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798)
러스트 [RUST]-798
‘그냥 죽자. 죽어 버리자.’하는 간호사를 말리기 위해 김 양은 태어나서 처음 진심으로 위로라는 것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간호사에게 사고가 생기면 개미들과의 연합도 어려워졌기 때문. 본래대로라면 정신교육을 했겠지만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솔직히 좀 안타깝기도 했다.
[괜찮아. 진짜로 괜찮다니까. 나만 알고 있는 거잖음.] [······.] [그리고 내가 오래(?) 같이 다녀봐서 아는데, 왕님은 그런 쪽에 약한 거 같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간호사가 아주 조금 고개를 들었다. ‘그런 쪽?’하는 표정.
[응.]김 양이 뭔가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진짜임. 본인이랑 막 한국에서 탈출하고 그랬을 때도 별일 없었고. 일본에서 요트 타고 다녔을 때도 그랬잖음?]너도 경험해 보지 않았느냐는 말에 간호사가 조금은 기운을 차렸다.
하긴 그랬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자기도 모르게 번식(?)본능이 깨어나기 마련인 법.
손만 뻗으면 김 양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충분히 깊은 관계가 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설마 그분께서 그쪽이셨나?’
간호사의 눈빛이 썩자, 김 양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쪽은 아님. 확실함.] [······.]Don’t go는 아니었다.
그쪽도 아니라면 어째서 주변에 여자들 많은데 스캔들 하나 없지?
간호사가 슬쩍 김 양을 바라봤다.
조금 전 흐릿한 무기질적인 눈빛과는 달리 반짝반짝 안타깝다는 듯한 눈망울이 보였다. 무언가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듯한 감각에 간호사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 저년 때문이었어.’
간호사는 처음 느끼는 분노에 잠시 움츠러들었던 가슴을 폈다. 생각만 해도 무섭고 떨렸지만, 이미 버린 몸(?) 아니던가?
생각해 보면 그랬다. 저년이 지금처럼 그분에게 다가서는 여자들을 협박한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을지도 몰랐고.
조금 전 자신을 겁박하던 장면이 뇌리에서 반복됐다. 어디까지 갔느냐며 묻는 김 양의 모습은 얀데래 그 자체였다.
그래놓고는 모르는 척하고 있다니. 가슴이 넓은 간호사라도 김 양의 행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응징이 필요했다.
‘그 방법밖에 없어.’
제대로 응징하려면 부끄러워도 용기를 내야 했다. 응징하려면 그분과 기정사실을 만들어야 했다. 쌀이 익어서 밥이 된 뒤에도 김 양이 협박할 수 있을까?
간호사의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그런 그녀가 마음을 굳히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엑소슈트 보조 인공지능의 목소리였다.
위이이이잉-
[오염 제거와 건조가 끝났습니다.]언제까지 김 양의 눈치만 보고 살 건가?
똑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면?
그때도 오염 제거와 건조 기능을 반복할 건가?
죽어 버리고 싶었던 심정은 진짜였다.
‘더 떨어질 곳도 없어.’
부끄럽게 달아오른 간호사의 눈빛에 사랑과 정의가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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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군집에는 개미 여왕이 있었고, 그 여왕들은 개미 제국에 속해있었다.
마루와 협정을 맺을 때도 군집 여왕이 개미 제국으로 상황을 보고하고 그에 따른 명령이 내려온 대로 행한 것.
만약 개미 제국에서 싸우라는 명령을 보냈다면 어떻게 됐을까? 개미 여왕은 제국의 명령을 따를 건지, 아니면 마루와 연합해 개미 제국과 싸울 건지 선택해야 했다.
그런 식으로 상황이 꼬이지 않게, 개미 여왕의 대처는 정확했다. 마루가 실로 무시무시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챈 무리 여왕이 신성 왕국과 휴전을 선택했고 이를 윗선에 보고했다.
여왕개미의 자세한 보고를 받은 개미 제국은 신성 왕국. 정확하게는 죽음의 신 마루와 휴전했고 협정을 맺기로 했다.
그렇게 신성 왕국과 그 주변에 있던 여러 개미 무리. 개미 왕국의 개미들은 신성 왕국의 공사 현장에 용역으로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지금에 와서는 신성 왕국에서 일하는 대가로 받는 고기 경단으로 부족한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무리의 숫자를 넉넉히 늘릴 수 있게 됐다.
[▫▫□□□▯▯▯▯···.] [에엣? 그래요? 알겠어요.]개미 여왕과 이야기를 나눈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김 양에게 상황을 알렸다.
[정찰조와 경계조가 계속 실종돼서 이웃 무리와 공동으로 주변 수색을 하려고 했다고 해요.]괴물 거미가 30km 안쪽 과수원 지역에 자리 잡으려 한다는 정보와 신성 왕국이 거미를 토벌하려고 한다고 말한 간호사였다.
근처에 있는 개미 왕국과 무리가 직접 참전하거나 여의치 않다면 개미 용병을 보내달라는 요청에, 개미 여왕은 우선 개미 제국에 사태를 알려야 할 사안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참전이나 전투 용병 파견은 사안이 중요해서 윗선에 먼저 보고해야 한다는데요?] [윗선에 보고? 수색하는 건 보고하지 않고 그냥 했으면서? 수색하다 거미랑 마주치면 윗선에 보고하고 싸울 건가? 웃기는 년들이네.]김 양이 개미 여왕을 흘깃했다.
정찰 개미와 경계 개미를 누가 건드렸을까?
변이 개미를 건드릴 정도로 간덩이가 부은 놈이라면 개미핥기 말고 뭐가 있지?
개미핥기의 공격이었다면 바로 알아챘을 텐데 그런 흔적은 전혀 없었다. 개미핥기 같은 천적이 공격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긴데.
‘알면서도 그러는 건가?’
정찰, 경계 개미가 감쪽같이 사라진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 보자면. 거미가 아니더라도 위험한 상황. 개미들 특유의 페로몬 신호도 뿌리지 못하고 증발했다는 소리였으니까.
개미 왕국을 노리고 있는 적은 그만큼 위험한 놈들이라는 뜻이겠지. 거의 확실히 범인은 거미였다.
[어차피 거미들이랑 싸우게 될 게 뻔한데 간 보는 것도 아니고.]책임 회피라도 하려는 건가?
어차피 개미 왕국이 실질적인 결정권자 아니었어?
[에- 또- 그건 아닌 것 같았어요.]개미 제국과 완전히 분리 독립한 개미 왕국을 만들기는 어려워 보였다. 개미 제국에서 분리 독립을 배신으로 생각해 척살 명령을 내리면 그냥 쓸리는 엔딩일테니.
[됐음. 윗선 결정 들어야 한다는데. 기다려야지 뭐.]일행은 개미굴 초입으로 이동해, 캠프를 설치했다.
[1조는 22시까지 경계한다.] [2조는···.]경계병 개미와 순찰대 개미가 실종됐으니 개미굴 초입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순찰대, 경계병 개미에게 오발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만약 오발했을 경우 즉시 보고하도록.] [옛.]원정대를 성공으로 이끈 경험이 더해져서인지 아니면 짧은 기간이더라도 한국에서 장교 교육을 이수했기 때문인지 김 양의 지휘는 적절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여왕개미와 이야기해야 하니까. 그 부분 미리 확인받도록 해.] [알겠어요.]개미들의 결정이 날 때까지 김 양은 자리를 잡고 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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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이 개미굴 입구에 캠프를 차리자, 몇몇 개미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거대한 기계처럼 움직이는 개미 사회에도 특이한 개체는 있기 마련이었다.
[얘네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야?] [에- 잠시만요.]간호사도 페로몬을 이해하진 못했다. 다만 저번에 만든 페로몬 번역기가 보급됐기에, 그걸 사용하는 간호사였다.
(거미. 어떻게. 습격. 가능?)
[에-또- 잠시만요. 거미가 경계병을 습격한 방법이 궁금하다는데요?]김 양이 귀찮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근처 나무에 은신해 있다가 거미줄을 쏴서 낚았겠지. 아니면 공중에서 낚았거나.](공중. 하늘?)
[응. 거미가 거미줄을 이용해서 비행할 수 있다고 했거든.]패러글라이딩 비슷하게 날 수 있고.
지구 자기장인가? 그걸 이용해서 장거리 비행도 가능하다고 했었어.
그러니까 공중에서 거미줄을 쏴서 확 끌고 날아가 버리면 수색대고 순찰대고 어쩌겠나? 그냥 실종이지.
[지금. 거미. 공격. 방어. 방법.] [지금 거미들이 공격하면 어떻게 방어하느냐는 데요?] [굴로 들어가서 농성하면 되니까 걱정할 거 없다고 해.]우리가 개미굴로 들어가면 거미가 어쩔 건데?
뒈지겠다고 개미굴로 따라 들어올 리 없으니, 제일 좋은 방법은 개미굴에서 농성하는 것이었다.
간호사의 높은 목소리에 귀찮아하던 김 양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그러게.
거미 년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중간에서 전령 개미를 낚아 버리면? 지금 상황이 개미 제국에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 어쩌면 개미 제국에서 보낸 전령 개미가 오다가 실종됐을 수도 있고.
[아. 씨. 전령 개미가 갔다가 오는데 데 보통 얼마나 걸려?](낮 6번 밤 5번)
[5박 6일 정도 걸린 데요.]그럼 오늘이 5박 6일째였다.
[내일까지 전령이 오지 않으면, 우리가 전령 데리고 개미 제국으로 데려가야 하겠어. 여왕개미에게 현재 상황 알려줘. 전령 개미가 가다가 중간에 잘렸을 수도 있다고.]쯧-
김 양이 어둑해지는 숲을 바라봤다.
[그리고. 시야를 확보해야겠어. 근처 정리한다고 해.] [에? 근처를 정리해요? 시야 확보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거미 년들 나무 타고 지랄하지 못하게 근처 숲 밀어 버릴 거라고 전해.] [아. 알겠어요.]김 양은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이쪽부터 저쪽까지 전부 벌목해.] [잡풀은 태워버려.] [이동식 벙커 이쪽에 설치하고. 블랙 드레이크호로 지원 대기.]거의 전쟁 준비를 시작하는 김 양인지라 마루가 확인했다.
[거미들이 그쪽을 공격할 기미가 있어서 그러는 거야?] [확실하지는 않음. 하지만 대비할 필요가 있음.]경계병과 순찰대를 공격한 것도 모자라 만에 하나 전령 개미까지 잡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김 양의 이야기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했다. 이쪽도 꼬리 흔적을 찾았다.]김 양의 대비는 시기적절했다. 꼬리를 따라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개미들을 들쑤실 가능성이 있었다.
‘거미를 이용해 분탕을 치려고 했군.’
개미를 공격했다는 이야기에 마루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까치와 까마귀가 싸우게 했고. 순찰 개미와 경계 개미를 죽여,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적이 있다고 생각하게 했어.’
마루는 HUD(head-up display)에 떠오른 지도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제일 처음 거미가 출몰한 곳은 과수원. 그곳에 표시한 뒤, 과수원으로부터 30km 떨어진 개미 군집을 공격한 거미.
‘30km면 짧은 거리가 아니야. 개미와 까치, 까마귀가 서로 싸우도록 유도했다는 건데.’
목적이 있을 터.
[현재 병력 배치도를 올려.]보조 인공지능이 신성 왕국 병력 배치 상황을 HUD에 올렸다.
[현재 병력 배치 상황입니다.] [드론. 까마귀. 까치. 늑대를 각각 표시해.]지도에 각기 표시가 떠올랐다.
드론과 까마귀 대다수가 몬트리올과 퀘벡 남쪽에 몰려있었다. 늑대 무리는 미시간주(州) 특히 디트로이트 인근을 수색하고 있었으며, 새로 이민 온 까치는 국경 지역 농경지에 집중적으로 분포했다.
국경도 안정적이고 수도 디트로이트도 문제없어 보였다. 몬트리올과 퀘벡이 텅 비었지만, 이쪽은 이미 마루를 비롯해 블랙 드레이크급 비행 선단. 그리고 드론과 까마귀까지 있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토론토와 미시소거가 텅 비었다는 것을.
리치먼드에서 북상하면 버펄로가 나왔고 거기서 온타리오 호수를 건너면 토론토와 미시소거였다. 그곳을 거미들이 점령하면 캐나다 지역을 동‧서로 끊어 버릴 수 있었다.
그쪽으로 생각이 닿자, 찝찝한 느낌이 강해지는 마루였다.
[재생부대를 전부 토론토와 미시소거로 보내.]마루는 그런 느낌을 간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