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78)
러스트 [RUST]-78
신호탄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뭔가?
환영의 신호탄인지 도망치라는 신호탄인지 모를 일이었다. 해적들도 신호탄을 쏴서 배를 멈추게 한다고 들었다. 물론 구조해 달라는 신호일 가능성도 있었다. 다만 그게 정말 구조해달라는 신호탄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무시했다.
마루가 탄 카타마란이 멀찍이 떨어져서 지나가자, 저쪽에서 마구 흰 천을 흔들던 사람이 이쪽을 보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돌려 뭐라고 외치는 걸 보니, 혼자가 아닌 듯했다. 역시 신호탄은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잠시 뒤, 세상 조용했던 조종실에 무전이 들어왔다. 규슈 남부에서부터 먹통이던 무전이 갑자기 들어올 리 없었다. 근거리 무전이었다.
[치지직- 구···]구?
9를 말하는 건가?
딸깍- 마루는 가볍게 무전기를 껐다. 무슨 소린지 듣지 못했기 때문에, 양심에 타격은 하나도 없었다.
무엇보다 뻔히 보였다. 대형 크루즈에 럭셔리 메가 요트에, 중대형 요트 여러 척이 얽혀있는데 달랑 한 사람이 나와서 신호탄 쏘고 흰색 천을 흔든다? 대형 크루즈만 하더라도 최소 몇천 단위 승객이 있었을 텐데?
‘장난하냐?’
생존자가 달랑 하나? 웃기지도 않았다. 한 명인 줄 알고 가까이 갔다가 무장한 놈들이 우르르 달려들면? 또 칼춤 춰야 하나? 그나마 자기니까 칼춤 추지 일반인들이었다면 그냥 끝났을 게 뻔했다.
느낌도 좋지 않았고.
마루는 속도를 조절해 부유물들을 툭-밀어내고 피하면서 이동했다.
도쿄 인근으로 갈수록 표류하는 배들이 많아졌다. 유조선, 벌크선, 컨테이너선 할 것 없이 배들이 표류하고 있었다. 엔진에 문제가 생긴 배들이 저렇게 많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펑!
대형 컨테이너선에서 신호탄이 떠올랐다. 화답이라도 하듯 유조선에서도 신호탄이 올라왔다.
이해할 수 없었다. 육지까지 거리는 20km 안쪽 아주 멀어도 25km 내외였다. 다시 말해 구명정으로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 막말로 구명정에 타서 교대로 노를 저어도 갈 수 있는 거리였다. 태평양 한가운데도 아니고, 여기서 신호탄 쏴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대응은 간단했다. 모르니까 무시한다.
‘갈매기들 때문에 그러나?’
하늘을 보니 갈매기는커녕 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갈매기란 갈매기는 아까 그쪽 해역 인근으로 서식처를 옮긴 건지, 이쪽에는 깃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럼 갈매기 문제는 아니라는 건데, 또 뭔가 다른 게 있나? 어째서 구명정이나 구명보트로 가지 않고? 부유물들 때문일까? 알 수 없었다.
카타마란이 움직일수록 인근에서 표류하는 배들 위로 하나둘씩 신호탄이 올라왔다. 마치 환영 인사 같았다.
마루가 탄 배가 하늘을 수놓은 환영 인사를 뒤로 한 채 조금씩 멀어졌다.
신호탄을 축포처럼 쏴 올리는 배들을 뒤로하고 위풍당당하게 갔건만, 속도를 점점 줄일 수밖에 없었다.
부유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집의 잔해나 기름 탱크, 자동차를 비롯해 덩치 큰 부유물들을 계속 헤집고 가는 건 힘들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앞부분에 철판을 두껍게 붙인 것도 아니었고, 계속 밀어내며 가다가 금이라도 가면?
그렇다고 모터보트를 내려서 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카타마란도 힘들게 부유물 밀어내면서 가는 판국이었다. 작은 모터보트로 가려면 요리조리 피해야 가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힘들어 보였다.
피하는 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부유물 자체가 문제였다. 그냥 일반적인 부유물 덩어리들이라면 그나마 시도라도 해보겠지만, 어망이나 어구들, 양식장 그물 같은 것들이 아래에 지뢰처럼 있었다. 모터보트의 스크루에 얽히기라도 하면 끝이었다. 카타마란이 워터젯 방식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대로 가면 답이 없겠는데?”
도쿄만 안쪽은 더 심하지 않을까? 뭔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이렇게 개판인지. 퉁- 툭- 처음에는 화들짝 놀라 선수로 가서 확인하고 난리가 아니었지만, 이제 이런 소리는 그냥 무시하고 밀고 나갔다.
8~9시간 꼬박 뻗어있던 기순과 김 양이 정신을 차리고, 간호사는 본격적으로 할 일을 했다. 김 양의 반쯤 맛이 간 오른쪽 깁스를 풀러 벌어진 상처를 수습했다. 엑스레이가 있어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데, 없으니 가능한 선까지만 수습하고 다시 깁스했다고.
어쨌든 김 양은 이제 쉬엄쉬엄 총 좀 쏠 수 있게 됐으니, 오늘 저녁부터 경계시킬 생각이었다.
“에엣? 환자분 아직 무리하면 안 돼요.”
“음- 그냥 주위를 살펴보다 여차하면 손가락 까딱하면 되는 건데 힘들까요?”
“바닷바람이 차서 안 돼요!”
“일단 저녁때 밥 먹으면서 다시 이야기하죠.”
뭔가 해결할 일이 있으면 먹고 하면 절반은 해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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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양이 살짝 쉰 목소리로 말했다.
“··· 빚졌습니다.”
기순이 썩은 미소를 지었다.
“말로만?”
갈라진 목소리. 김 양은 그런 기순을 지긋하게 봤다. 흐릿한 기억이지만 기순을 쏜 기억이 있었다. 반사적으로 쐈던 기억. 생각은 쏘면 안 된다. 쏘지 않으려고 했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였던 기억이었다. 자기가 쐈음에도 기순은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줬다.
“뭐. 왜? 뭔 일인데 그렇게 쳐다보는데?”
“그냥 봤습니다. 보면 닳습니까?”
어쩐지 퉁명한 소리가 나왔다. 그런 김 양을 보곤 기순이 칼 같이 잘랐다.
“넌 내 스타일 아니야. 그리고 빚졌다면서 말로만? 그거 챙겨뒀다 꼭 갚아라.”
누가 뭐라던? 말하는 본새가 자기는 내 스타일인 줄?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됐지만, 이건 이런 인간이었다. 정떨어지는 새끼. 김 양이 흐릿하게 웃었다.
쏴버릴까? 아? 이미 쐈었지. 김 양은 뭔가 등골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자기 친구 쏜 걸 백정이 알았을까?
설마···는 역시였다.
저녁을 먹고 난 뒤, 현재 상황을 설명하던 마루가 김 양을 보며 말했다.
“김 양 몸은 좀 어때? 시력은 어때? 보는 건 멀쩡하고? 왼손 손가락은 잘 움직이지?”
간호사가 ‘환자라니까욧!’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마루의 눈빛에 어버버 침몰했다.
“어차피 돌아다닐 거 아니니까. 나 잠깐 쉴 동안만 경계 좀 해줘.”
김 양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김 양을 바라보는 마루의 눈빛이 ‘나는 네가 지난날 총질한 것을 알고 있다.’라는 눈빛이었기 때문이었다.
“야. 뭔가 다른 의미로 그러는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너 아니면 설 사람이 없어서 그래. 기순이는 아직도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다 그냥 잠드는데, 경계 서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오늘 새벽에 끌려오듯 합류한 간호사에게 경계 업무를 보라고 하는 것도 우스웠고. 간호사도 종일 무리한 상황이었다. 중간중간 쪽잠을 자는 것을 보니 경계 본다고 하다 잠들면 그것도 문제였다.
“딱 6시간만 자자. 지금이 저녁 7시니까 새벽 1시에 깨워, 더 늦게 깨우면 좋고.”
김 양은 묵묵히 알았다고 대답했다.
자동항법장치를 이용해서 밤새 간다면 새벽쯤에는 도착할 수 있겠지만, 밤에는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바다를 떠다니는 부유물도 위험했고 밤에 뭐가 나올지 모르니 일단 하룻밤 지켜보기로 했다.
“이쪽 창문도 다 막았어요.”
간호사도 아주 피곤한 기색이었다.
빛이 새 나갈 부분을 전부 막은 뒤, 마루는 김 양에게 적외선 탐지기와 섬광탄을 건넸다. 더블 플래쉬뱅 속칭 투플뱅, 시차를 두고 두 번 터지는 섬광폭음탄이었다.
“이건?”
“혹시 뭔가 떼거리로 몰려오면 던져. 갈매기한테는 최루탄이 직방이었는데, 연기 많이 나는 걸 쓰라고 하기도 그렇고. 뭔 동물이든지 눈, 코, 귀 있을 거 아니야. 이거 쓰면 대충 시간은 벌 수 있을 거다.”
최루탄이 먹혔으니 섬광탄도 먹히겠지.
“총은 사람한테만 쏘고, 떼로 몰려드는 동물한테는 어지간하면 쏘지 말고. 몰려들면 아까 준 섬광탄 까고. 나 깨워.”
“알겠어요.”
“오케이. 그럼 수고.”
김 양은 3층 콕핏에서 하늘을 봤다. 저쪽 하늘에는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별을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깜깜한 하늘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이쪽 하늘엔 별빛이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별을 바라본 지 얼마나 됐더라.
문득 새로 한 깁스가 조금 불편했다. 비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깁스. 석고 깁스라서 그런지 전의 깁스보다 묵직한 느낌이었다. 공기가 통하는 구멍이 없어서 좀 근질근질한 느낌도 들고.
오른팔을 살짝 하나둘 움직여 본 김 양이 자리를 잡고 사방을 확인했다. 도쿄 인근이라고 하던데 육지고 바다고 불빛 하나 없었다. 드문드문 큰 배들도 떠 있었지만, 불을 켜지 않아 깜깜한 그림자 같았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김 양은 시계를 봤다. 시곗바늘이 밤 11시를 가리켰다.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갔다. 수액 맞고 하루 푹 자서 그런가?
잔잔한 바다. 흔들리는 카타마란. 바다에 반사된 별빛과 달빛. 여기저기 떠 있는 커다란 배들. 떠다니는 부유물만 아니라면 평화로운 풍경이었으리라.
응?
느긋하게 주변을 살피던 김 양의 눈에 뭔가 들어왔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무엇. 김 양은 적외선 감지기를 썼다. 멀리 보이는 붉은 열화상. 사람이었다. 저격용 스코프로 주변을 살폈다. 고무보트로 노를 저어가는 사람들.
이쪽으로 오는가 싶어 바짝 긴장했다. 고무보트는 느릿하게 움직여 커다란 그림자를 향했다. 김 양은 조심스럽게 저격총에 달린 스코프로 관찰했다.
고무보트에 탄 사람은 7명. 큰 배는 모양으로 보면 크루즈 같았다. 휙-하고 갈고리 같은 걸 크루즈에 던져 걸고 낑낑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 훈련받은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툭- 번쩍
아- 눈-
김 양은 스코프에서 눈을 뗐다.
망을 보는 사람들이 있었는지 크루즈가 분주해졌다.
갑자기 조명탄이 터졌고 붉은색 초록색 비상등이 켜졌다.
순간
바다가 들끓었다.
다다다닥-
뭔가 끓는 물처럼 바다가 튀었다.
어. 어.
자기도 모르게 김 양은 옆에 있는 난간을 꼭 잡았다.
팅- 티딩. 배 밑창을 때리고 튀는 무엇.
저 멀리 고무보트에서 크루즈로 옮겨 타지 못한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살려달라는 소리, 구해달라는 외침이 잦아들기도 전에 출렁이는 파도에 고무보트가 전복됐다.
밤바다로 떨어진 사람은 낚시찌처럼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길게 찢어지는 비명. 비명에 화답이라도 하듯 들끓는 바다.
!
뒤에서 갑자기 느껴지는 감각. 김 양은 바로 저격총을 뒤로 돌렸다.
틱-하는 소리와 함께 총구가 옆으로 치워졌다.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길 뻔했던 김 양이 마루를 보곤 빽 하려다 소근 목소리를 줄였다.
“갑자기 뒤로 오면 어떡해요? 쏘면 어쩌려고? 봤죠? 저기 저쪽 지금 들었죠?”
“아니. 못 봤어. 소리는 지금 들었고.”
마루는 불빛으로 약간 밝아진 크루즈 쪽을 바라봤다.
검은 바다가 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다에 빠진 사람이 내지른 비명은 찰나였다. 몇 번 떠올랐다 가라앉더니, 그대로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멀어서 확실하지 않았지만, 바닷속에 뭔가 지랄이 난 게 분명했다.
툭-
철펑-
작은 소리.
응?
어!
배 뒷부분에서 뭔가 소리가 들렸다. 마루와 김 양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김 양이 저격총을 들자, 마루가 고개를 저었다. 저격총을 내려놓은 김 양이 퉁퉁한 소음기가 달린 발터 P22를 꺼내 들었다. 바다가 지랄 난 이유가 빛 때문인지 소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시선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뒤, 마루는 단검을 꺼내 들고 선미 부분으로 살짝 뛰어내렸다.
툭!
내려서자마자 짙어지는 살기.
낮고 굵직한 공기 소리.
어둠을 뚫고 쏘아지는 작살.
틱!
단검으로 작살의 방향을 비틀었다.
퓨욱!
쏘아진 작살을 튕긴 뒤, 작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단검을 후려 던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의 머리 어름에 때려 박힌 단검. 머리에 박힌 단검의 충격으로 붕 떠올라 깜깜한 바다로 빠지는 그림자. 첨벙 물소리와 함께 바다가 살아있는 것처럼 튀기 시작했다.
바다가 지랄 나자, 타고 온 고무보트로 도망치려던 검은 그림자가 잠시 주저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마루가 단검을 뽑아 던졌다. 척추에 쑥 틀어박힌 단검. 이어서 빳빳한 나무토막처럼 그대로 바다에 빠지는 그림자.
타다다닥
파다다닥
바닷물이 기름 튀기는 소리를 냈다.
씨발 이건 또 뭔데?
지랄이 난 바다도 바다지만 미묘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마루는 선미 구석을 살폈다. 그래 뭔가 찝찝해.
슥- 허리춤에서 사시미를 뽑아 들자,
어둡게 일렁이던 것이 사라지며 아는 얼굴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