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76)
러스트 [RUST]-76
온다.
뭐가 온다.
마루는 남쪽 해역을 살폈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어둑한 바다는 그저 어둑한 바다였다.
찌릿찌릿한 감각은 아니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 감각에 마루는 긴장을 놓지 않고 바다를 살폈다.
어?
저기가 저랬었나?
수평선이 불룩 올라간 느낌.
수평선이 한 12~15m가량 상승했다?
파도인가?
파도가 저렇게? 아니, 저건 파도가 아니다!
거대한 해일도 아니었다. 바람이 불지 않으니까.
그럼?
쓰나미?!
마루는 미친 듯이 조종실로 향했다. 피할 수 없다.
쓰나미에 밀려버리면 답이 없었다. 밀려오는 쓰나미를 타고 역으로 올라야 했다.
낮게 욕설을 내뱉은 마루가 엔진 출력을 최대한으로 올렸다. 얼마 후 검은 너울이 불룩 배 앞으로 다가왔다. 먼바다에서는 그냥 출렁이는 여울 같은 느낌이었는데 육지 쪽으로 밀릴수록 뭔가 높이가 높아지고 있었다.
한껏 기름을 먹은 엔진이 힘겨운 소리를 냈다. 배가 산을 등반하듯 너울을 타오르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무엇 때문인지 선체가 비명을 질렀다. 선수가 휙 기울며 30도가 넘는 각도로 고개를 들었다.
뒤로 밀리는 건지, 앞으로 나가는 건지, 그 둘이 평형을 이뤄 공중에 붕 뜬 느낌이었다.
“씨바아아아알!”
이게 뭐야.
뒤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거의 한 시간 넘게 바다로 나왔는데 언제 이렇게 밀린 거지? 돌아보니 저편에 불빛이 보였다. 항구였다. 풀로 돌린 엔진이 지쳐서 허덕일 무렵 간신히 물로 만들어진 언덕을 타고 넘을 수 있었다.
한숨 돌린 마루의 눈앞에는 쓰나미에 삼켜지는 항구가 있었다.
검은 장막이 덮이듯 여기저기 밝게 빛났던 불빛이 꺼져가기 시작했다. 밤을 깨우던 사이렌 소리가 침묵하고 항구는 마치 침몰하는 배처럼 가라앉았다.
======
======
쓰나미는 한 번이 아니었다.
점차 높이가 낮아지긴 했지만 여러 차례 시차를 두고 덮친 쓰나미였다. 물이 빠지나 하면 다시 덮치고, 또 빠졌다 싶으면 다시 덮치기를 여러 번.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했던 마루도 견디지 못하고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마루는 깨자마자 기순과 김 양을 살폈다. 그 난장판이 벌어졌는데도 기순과 김 양은 깨지 않고 있었다. 둘 다 열이 펄펄 끓고 있는 상황. 급하게 항생제를 주사하고 해열제와 수액을 놨음에도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았다. 둘 다 너무 갑작스럽게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배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루는 GPS 지도를 확인했다. 도쿠시마항 건너편 남쪽에 있는 항구도시 다나베시가 밤에 봤던 도시였다. 지도에 표시되는 종합병원은 2곳.
일단 병원으로 데려가야 하나?
아직 오버히트의 부작용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황. 둘 모두를 지킬 자신이 없었다. 적들이 이쪽에도 있다면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의사든 간호사든 데려오는 방법뿐이었다. 둘 가운데 한 명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으면 좋으련만, 고열은 초기에 잡아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 더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 않았고 쓰나미로 불어난 물도 다 빠지지 않았다. 날이 밝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의사고 간호사고 데려오는 데 힘들게 뻔했다. 마루는 아재칼과 글록 41로 무장한 채, 모터보트를 타고 항구도시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
======
일본에서 2달 넘게 일을 했지만, 일본의 지리 같은 것은 잘 모르는 마루였다.
한국인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일본의 도시에 대해서 안다고 해도 대도시나 관광으로 유명한 곳이나 알았다. 마루도 마찬가지였다. 중학교 시절까지 가족들이 자주 일본 여행을 다녔다고 해도 보통 한국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를 것 없었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 일본은 섬나라니까 여차하면 바닷물에 잠길 것이다. 왜? 섬나라니까. 그러니까 어째서? 섬이잖아. 해발 고도가 낮지 않을까? 그냥 평지가 많은 거 아니야? 그렇지 않았다. 일본도 도쿄 인근의 관동평야지대를 제외하면 한국 못지않게 산지가 많은 나라였다.
일본에 있는 항구 도시들도 부산이나 통영과 비슷한 지형이 많았다. 산과 산 사이의 평지, 항구를 끼고 언덕이 두른 지형. 이런 형태의 지형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렇다는 건 쓰나미가 덮쳤을 때, 빨리 대피하기만 한다면 근처에 있는 높은 곳으로 피신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실제로 쓰나미가 닥쳤을 때, 정말 그렇게 피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이 마루의 눈앞에 있었다.
부우우웅-
“······.”
속도를 줄여 커다란 부유물을 피해 보트를 조종하는 마루였다. 이곳이 항구도시였다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
모든 것이 쓸려나갔다. 그나마 남아있는 건물은 커다란 철근 콘크리트 건물들 몇 채. 3~4층 높이까지 쓰나미가 밀려들어 간 흔적이 역력했다. 깨진 창문 밑으로 줄줄 흐르는 흙탕물. 보트가 옆을 지나감에도 누군가 도와달라는 소리 하나 없었다.
끼기기긱-
물속에서 무언가 뒤틀리는 소리가 물 밖까지 삐져나왔다. 출렁이며 무너지는 건물. 연달아 몰아쳤던 쓰나미를 버텼는가 했지만, 결국 무너졌다. 흙탕물 구덩이로 변한 주택가 남은 것은 지붕 일부, 패널 일부가 부유하고 있었다.
툭- 툭- 보트를 건드리고 떠내려가는 무엇들. 마루는 그저 고개를 돌렸다.
쓰나미로 밀려버린 도시는 흙빛 바닷물을 떠도는 잔해가 됐다.
마루는 쓰나미로 도시가 완파됐으니, 사람들 정신이 쏙 빠졌을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날이 밝기 전이라면 병원에서 의사나 간호사 한둘 정도는 쉽게 빼낼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젠장.”
병원 바로 앞까지 쓰나미가 밀려온 흔적이 있었다. 병원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었고, 병원 뒤로는 동산이 이어져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병원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생존자들이 병원에 바글바글했다.
응급구조대원들과 사람들이 다친 사람들을 후송해 병원으로 오고 있었고, 삼삼오오 병원 주차장에 텐트를 치고 버티는 사람들도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치안이 무너졌다고 하더니 자연재해 앞에서는 뭉치는 게 인간이란 건가?
마루는 조용히 병원 입구로 향했다. 병원 입구에서는 관계자들이 사람들을 막고 있었다.
“현재 당 병원은 코로나 지정병원이기 때문에 일반 환자분들은 다른 병원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쓰나미로 다 쓸려갔는데 어디로 가라고!”
“우리 병원의 모든 병실은 코로나 응급환자를 받도록 규정되어있습니다.”
“중증 코로나 환자들이 입원하고 있는 병원입니다. 일반 환자분들은 입원하실 수 없습니다.”
“코로나와 관련된 의사 선생님들 외엔 현재 대부분 휴업 중이셔서 다른 진료과에는 의사 선생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급작스러운 상황. 비상사태에 책임을 질 수 없었는지, 매뉴얼 대로 대응하는 병원 관계자였다.
“웃기지 마!”
“때려죽여 버린다! 의사 어딨어?”
“당장 의사 불러와! 불러오라고!”
“당 병원은 정부 정책에 따라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정부가 없어진 게 언제인데!”
“다리가 부러진 환자가 있는데도 못 받겠다는 거야!”
병원 정문과 응급실은 개판이었다. 병원 관계자 말이 사실이라면, 현재 외과 전문의가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해도 간호사는 있겠지. 꿩 대신 닭이라고 필요한 약품과 간호사를 찾아야겠다.
병원의 정면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슬쩍 뒤로 돌아가니, 간호사 기숙사와 부속 건물들이 있었다. 작은 테니스장과 골프연습장. 반코트 농구대를 비롯한 운동시설. 뒷동산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와 평상이 있는 모습이었다.
어둑했던 하늘이 조금 밝아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했다. 간호사 3교대 시간이 대충 아침밥 먹기 전이었던가? 한국에서는 오전 7시 전후, 오후 3시 전후, 밤 11시 전후였는데 일본도 그럴까? 병원마다 달라서 일본은 어떨지 종잡을 수 없었다.
초조한 심정을 숨기고 간호사 기숙사 뒤쪽에 있는 산책로 인근에 몸을 반쯤 숨기고 ‘나오기만 해라.’ 하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도중. 정말 누군가 나왔다. 한 사람이면 좋겠지만, 무려 다섯이나 나왔다.
우르르 몰려나온 간호사들. 시계를 보니 6시였다. 병원에서 기숙사로 향하는 모습. 다섯이면 너무 많았다. 인내심을 갖고 조금 더 기다리자 스물에 가까운 인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다섯도 많은데 스물?
진짜 기숙사로 쳐들어가야 하나? 마루가 어째야 하나 하고 있을 무렵. 혼자 멀찍이 나오는 간호사가 눈에 들어왔다. 스물이나 되는 간호사들이 전부 기숙사에 들어간 뒤에야 느릿느릿 병원에서 나오는 간호사.
이쁘장하게 생긴 얼굴은 피로에 찌들어있었고, 푸석푸석한 머리는 마치 누군가 쥐고 흔들던 흔적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상태가 좀 그래 보였지만 당장 더 좋은 대안은 없어 보였다.
“이봐요.”
마루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힉- 하는 표정으로 제자리에서 주저앉는 간호사.
뭐래 왜 이렇게 오버? 마루는 그냥 직진했다.
“응급환자가 있습니다. 구급약과 항생제로 응급처치했지만, 환자는 고열로 이동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여기 병원에서는 환자를 받지 않는다고 하니, 같이 가셨으면 합니다.”
히익-하던 여자가 마루가 쏟아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에? 저··· 전, 의사가 아닌걸요.”
“간호사면 의학 지식도 있고 실습도 하지 않았습니까. 일단 같이 가서 환자를 봐주십시오. 그리고 외과 의사들 어디 있는지 압니까? 실력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봉합 부위가 터졌고 파편이 박힌 환자가 있어서···.”
“에에? 자. 잠시만요. 전 지금···.”
바닥에 앉은 간호사가 뭔가 눈치를 보면서 머뭇거렸다.
‘그냥 말로는 힘들겠군.’ 마루는 허리춤에 맨 글록 41을 살짝 보였다.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간호사였다. 그렇게 탈색이 됐으면서도 계속 뭔가 눈치를 보고 불안해하는 것이 이상했다. 총을 보고 무서워하면서도 그것보다 더 불안해하는 뭔가가 있다니.
“어이 이봐. 그 여잔 우리랑 선약이 있다고.”
“비켜. 눈 깔고.”
“예약 순서를 지켜야지.”
본관 구석 모퉁이에서 남자 3명이 삐죽 튀어나오면서 을렀다.
탁!
발을 박차는 소리와 함께, 선약 어쩌고 하던 놈의 턱이 마루의 오른손 훅에 맞아 왼쪽으로 비틀어졌다. 나머지 둘이 어? 하는 찰라 마루의 팔꿈치가 한 놈의 턱을 올려 쳤다.
콰직- 턱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 허리를 비틀며 돌린 백스핀 블로우에 마지막 놈이 처맞고 탱탱볼 튕기듯 벽에 튕겼다가 앞으로 쓰러졌다.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
에?
에에?
커다래진 눈. 간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는 무슨 씨발.
“이제 선약이고 뭐고 하는 사람들 없죠? 갑시다.”
버벅거리는 간호사를 끌고 보트로 향하는 마루였다. 간호사는 순순히 끌려왔다.
“그래서. 외과 의사 가운데 괜찮은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몰라요?”
“에··· 또··· 그러니까.”
그렇지 않아도 급해 죽겠는데 간호사의 말투가 사람 숨넘어가게 하고 있었다. 뭔가 좀 이상한 간호사 데려가는 건 아니겠지? 고분고분 따라와서 좋기는 한데, 일단 데려다 놓고 이상하면 다시 하나 잡아 와야겠다.
우우웅- 모터 소리가 파도를 갈랐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짙은 남색에서 푸른색으로 변하는 하늘.
모터보트가 향하는 곳에 보이는 럭셔리 카타마란. 간호사는 보트가 가는 방향에 있는 고급 요트를 보곤 오-하는 표정으로 변했다가 안색이 파랗게 바뀌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하얗고 고급스러움이 넘치던 카타마란은 가까이 갈수록 처참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갑판 한쪽에서 흘러내리는 핏방울. 여기저기 뚫린 구멍은 ‘나는 총알구멍이오.’ 이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바들바들 떠는 간호사를 끌고 기순과 김 양 앞으로 갔다. 그래도 간호사긴 간호산지 환자가 눈앞에 보이자, 제법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간호사는 응급함에서 혈압계와 체온계를 꺼내 체온과 혈압을 쟀다. 핀 라이트로 기순과 김 양의 동공 반응을 보고, 마루가 대충 꽂아 놓은 수액과 옆에 있던 항생제, 해열제를 살펴보더니, 기순과 김 양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간호사였다.
“에···.”
에? 그러니까? 어떻다고?
“에··· 또···.”
에-또? 그래서? 심각한가?
“에···”
“아니. 진짜 답답하네. 말을 해요. 좀.”
히익-
======
======
뭔가 좀 이상한 간호사를 잡아 왔구나, 마루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당장 뭐가 필요한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에 어르고 달래서 기순과 김 양의 상태를 확인했다. 실력은 있었는지 제법 꼼꼼하게 뭔가를 하는 간호사였다.
그렇게 당장 응급조치는 잘 됐다고 했다. 다만 기순의 경우 팔에 박힌 파편을 제거하는 건 큰 수술이라서 손을 댈 수 없고, 수술 도구도 약도 없어서 어쩔 도리가 없다고 했다.
에···라고 운을 떼려는 간호사를 찌릿 노려보자, 생략됐다.
“큰 파편 하나인 줄 알았는데, 작은 것도 여럿 있어서 큰 병원에서 수술해야 할 것 같아요.”
‘잘못 건드리면 신경이랑 동맥도 위험하고요.’ 말을 줄이는 간호사였다.
“수술하면 정상적으로 회복할 수 있다고 보입니까?”
데굴 눈을 굴린 간호사가. ‘모르겠어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는 건 상태가 심각하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김 양의 상태도 좋은 건 아니었다.
빨리 수술해도 예후를 장담하기 어려운데, 규슈는 화산에 쓰나미가 겹쳤고, 시코쿠는 쓰나미에 직격, 도쿄는 거리가 있어 어쩔지 모르겠지만, 대지진 터진 뒤 연락이 끊긴 지역이라 상황은 뻔했다. 일본 어디를 가도 병원이 미어터졌을 게 분명했다. 아니, 애초에 병원이 몇이나 남았을까?
하-
마루는 로열 마리나에서 싸우다 상처 입었던 곳을 어루만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처. 매끄러운 피부가 만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