들이 지랄 맞은 이유는 하나를 잡아도 나머지가 멀쩡하게 설치기 때문이야.’
‘미국 전성기에도 테러 조직하나 잡겠다고 천문학적인 돈을 뿌렸지만, 잡는데 일 이년도 아니고 십 년 넘게 걸렸다고. 골 때리는 건 그 테러 조직이 사실은 버지니아에서 교육한 테러 조직이라고 하더라. 웃기지 않냐?’
기순이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테러 조직을 잡는 조직이 버지니아 랭리. 테러 방비 교육도 했지만, 역으로 테러 조직을 교육하기도 했던 버지니아 랭리. 그들이 테러 조직이 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었다. 덴 브라운과 로아나 블랑 가운데 하나가 목표이지 않을까 예측했었지만, 실제 노린 건 군부.
허점을 찔렸다고 생각해서 허겁지겁 이쪽으로 왔지만, 양동작전의 양동작전이었다면?
마루는 다시 깊게 호흡을 골랐다.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감각. 당장 위험하지 않았지만, 이 서늘함은 언제든 위험으로 변할 수 있는 냉기였다.
냉기의 또 다른 이유.
제국정보부의 전신은 국토안보국이었다.
국토안보국은 미합중국 내의 대테러 기관이었고.
그렇다면 그 정보기관의 정점이었던 덴 브라운 총통은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을까? 정말? 만약 예측했으면서도 구조를 요청한 것이라면, 무엇 때문이지?
‘배신인가?’
아니.
배신은 아니다.
덴 브라운이 배신했다면 함정을 만들었을 터.
그랬다면 반드시 위기 감지에 걸렸을 거다.
‘젠장. 기순이가 있었어야 해.’
기순이 각성한 능력. 상대방의 감정을 색으로 보는 능력으로 확인했다면 덴 브라운의 감정과 대응을 분석할 수 있었을 거다.
‘움직인다.’
이런 고민조차 놈들의 심리전에 말렸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 다시 깊게 들어갔다 나오는 날숨에 생각을 털어내는 마루.
지금은 작전 중.
복잡한 생각은 처리하고 나서 해도 그만이었다.
이 소란까지 적의 함정이라면 무엇을 위한 함정일까?
주둔 부대가 무너질 상황이면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까?
중무장한 군대가 서로 총질하고 살아남은 병사들이 모조리 흡혈귀의 추종자가 되는 걸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이 상황을 종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단 한 사람.
그래.
지금 이 상황은 함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루 자신을 부르는 초대장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오면 좋고 오지 않으면 군부를 먹으면 그만이라는 식의 그딴 초대였다.
‘이 새끼들이.’
짙은 살기가 일렁이며 피어올랐다.
‧
‧
‧
푸슉-푸슉-
소음기를 단 총에서 억눌린 소리.
어디선가 흘러내린 핏방울이 서서히 식어갔다.
“이거 괜찮겠습니까? 대기하기로 해놓고 자리를 비우는 건 나중에 좀···.”
“괜찮아. 괜찮아. 우리가 본래 결과주의(結果主義), 실적주의(實績主義), 성과주의(成果主義)였잖아.”
투명하게 일렁거리는 무엇이 경쾌하게 가속하더니 계단 난간을 밟고 뛰어올랐다. 건너편 벽을 박차 올라 3층 테라스에 내려앉는 소리는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총성과 폭음에 묻혔다.
“저걸 보라고 다른 놈들 요란하게 시선을 끌고 있잖아.”
확실히 그랬다. 귀족이 아니라 기사만 되더라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침투할 수 있었다. 그럼 왜 저렇게 난리를 칠까.
“제국의 병력을 줄이면서, 추종자를 만들려고 하는 거지. 동시에 유인하려고 하는 거고.”
“유인입니까? 누구를 유인하려고···.”
“제국이 자랑하는 신형 클론이 오면 좋고, 덴 브라운 총통과 같이 오면 더 좋고. 뭐 죠셉 마이어 회장님이 극찬한 블디마루 칼린이 오면 미치도록 좋고. 그런 거 아니겠나?”
“블라디마루 칼린이 올 가능성이 있습니까?”
부하의 질문이 귀찮지도 않은지 설명을 이어가는 귀족이었다.
“저쪽 팀은 거기까지 가정하고 외곽을 돌면서 정신파를 퍼트리고 있는 거다. 신형 클론이나 덴 브라운 총통이 와도 좋지만, 지금까지 덴 브라운이 행동한 패턴을 분석해 보면 블라디마루 칼린에게 도움을 요청했었거든.”
신입은 팀장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이대로 병사들을 흡수해, 병력을 키우고. 제국의 신형 클론이나 덴 브라운이 온다면, 장악해서 휘하로 끌어들이면 그만.”
“혹시라도 블라디마루 칼린이 온다면? 귀족의 정점. 자연산(?) 귀족. 진정한 왕의 그릇이라고 평가한 블라디마루 칼린을 직접 볼 기회가 생기는 거지. 그의 피나 조직을 얻을 수 있게 된다면 말 그대로 잭팟이고.”
역시 귀족의 생각은 알기 힘들구나.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부하에게 팀장이 자기 관자놀이를 톡톡 치며 말했다.
“중요한 건 말이야 언제나 머리라고 머리.”
생각하는 것도 머리, 제일 먼저 쳐야 할 것도 머리.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군부의 머리를 제일 먼저 장악하는 놈이 유리했다.
까득-
방탄유리로 된 창문을 통째로 뜯어내고 지휘본부 건물 내부로 들어선 흡혈귀들은 몇 걸음 떼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피 냄새?’
피에 민감한 귀족이 됐기에 알 수 있었다. 그냥 짙은 혈향(血香)이 아니라는 것을. 마찬가지로 귀족이 됐기에 사방에서 흘러넘치는 짙은 유혹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사방에서 피 냄새가 진동한다는 건···. 뭐 됐어. 어쨌거나 내가 쓸 수 있는 피가 많아졌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피가 많다는 건 그의 힘이 강해진다는 뜻.
“제국은 클론과 능력자를 중심으로 군부를 개편했어. 클론 부대야 덴 브라운 총통의 직속으로 움직인다지만, 기존의 병력을 통제하는 군부는 기존 연방군 출신 장성이야.”
“총통을 중심으로 뭉쳤다지만, 군부와 갈등이 있겠군요.”
“군부만이 아니지, 제국 의회와 행정부, 재계에서도 불만이 많아. 단지 대놓고 반기를 들 상황이 아니니까 속으로 파고들 뿐.”
상황을 보아하니 이쪽과 똑같이 군부를 장악하겠다고 들어온 녀석들이 있다는 소린데. 피 냄새가 짙은 걸 보아하니 한 판 거하게 붙은 것 같았다.
문제가 있다면
‘먼저 들어온 놈들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고 있다는 건데···.’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양패구상(兩敗俱傷)으로 보기엔 냄새가 너무 짙지 않습니까?”
신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역시 똘똘한 신입이었다. 촉도 좋은 것 같고.
“그만큼 치열하게 싸웠다는 소리니까 나쁠 것 없지.”
복도 끄트머리에 흘러내린 피들이 슈륵슈륵 길게 늘어지며 뱀처럼 서서히 흐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작전통제실에 도착한 그들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경첩소리도 나지 않고 매끄럽게 열리는 문.
동시에 훅- 코를 파고드는 피 냄새가 아찔했다.
아무리 주식이 피라고 하지만, 똥오줌 섞인 피 냄새는 확실히 쉽지 않았다. 저절로 찌푸려지는 미간.
!
!!!
작전통제실은 마치 지옥의 도축장 같았다. 수직으로 쪼개진 시체 사이로 쏟아진 내장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
“HOLLY···.”
좌우로 양분된 자들과 동시에 절단됐는지, 깨끗하게 조각난 책상과 의자 위에 얹혀진 시체들···.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소리를 따라가면 축구공처럼 널려있는 머리통들이 있었다.
동그랗게 눈을 뜬 채 빛을 잃을 동공 뒤로 난초처럼 길게 뻗은 칼질이 철근콘크리트 도화지에 빨간 수묵화를 그리고 있었다.
압도적인 살육의 흔적에 산전수전 다 겪은 팀장마저 질려버렸다. 귀족인 자신도 이렇게 하긴 힘들었다.
흡혈귀 특유의 감각이 현장의 비밀을 속삭이고 있었다.
단 한 사람이 만든 흔적이라고.
그것도 중무장한 신인류가 섞여 있는데도 모조리 해체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몇 초.
“이. 이게 뭡니까?”
“조용히 해.”
아직 피가 따뜻했다.
바짝 긴장한 채로 주변을 훑자, 핏방울이 허공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흔들거림?
리퍼 슈트?
절단과 토막?
“블라디마루 칼린이다!”
그의 외침과 동시에 바닥에 흥건한 핏방울이 붉은 꼬챙이로 변해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튀어나온 붉은 말뚝 표면을 타고 가시가 돋아나더니 순식간에 가시덤불이 만들어졌다.
붉은 가시로 형성된 바리케이드가 일렁이는 공간과 흡혈귀 사이를 가로질렀다. 콰드드득- 콰지지직- 피로 만든 가시덤불이 잘린 책상과 시체, 길게 패인 철근콘크리트를 헤집었다.
그 맹렬한 확산에 자기도 모르게 만족한 미소를 지은 팀장이 신입을 불렀다.
“놈을 가뒀다. 산성 체액 준비해.”
“······.”
“놈의 칼은 산에 약하니까 처음에는 칼을 노려.”
“······.”
“뭘 하는 거야! 산성 체액 준비하라니까!”
고개를 휙 돌리자, 눈에 들어온 건 부하의 이마에 생긴 손잡이였다. 스틸레토가 손잡이만 남긴 채 신입의 머리통에 박혀 있었다.
!!!
신입을 바라봤던 시선이 다시 정면을 향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건, 수평으로 길게 그어진 검은 실선.
▬▬▬▬▬▬▬▬▬▬▬▬▬▬▬▬▬▬▬▬▬▬▬▬▬▬▬▬▬▬▬▬▬▬▬▬▬
피로 만든 굵은 말뚝과 가시덤불이 소리 없이 절단되는 모습은 환상 같았다.
쩍- 상하로 벌어진 틈을 타고 쏘아진 검은 점이 팀장의 가슴을 때렸다. 둔탁한 충격이 심장을 관통했다.
큽-
고개를 숙여 가슴을 보자, 자신의 심장을 꿰뚫은 스틸레토가 보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스틸레토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뽀··· 뽑아야 해.’
칼날에 꿰인 심장은 귀족 특유의 질긴 생명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니까 빨리 뽑아서···.
서걱-
순간적으로 빙글 시야가 돌며, 심장에 꽂힌 칼 손잡이를 두 손으로 움켜쥔 자신의 몸통이 보였다.
툭-
데구르르–
툭-
바닥에 널려있던 머리통과 부딪친 팀장의 동공이 서서히 풀렸다.
‧
‧
‧
작전통제실은 말 그대로 개미지옥이 됐다.
사병들을 흡수하며 누군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놈들도 한참 시간이 지났음에도 구조대가 오지 않자, 정보를 얻기 위해 작전통제실로 들어왔다가 불귀의 객이 됐다.
[제국군은 어떻게 하려고?] [어떻게 하긴. 정신 빠졌으면 제정신 차리게 해주면 되는 거지.]본부 건물로 들어간 흡혈귀들이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지배력까지 풀리자, 남아 있던 식인귀들이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이게 뭔 일이야?”
“우리 팀장님과 연결이 끊겼습니다. 그쪽도 그렇습니까?”
“그래. 여기 모인 자들 전부 팀장과 연결이 끊긴 것 같다.”
“수색할 겁니까?”
“미쳤냐? 안으로 들어간 팀장 숫자만 일곱이다. 중급 귀족까지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끊겼어.”
도와달라는 정신파를 보낼 틈도 없이 그냥 끊겨버렸다는 게 문제였다. 저 안에 있는 건 괴물이었다.
“일단. 계획대로 움직이자. 여기 추종자들을 각자 나눠서 총통관저로 간다.”
“이 병력이면 가능하겠군. 동의.”
정신파에 휘둘려 넋이 나간 병사들은 식인귀들의 인솔에 따라 장비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마루가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뭣?”
나름 중급 정도 되는 식인귀 하나가 반응했지만, 몸이 굳어버렸다.
울컥-
공기를 잠식하는 살기.
일렁이는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죽음이 동그란 파동처럼 퍼졌다.
커으헉-
으으아아아아악-
우웩!
흡혈귀의 정신파에 오염됐던 병사들이 무너져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