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75)
러스트 [RUST]-75
잔잔한 바다는 드문드문 붉었다.
사람의 흔적만 남아 표류하는 배들 위에 펼쳐진 풍경은, 말벌이 쳐들어간 벌통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과 비슷했다. 머리와 몸통이 잘린 꿀벌들의 흔적이 사방에 흩어진 모습이 떠오르는 광경.
헉- 헉-
마루는 힘겹게 조타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미친···. 후-”
쓰고 있는 방탄 마스크가 여기저기 깨져 간신히 얼굴에 걸쳐 있었다. 방탄복에는 여기저기 총탄에 맞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총탄에 스친 팔뚝과 종아리에서는 얕게 피가 배어 흘렀다. 발걸음마다 붉은 발자국이 점점 찍혔다.
빨리 정리하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처음에는 그나마 사람과 싸우는 느낌이었다면 나중에는 말로만 들었던 남미 카르텔을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완전히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반쯤은 돌아간 눈동자들···.
“후-욱- 미친 새끼들!”
역시 총은 너무 자주 눈이 마주쳤다. 왜 그렇게 절박했을까? 마약성 전투자극제? 가족이 인질이라도 잡혔나? 전부 성전이라도 하겠다는 거였나?
마루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옆 사람이 죽으면 무섭지 않나? 앞이 죽으면 뒤에 있던 사람들은 도망칠 생각하지 않나? 그렇게 죽이고 죽였는데도 꿀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달려들었다. 칼이라도 있었으면 단칼에 여럿씩 정리했을 텐데···. 이해할 수 없는 적들이 숫자까지 많았다.
말 그대로 인해전술이었다. 일반인의 신체 능력을 한참 뛰어넘는 마루였지만, 머리에 해드샷 한 방이면 죽는 건 마찬가지였다. 급소에 맞으면 무력화되는 것도 똑같았다. 스치듯 생긴 작은 상처도 출혈을 내기 마련이었고, 출혈은 결국 체력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작은 상처도 입지 않게 피해야 했다.
극한의 집중력과 감각을 써서 싸운 결과, 오버히트가 되고야 말았다. 전신이 녹을 것만 같았다. 중화제를 두 번이나 쓰고서야 어느 정도 추스를 수 있었다.
바다가 아니라 뭍에서 싸웠다면 이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바다에서 작고 좁은 배를 뛰어다니며 싸워야 했다. 중간부터는 마루가 뛰어올라 앉은 배 자체를 공격해 정말 위험했었다.
“씨발- 기순아! 김 양!”
조타실 인근에 쌓인 시체들은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요하도록 잔잔한 바다. 요람처럼 흔들리는 카타마란의 하얀 선체를, 저물어 가는 노을이 붉게 물들였다.
======
======
서울, 샬롯 그룹 본사.
서울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각별했다.
심은규는 이 풍경이 자신의 것이 되리라 믿었다. 서울을 지배하는 자가 결국 한국을 지배한다. 양지만 지배한다고 서울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음지까지 지배할 수 있어야 진정한 지배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샬롯 그룹은 음지에서의 지배력이 다른 그룹보다 강했다. 다시 말해, 절반은 서울을 지배할 준비가 됐다는 의미였다.
‘하나씩. 그렇게 하나씩.’
심은규는 손에 들고 있던 위스키 잔을 살짝 기울였다. 독한 위스키가 입안을 달궜다. 갈증이 타오르는 느낌. 그래 이건 욕망의 맛이었다.
“빌어먹을 년.”
그년만 없었어도. 샬롯 그룹은 더 빨리 커졌을 것이다. 하나로 뭉쳐 커가기도 바쁜 마당에, 호텔과 건설을 빼먹은 년만 없었더라면.
“뭐. 그래도 이젠 끝났겠지.”
심은규는 자신이 이룩한 결과에 뿌듯했다.
일본에서 심은영을 지지하는 세력들 절반 이상을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 샬롯 그룹은 금융업에도 손을 뻗는 데 성공했다. 증권과 캐피탈. 이를 기초로 모바일 뱅크와 인터넷 결제도 거의 다 끝났다.
이제 카드사, 증권사, 캐피탈, 보험이라는 금융 4개 사를 시작으로 모바일 뱅킹, 모바일-인터넷 결제 시스템에 진출하면, 백화점과 대형마트, 아울렛과 명품관을 거쳐 홈쇼핑까지 연결됐다. 이게 제대로 돌아가는 순간부터 샬롯 그룹의 현금 동원 능력은 급격하게 성장할 것이다.
“이사님. 시코쿠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역시 큐슈는 패스하고 시코쿠로 갔나? 빌어먹을 년.
끝까지 머리를 썼지만, 예상 범위였다. 큐슈 남부지역 놈들을 진작 시코쿠로 보냈으니까. 가족들 절반을 먼저 받아주고, 나머지 모두 한국으로 이주하려거든 실적을 내라고 했으니, 아랫것들을 갈아 넣어서라도 실적을 내려고 했을 것이다.
가족이 걸리고 생존이 걸리면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실적을 만들려는 자들 앞에 내던져진 심은영이 도망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좋은 보고를 기대한 심은규는 위스키를 한 모금 더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산 샬롯 명의로 된 배를 찾아 공격했지만, 심은영 사장은 타고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뭐야? 그럼 그년은 어디로 갔어?”
“아직···.”
심은규의 손에 들린 잔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 그럼 그 배에 타고 있는 것들은 뭔데? 어떻게 됐어? 심은영이 김 양과 칼잡이를 데리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것들은? 생포했나? 죽였어?”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워낙 저항이 심해서···.”
하-
그럼 배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거 아닌가? 근데 어떻게 그년이 탔는지 타지 않았는지 알아? 이것들이 정말 일을 대충대충 넘어가려는 거 아니야?
“교전을 벌이는 동안 배를 수색했지만, 심은영 사장의 흔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확실한 거야?”
“예.”
“김 양이랑 칼잡이의 생사가 불분명하다는 건, 배를 나포하는 데 실패했다는 소리고?”
“예.”
“정말 어이가 없군. 김 양과 칼잡이의 약점에 대해서는 월드의 최 전무가 말해줬을 텐데, 그걸 알면서도 생포하지도 못하고 죽이지도 못했다? 능력이 없는 걸까? 아니면 절박하지 않았던 걸까?”
월드의 최 전무가 정보를 줬다. 김 양의 약점에 대한 정보. 월드에서도 세 손가락에 드는 총잡이에게 그런 약점이 있다는 게 놀라웠지만, 월드라는 회사가 그 약점을 틀어잡고 관리하고 있었다는 점이 더 흥미로웠다.
최 전무와 그 직속을 후퇴시킨 칼잡이의 약점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약점이라고는 없다고 봐도 될 법한 놈. 인해전술로 조지는 게 약점이라니. 직접 싸워본 최 전무가 말한 내용이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어이없었지만 인력을 갈아 넣을 방법은 많았다. 그러니 생포하든 죽이든 끝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막바지까지 몰아가는 데 성공했지만, 인근 마약쟁이들이 엉겨 붙는 바람에 마무리를 못 지었다고 합니다.”
“마약? 대놓고 마약쟁이들이 설치고 있다고?”
치안이 무너졌다는 보고는 받았다. 그런데 대놓고 마약쟁이들이 설칠 정도라니.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나빠지고 있었다.
규슈의 화산들은 화산재를 내뱉는 것을 넘어서 용암을 분출하고 있었다. 지진파가 미친 듯이 관측되고 있었고, 이것은 또 다른 대형 화산의 분출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시코쿠와 혼슈 서부 지역은 그나마 통신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규슈와 혼슈 동부 지역은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그렇게 통신두절 상태가 4일이 넘어 5일 차였다.
일본 국토의 절반 이상이 통제에서 벗어난 상황. 언제 행정력과 공권력을 회복할 수 있을지 기약하기 힘들었다. 행정력과 공권력을 회복한다고 하더라도 무너진 인프라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번 지진으로 미친 듯이 누출됐을 게 뻔한 방사능은? 불확실한 전망 가운데 확실한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는 사실상 그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이었다.
심은규는 꽉 쥐었던 잔을 다시 기울였다. 높은 전망 아래 펼쳐진 것은 번화한 서울이었다.
이렇게 변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일본이 먹다 흘린 것을 닦는 발걸레 정도로 생각했던 한국이었다. 잘해야 등골에 빨대나 꽂아 빨아먹기 좋은 맛집으로 생각했던 한국이 이렇게나 클 줄 누가 알았겠나?
90년대 말, 버블의 끝에선 일본 경제에 기사회생의 기회를 준 것도 한국이었다. 한국이 IMF로 무너졌기에 일본의 금융업, 대부업이 기회를 얻고 번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빨대가 꽂힌 한국은 IMF 이후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심은규는 젊은 시절 한국어를 배워서 뭐 하냐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한국어를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룹에서 중요한 안건은 일본어로 회의했었으니까. 그렇게, 한국을 빨아 먹고 일본이, 일본 경제가 다시 비상할 것이라 믿었었다. 그런데 지금 현실은 아이러니했다.
“하- 그년의 목을 가져와. 쓸데없는 소리나 나불대는 년의 주둥아리를 다물게 하란 말이야. 다 잡은 놈들도 마무리 짓고. 다 잡았으면 끝까지 마무리해야지.”
김 양과 칼잡이도 확실히 끝을 내고. 월드와 악연이 깊은 놈들이니, 놈들의 목을 쳐서 받을 건 받아야겠지.
인해전술? 좋은 일이었다. 거기에 소모되는 것들은 어차피 심은영에게 붙었던 놈들이었다. 이쪽으로 전향한다고 다 받아줄 필요가 있을까? 서로 죽고 죽이면 여러모로 좋았다.
======
======
조타실 근처에 쌓인 시체를 발로 밀어 버린 마루가 힘겹게 안으로 들어섰다. 조종석 의자에 씌워진 방탄복은 걸레처럼 너덜거렸다.
“기순아! 김기순!”
마루의 외침에 응답이라도 하듯 팔이 하나 슬쩍 위로 솟았다.
“야 부르면 씨발 대답을 해야지. 괜찮냐? 엉?”
“···넌, 존나··· 눈으로 봐서 이게 괜찮아 보이냐?”
‘뒈지는 줄 알았다고. 왜 이렇게 늦게 쳐 오고 지랄이야.’ 웅얼거리는 기순이었다.
마루의 얼굴이 구겨졌다. 한쪽 팔에 칭칭 감긴 벨트. 팔꿈치 관절에 반쯤 박힌 파편이 눈에 들어왔다. 하필 관절 부위라니. 팔 병신이 될지도 몰랐다. 뭔 짓을 했길래 이런 파편이 박힌 거야? 병원은? 도쿠시마로 돌아가야 할까? 근처에 종합병원이 있었다.
“다시 항구로 가서, 병원 가자.”
“지랄. 이 동네에 우리 잡겠다는 인간들이 깔렸는데, 거길 들어가면 다 죽어. 뻔히 알면서 그럴래? 오버히트는 어쩌고?”
“너 팔 병신 된다고.”
“팔 하나랑 목숨이랑 뭐가 중요하냐? 당장 팔 병신 된다고 결정 난 것도 아니고. 좀 큰 항구면 수술 가능한 병원 끼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빨리 가자. 이럴 시간에 빨리 가는 게 맞아.”
기순의 말에 마루는 속이 터졌다.
“씨발···. 너 이렇게 될 동안, 김 양은 뭐 하고 있었는데?”
“알면서 묻지 좀 마라. 김 양 없었으면 진작 전부 뒈졌을 거 뻔히 알면서 그럴래?”
아 진짜. 마루는 가슴이 답답했다. 중화제를 박아 넣었는데도 열불이 뻗쳤다.
“그래서 김 양은?”
“저기.”
기순이 고개를 돌려 김 양이 있는 곳을 향했다. 그곳엔 축 늘어진 김 양이 있었다. 깁스한 오른팔에서 방울진 핏방울.
‘이것들이 쌍으로 팔이.’ 말을 하려던 마루의 눈에 기순이 쓴 방탄모가 보였다. 작게 빗긴 탄흔. 작았다. 9mm라면 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 22구경과 9mm 탄흔은 차이가 확연했다. 이건 어떻게 봐도 22구경이었다.
“야. 김 양이 너 쐈냐?”
그것도 헤드샷을?
“연막이나 안개 끼면 눈 돌아간다며? 씨발 나 아파서 뒈지겠다. 좀 가자. 지랄은 나중에 하고 일단 가자. 너도 얼음물에 들어가야지. 빨리 여기서 뜨자고. 일단 병원 가자며?”
마루는 조타실 냉장고를 열어 에너지 드링크 몇 병을 입에 부어 넣고 일어났다. 차가운 에너지 음료가 들어가자 조금 속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은 것만 같았다. 옆에 있던 초코바를 우걱 입에 쑤셔 넣고 밖으로 조타실 나간 마루였다.
저쪽에서 느릿하게 다가오는 수륙양용차량이 보였다. 일단 저걸 가져오고, 챙길 거 챙기고 뜰 준비해야 했다. 전신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근육통이 올라왔다.
그래, 빨리하자. 빨리하고 쉬자.
마루는 수륙양용차량을 챙겨 넣고. 갑판에 널린 시체들을 바다로 밀었다.
김 양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기순도 언제 잠들었는지 기절했는지 늘어져 버렸다. 대충 자동항법장치 돌리는 건 배웠으니까. 마루는 기계를 조작해 배를 움직였다. 엔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보라색과 남색이 뒤섞인 바다를 향해 카타마란이 움직였다.
“하- 미친-힘들어 죽겠네.”
선수에 있는 월풀 욕조에 얼음을 가득 채워 넣고, 그 안에 들어가자 그나마 좀 살 것 같았다. 한쪽 하늘에 하나둘씩 별이 보였다. 그리고 규슈가 있는 방향은 마치 검은 붓으로 하늘을 칠한 것처럼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기순과 김 양이 살아있는 걸 확인했는데도 불안했다.
적들이 득실득실했던 도쿠시마항을 떠났는데도 불안감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불안감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짜증이 났다.
“아- 진짜···.”
순간 찡하는 느낌. 울렁거리는 속.
일본에서 한국으로 도망쳤을 때 비행기에서 느꼈던 감각?
어?
뭐지?
갑자기 배가 통째로 엘리베이터에 타기라도 한 것처럼 아래로 쑥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12m? 15m? 월풀욕조에서 벌떡 일어나 사방을 둘러봤다.
해수면이 갑자기 낮아진 느낌.
썰물처럼 바다가 확 빠지는 감각.
근데 이렇게 갑자기 빠지는 느낌이라고?
썰물은 서서히 빠졌다. 이렇게 갑자기 확 빠지는 일이···.
찌리리리리릿
전신이 찌릿하며 머리카락이 곤두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