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760)
러스트 [RUST]-760
침묵을 지키고 있던 기순이 고개를 돌려 PD를 바라봤다. 광기가 깃든 눈동자가 자료를 읽고 있었다.
“···지운다니요?”
“말 그대로입니다. 지도에서. 세계에서 지워야 합니다.”
후드의 반쪽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어째서죠? 자료를 보면 인프라도 준수하게 남아있고, 못해도 3~4천만 명이 살아있는데 그걸 전부 지워버리자는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영국의 런던, 프랑스 파리를 지웠던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이유가 아니죠. 무엇보다 런던과 프랑스 같은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런던과 파리에는 위험한 변이체가 도시를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지웠던 것이고. 한국은 그런 것도 아닌데 나라 전체를 지우자고요?”
후드의 반론에도 PD는 강경했다.
“네 무조건 최대한 빨리 지워야 합니다.”
“그래요? 다시 묻죠.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PD가 뜬금없이 숫자를 말했다.
“100만입니다.”
“100만?”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의 PD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2~3개월 뒤 출산하는 신생아 숫자가 최소한 100만입니다. 그 뒤로도 가임기 여성은 계속 임신할 테고, 말 그대로 100만 이상의 신생아가 매년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걸 먹은 식인귀들이 어떻게 변할까요?”
“아직 확정된 게 아니잖나요? 국왕 폐하와 원정대가 있으니, 식인귀들을 모조리 정리하면 될 일 아닌가요?”
“식인귀를 정리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서 지워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PD의 단언에 실눈을 질끈 감은 기순이 탄식처럼 내뱉었다.
“지정학적 위치와 세력 때문이군요.”
“그렇습니다.”
중국, 북한, 러시아, 일본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 7개로 쪼개진 중국도 그렇지만, 북한, 러시아, 일본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장 멸망한 일본만 해도 안전하다고 할 수 없었다. 싱크홀 속에 있는 그 이상한 괴물들이 일본에만 있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그 괴물에 감염된 생존자가 난민으로 한국에 들어간다면? 3~4천만의 인구를 먹은 괴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은?
이건 중앙당의 통제력을 상실한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지역별로 반쯤 군벌화 된 상황이었고, 상류층이 전부 식인귀가 된 북한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언제든 전쟁이 터질 수 있었다.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쟁이 터진다면, 3~4천만의 인구는 그저 뷔페가 될 뿐.
“7개의 중국이 내전을 벌이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것이지요. 마음껏 먹을 수 있고 강해질 기회니까요. 그렇기에 한국에서 생산하는 100만의 신생아들을 경쟁적으로 확보하려고 할 겁니다.”
성인 한 명을 온전히 먹기란 힘들지만, 신생아라면 충분히 해볼 만했으니까.
7개의 중국은 임신공장을 돌리지 않겠냐고?
당연히 돌리긴 할 거다.
다만 한국처럼 체계적으로 관리하지는 못할 터.
적이 임신공장을 돌린다는 정보가 새면, 그곳을 공격하지 않을까?
공격하지 않으면 적이 신생아 먹고 강해질 텐데?
당연히 공격 목표가 됐을 것이다. 그럼 적의 공격을 피하겠다고 임산부를 여기저기 흩어 놓으면 관리가 될까? 어렵겠지.
그러니 중국에서 임신공장을 돌리려고 해도, 한국처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는 쉽지 않았다. 지금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7개의 중국이 치열하게 싸우면 싸울수록, 7개의 중국은 한국의 신생아를 노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서부지역에 중국 난민들이 들어 올 수 있었고, 근방에 살인사건 실종사건이 넘치는 이유일 겁니다.”
기순이 말을 이어받았다.
“중국 난민이 수천도 아니고 수십 수백만 단위로 한국에 넘어올 수 있었다는 건. 군벌이 이동을 허락했다는 뜻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최소한 남부 군벌과 동부 군벌은 그랬다고 봐야 했다.
“한국의 서부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을 보면 단순 살인사건이나 실종사건인 것처럼 덮고 있지만, 중국 군벌의 식인귀가 난민 속에 섞여들어 왔다고 보입니다.”
변이 바이러스 사태와 미‧중 전쟁 직후, 7개의 중국으로 분열됐으면서도 대만을 먹은 중국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오키나와까지 세력을 펼친 중국이 한국을 노리지 않을 리 없었다.
“7개로 분열됐어도 중국은 중국입니다. 그 중국 가운데 하나가 한국을 점령했다고 가정해도,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를 지웠을 때보다 위험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이 가진 인프라와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 100만 단위의 임산부를 유지, 통제할 수 있는 한국의 시스템을 장악한 중국이 위험하지 않다고?
PD는 다른 건 몰라도 중국 리스크 만으로도 한국을 지워야 할 충분한 명분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확언에 후드가 반쪽 가면에 손을 대곤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무슨 소린지 알겠어요. 전 기권입니다. 이 문제는 국왕 폐하가 결정하셔야 할 문제로 보이네요. 지금 회의 내용 그대로 국왕 폐하에게 보내려고 합니다. 상관없으시죠?”
PD와 기순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 부장님도 동의하시는 거죠?”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나주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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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에서 보낸 회의 영상은 고기 회식으로 넉넉해진 김 양의 기분을 뒤집어엎었다.
‘아- 진짜 다들 잘 먹고 뭐하는 짓? 뭔 생각으로 이따위 회의록을 보내는 거야. 기분 더럽게. 지우네 마네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결판을 내서 보내든가.’
늘어진 고양이처럼 식빵을 굽던 김 양이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안 봤는데 PD.’
미국 남부도 그렇고 문제 될 지역을 싹 지우자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구원이 어쩌고 하면서 뭔가 인류의 수호자, 구원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듯하더니.
태평양 건너 한국에서 일 복잡하게 터질 것 같으니까 깔끔하게 지워버리자고?
김 양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살짝 올라갔다.
하긴 대서양 건너 런던과 파리도 수소폭탄으로 지웠으니, 그런 이야기가 나옴직도 했다.
중국, 일본, 러시아 또는 북한이 한국을 먹었을 때 생기는 불확실성과 위험도를 따져보면 아무도 먹지 못하게 지워버리는 게 제일 효과적인 방안이기도 한 건 사실이었다.
국제 관계가 복잡하니 어쩌니 그래도 항상 결론은 마찬가지. 도덕이고 양심이고 나발이고 자기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한국 따위야 어떻게 되건 신경 안 쓰는 법이니까.
변이 바이러스 터진 뒤 주둥아리로는 국제 어쩌고 인류가 저쩌고 했지만, 다들 자기들 살아남기 급급해서 병신 플레이 넘쳤던 걸 생각해 보면 더 그랬다.
‘흐응-’
김 양은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짜증 나는 건, 고기 잘 먹었는데 소화되지 않게 이딴 이야기를 결론도 내지 않고 생으로 보냈어야만 했느냐는 것.
백정도 회의 영상을 봤을 테니 곧 부르겠네.
‘아- 씨- 자고 싶은데.’
김 양의 예상대로 보조 인공지능이 볼륨을 높였다.
[삐- 국왕 폐하께서 영상회의를 개최하셨습니다. 즉시 참석하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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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적 위치와 향후 벌어질 상황을 고려했을 때, 한국을 지우는 것이 안전하다는 논의가 담긴 회의록 영상을 본 마루는 바로 기순에게 연락했다.
우선 기순과 김 양, 나주연을 불러 이야기를 듣기로 한 마루였다.
[PD 아재의 생각이 신성 왕국 시민 다수의 생각이라고 보면 된다.]신성 왕국의 지도부는 모두 8명. 마루, 기순, 김 양, 나주연 이렇게 넷이 한국계였고, PD, 후드, 간호사, 사이코메트리 에리카. 이렇게 넷이 비한국계였다.
신성 왕국의 국민 대부분은 미국과 캐나다 사람. 그것도 백인 계열이 압도적인 다수였고 영국과 프랑스 계열 사람들의 비중이 높았다.
[그래서 이번 문제는 숨길 수도 없고 숨기기도 곤란한 상황이다.]영국의 런던과 프랑스의 파리를 미래의 위협 때문에 날려버려 놓고는 한국은 그냥 둔다? 그런 정보가 떠돌면 어떻게 될까?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는 변이 괴물 때문이라며 수소폭탄으로 지워버리더니. 서울은 지우지 않는 이유가 뭐냐?’
‘국왕이 한국계라서 그러는 것 아니냐?’
‘남부 연맹도 수소폭탄으로 선제공격했으면서 한국은 그냥 두는 이유가 뭐냐?’
점조직으로 전환한 버지니아 잔당들이 그런 소문을 퍼뜨린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었다.
이번 원정을 통해 한국에서 200~300만을 이주시켜, 정치적 안정과 균형을 잡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날아갈 판이 됐다.
[어떤 선택을 하든, 적대 세력들이 캐나다 지역부터 흔들 거라고 가정하고 판단하는 게 좋아.]실눈이 더욱 가늘어진 기순이 담담하게 말했다.
세상 간단히 처리하겠다고 서울에 수소폭탄을 날린다?
수소폭탄을 쓴다고 벙커 안에 숨어있는 식인귀를 잡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애꿎은 일반 시민들만 죽을 뿐.
그래서 한 형사의 추적 능력을 이용해 식인귀만 잡아 죽이려고 한 건데 한 형사가 거부하고 있었다.
핵폭탄을 쓰지 않고 일단 경과를 지켜보는 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영국과 프랑스계 국민이 들고일어나겠지.
런던과 파리는 이미 변이 괴물에게 먹혀 버린 도시였기에 수소폭탄을 떨궜지만, 한국의 서울은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경과를 지켜보는 중이라고 해도 들고일어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런던과 파리를 날려버린 신성 왕국 지휘부가 한국계 동양인이라서 그런다고 하겠지.
[출신 성분이나 인종 논란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커.]논란을 피해 서울에 핵을 떨군다고 해도 마찬가지. 좋은 꼴을 보긴 힘들었다.
‘멀쩡한 시민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던 도시에 핵을 날린 블라디마루 칼린 국왕.’
‘신성 왕국 지도부는 과연 신성한가?’
‘알고 보니 임산부들이 많았다던데 그걸 무시하고 핵을 쓴 냉혈한 국왕.’
그렇지 않아도 조금씩 벌어지는 균열 때문에 생각이 복잡한데, 시궁창에 빠지게 될 터.
[보도 제한과 정보 통제, 감시 시스템을 강화하면 점조직으로 변한 버지니아 잔당의 짓거리를 막을 수 있겠지만. 그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캐나다는 인프라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인프라를 고치면서 감시 시스템을 강화하면, 통제 감시 사회라고 하겠지. 그 틈을 찌르고 들어올 거다.]신성 왕국을 흔들고자 하는 세력이 전부 달려들어 물어뜯기를,
‘신성 왕국이야말로 빅 브라더(Big Brother)가 통제하는 국가다.’
‘인류를 노예화하려는 국가다.’라고 하겠지.
[그냥 캐나다 버려버리면 안 됨? 자원이야 나중에 기술 업그레이드해서 로봇이나 안드로이드 만들어서 캐오라고 하고. 구구절절 짜증 나게 하는 것들 알아서 잘 살라고 그냥 버리면 되지 않음?] [지난 1년간 깔아 놓은 인프라는 어떡하고? 캐나다에서 손을 떼는 순간, 버지니아 잔당도 그렇고. 남부 연맹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식인귀와 흡혈귀도 얼씨구나 감사합니다. 하고 먹어 버릴 텐데?]그렇다고 이미 설치한 인프라를 전부 철거하고 뜯어 버리면 300만이 넘는 사람을 전부 죽이겠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죽건 말건 무슨 상관?] [상관있지. 300만 넘는 시체를 변이 괴수들이 먹고 무슨 일이 터질 줄 알고. 제국 도운 이유가 뭐였냐? 백만, 천만 단위 사상자가 발생했을 때 감당이 안 돼서 도운 것 잊었어?]기순의 대답에 영상 속 김 양이 고개를 팩 돌렸다.
“회의는 여기까지 하지.”
마루의 시선이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나주연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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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식은 한 형사의 고민을 이해할 것도 같기도 했고 답답하기도 했다.
정부, 국회, 계엄 사령부를 장악하고 있는 자들을 추적해 그들을 죽이는 걸 돕는 것도 그랬지만, 그 결과가 현재 시스템의 붕괴라니.
“한 형사님. 돕지 않는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 놈들이 보여준 영상이 진짜인 것 같아?”
“영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지만, 정부가 하는 행동이 이상한 건 사실이니까요.”
“······.”
수출입 루트가 막힌 상황에서 비축해 놓은 원자재를 여자들 좋아하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소모하고, 임신만 하면 퍼주는 정책을 지속하고 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보조 인공지능의 목소리가 끼어들면서 끊겼다.
[현재, 신성 왕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내용을 확인해 보시고, 협력 여부를 내일 오전 8시까지 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영상 속에는 식인귀들의 신생아를 먹고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을 지워버려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미친 새끼들이.”
“한 형사님.”
그들은 곧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특이한 괴물들이 점령한 런던과 파리를 수소폭탄으로 지워버린 영상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
“······.”
영상 속 신성 왕국은 정말 지웠다.
유서 깊은 도시 영국의 런던과 프랑스의 파리를.
CG로 장난질하는 거라고?
그게 정말 CG일까?
CG고 아니고를 떠나서 신성 왕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내용은 충분한 개연성이 있었다.
한국 정부, 국회, 계엄 사령부가 신생아를 수출하려고 한다면?
변이 괴수, 변이 식인귀의 먹이를 만들지 못하게 한국을 지워버리겠다는 소리를 무시할 수 있을까? 무시해야 할까? 무시한다면 어떻게 될까.
한 형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영상이 진실이라면···.
식인귀를 수색하고 추적하는 걸 돕지 않거나, 식인귀 토벌에 실패했을 때. 한국은 지도에서 지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