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800)
러스트 [RUST]-800
[에?]페로몬 통역기를 들고 있던 간호사는 당황했다. 여왕의 거처는 둥지 안쪽 제일 안전한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녀는 페로몬 통역기가 고장 난 것은 아닌지 다시 살폈다. 모든 기계의 이상 작동에 대비하는 방법. 껐다가 다시 켜기를 시도해 봤지만, 같은 내용이 번역됐다.
(구조. 요청. 여왕. 공격. 받음.)
고장이 아니라는 뜻.
[뭐임? 지금 개미 여왕이 공격받고 있다는 거야?] [에- 엣- 네. 구조 요청을 하고 있어요.]깊게 뚫린 개미굴을 바라보는 김 양의 표정이 어쩐지 사나워져 있었다. 퍽- 개미굴 안쪽을 묵직하게 때려보는 그녀. 쿠직- 흙으로 만들어진 벽체가 움푹 들어갔다.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벽이었다면 엄청난 소리와 함께 금이 가고 시멘트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을 텐데, 개미굴은 달랐다.
‘에- 개미들이 침을 발랐죠.’
간호사는 개미들이 집을 지을 때 어떻게 했는지 떠올렸다. 개미들은 흙에 타액을 섞어 공간과 통로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둥지는 탄성이 있어 어지간한 충격에도 거뜬했다.
신성 왕국의 신형 건축자재 가운데 개미의 타액을 흉내 낸 보강제가 있을 정도로 개미들이 만든 둥지는 생각보다 좋았다.
퍽- 퍼퍽-
여기저기 벽과 바닥을 때리고 짓밟은 김 양이 입을 열었다.
[퇴각 준비.] [에? 퇴각이요?] [전원 퇴각 준비. 네이팜으로 화력 집중해서 불바다를 만들도록. 놈들을 밀어내고 퇴각한다.] [개미 여왕은요? 구조 요청은요?]부웅- 퍼극-
김 양의 노심 아머 주먹이 간호사의 엑소슈트 옆을 때렸다. 쿠직- 벽을 파고들었던 주먹이 느릿하게 빠져나왔다.
엑소슈트 전술헬멧을 쓰고 있었더라도 방금 그 주먹에 맞았으면 머리통이 날아가든 목뼈가 부러지든 멀쩡할 리 없었다.
바싹 얼어버린 간호사에게 김 양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개미 년들 벽을 봐. 여기 둥지를 보라고. 단단하지? 이렇게 단단한 둥지에서도 제일 단단한 곳이 여왕개미가 있는 곳 아님? 그런데 갑자기 공격을 받으니까 구조해달라고?]장난하셈?
설령 진짜로 습격당했더라도 개미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여왕개미가 한 마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무리가 전쟁에 참여한다고 결정한 것도 아니었다.
[도. 도와주면. 개미들과···.]어려울 때 도와주는 게 친구 아닌가? 지금 위험에 빠진 개미 여왕을 구해주면 앞으로 우리 편을 들어 줄 텐데. 도움을 요청하는 걸 무시하고 바로 퇴각한다니.
[우리가 빠지면···. 입구는요?] [그걸 왜 우리가 신경 써야 하지? 여기가 집인 놈들이 지켜야지. 자기 집은 자기가 지켜야 하는 게 기본 아님?]애초에 여기에 지키러 온 것도 아니었고, 호위가 목적이었다. 그러다 엮여서 방어 준비를 했고 방어전을 하고 있지만, 이렇게 밀려드는 거미와 여기서 싸울 계획은 없었다. 최고 존엄의 명령도 없었고.
무엇보다.
‘개미 년들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어.’
김 양의 시선이 아래로 뚫린 경사로를 향했다. 중앙으로 밀고 들어오는 거미를 쌈 싸먹기 위해 양측에 비상 통로를 추가로 뚫으라고 한 뒤, 갑자기 구조 요청이 왔다는 것. 그게 우연일까?
까마귀와 체스를 뒀을 때가 떠올랐다. 일반인 그러니까 인간이라면 하지 않을 선택을 까마귀 년들은 아무렇지 않게 선택했다.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종하는 유닛을 소모하는 시점도, 지원하는 방식도 인간과는 다른 판단을 했다.
까마귀가 그런데 개미들이라고 다를까? 그런 개미들이 같은 종족도 아닌, 인간에게 구조 요청을 한다?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인간을 미끼로 자기들만 도망치려고 한다면? 아니면, 지금 구조 요청 자체가 알 수 없는 계획이라면?
김 양은 냉정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안전이었고. 다음은 간호사와 부대원들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판국에 개미굴에 기어들어가서 엮일 이유는 없었다.
냉혹한 김 양의 판단이 간호사는 불편했다.
(도움. 요청. 도움. 요···)
쿠직-
페로몬 번역기를 부숴버린 김 양이 재차 퇴각명령을 내렸다.
[네이팜탄 쏴. 블랙 드레이크호 안전고도에서 지원사격 개시.]개미둥지 주변이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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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순은 덴 브라운 총통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거미들이 신성 왕국을 공격하고 있다?]“단순한 공격이 아닙니다. 아마도 버지니아 랭리 잔당이 엮여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원해달라? 미안하지만 지금 우리 상황도 좋지 못해. 그럴 여력이 없어.]“주요 도시를 공격했던 변이 괴수들은 전부 처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기순의 말에 덴 브라운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지금은 괴수가 문제가 아니라, 시민들 때문이야.]뉴욕 재건을 요청하던 시위대가 폭도로 변한다거나, 보스턴을 새로운 수도로 해야 한다는 파와 반대파가 충돌하더니 약탈 사태가 터진다거나.
식인귀의 위협, 변이 괴수의 공포, 시궁쥐의 압박에서 벗어난 제국은 억눌렸던 모든 것을 풀어버리려는 것처럼 들끓고 있었다.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는 자들이 독재의 위협이 있는 총통 제도를 다시 대통령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경찰과 군대에 여성들의 숫자가 너무 적다며, 여성 비율을 높이자는 주장. 여성이 안전하고 행복한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자들이 독재 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버지니아 잔당의 짓이지.]버지니아 랭리가 작업하는 방식이 그랬다. 당장 중요한 것을 덮고 덜 중요한 것을 강조하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을 키우는 방식.
덴 브라운이 총통제를 선택한 이유는 기존의 정치체계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당장 신성 왕국과의 교역만 봐도 그랬다.
기존 연방정부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유지했다면 신성 왕국과 지금 같은 사이가 됐을까?
연방정부가 가진 부채를 그대로 안고 기존과 같은 달러를 사용하면서, 경제를 활성화 시킬 수 있었을까?
총통제가 연방정부 대통령제보다는 권한이 강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총통제가 독재는 아니었다. 엄연히 삼권 분립에 기초한 체제(體制)이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놈들. 폭력 반대, 차별 반대 시위한다고 기어 나와서 방화, 강도, 약탈하는 놈들은 모조리 모조리 탄광에 넣으라고 했어.]“괜찮겠습니까? 그거 과잉 대응이라고 물어뜯을 텐데요.”
[조금 있으면 혹한이니까 괜찮아. 시위도 잠잠해지겠지. 겨울은 배급의 계절이니까 말이야.]덴 브라운의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남부 연맹이라는 주적이 사라지고, 식인귀의 위협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됐다.
변이 괴수를 몰아내 도시가 안전해지고 치안도 안정적으로 유지되자, 이익집단 사이의 갈등이 커지기 시작했다.
뉴욕을 기반으로 한 자들과 보스턴을 기반으로 한 자들이 새로운 시대의 수도라는 상징적인 가치를 움켜쥐려고 했다.
완전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자들과 수정 자본주의자들, 분배론자들, 사회주의자들은 제국의 경제를 차지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주요 가치관이 무너지고 혼란에 빠진 지금. 사상적,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덴 브라운 총통 체제로 제국이 안정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안정을 찾았기에 오히려 분열이 생기고 있다는 이야기.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갈등이 있어야 해. 하지만 지금 퍼지고 있는 갈등은 너무 인위적이지. 놈들이 바람을 넣고 있는 거야.]버지니아 잔당이.
덴 브라운 총통이 이를 갈았다.
[치안을 유지하고 공장과 창고를 지키기 위해 병력을 총동원한 상황이라서 병력지원은 어렵겠군.]예상대로 버지니아 잔당이라면 혼란을 틈타 더 큰 혼란을 노릴 것이다.
댐이나 발전소를 공격하고 생산시설과 원자재, 생산품, 농산물 창고를 불태울 터. 그렇게 물자가 부족해지면, 도둑과 강도 약탈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치안이 무너지겠지.
치안이 무너지면?
당연히 사회 불안으로 이어졌다.
사회 불안의 끝은?
지역별 무장단체의 결성이었다.
자경단이 조직되고 그렇게 조직된 자경단이 정치세력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지역을 거점으로 삼은 무장정치단체의 등장이었다.
무장단체가 정치권력을 갖는 순간, 무장단체를 없애려 하는 건 내전이 됐다.
규모에 상관없이 내전을 치러야 한다는 건 제국이 분열됐다는 이야기.
간신히 자리를 잡은 제국이 내전으로 무너지게 둘 순 없었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기 전 미리 싹을 잘라야 했다.
덴 브라운 총통의 얼굴엔 짙은 피로감이 가득했다.
[그래서 병력을 뺄 수 없는 상황이네.]그의 설명을 들은 기순은 흩어진 정보를 재규합했다.
제국의 혼란과 거의 동시에 벌어진 사건이 거미의 과수원 공작이었다.
까마귀와 까치의 갈등을 유도한 거미를 조종한 거미 술사.
‘버지니아 놈들이 거미 술사가 잡힐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꽁꽁 감춰진 버지니아 비밀 본사를 찾아내 털어버린 신성 왕국이었고 마루였다.
사이코메트리 에리카가 있다는 건 버지니아 잔당들도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놈들은 거미 술사의 정보가 이쪽에 넘어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정신지배, 정신장악)을 했다고 해도 정보를 지킬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함정이다.’
거미들이 과수원을 작업한 것도. 그래서 거미 술사가 잡힌 것도. 놈들의 계획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제국의 병력이 내부 혼란을 막기 위해 모조리 동원될 정도의 사태를 만들었다는 건. 지원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이겠지.
‘대규모 공격?’
‘아니면 거미를 이용한 혼란을 이용한 내분?’
“지원이 어렵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래. 이해해 줘서 고맙군.]혼란을 극대화하는 게 목적이라면, 그래서 놈들이 원하는 것이 권력을 장악하려는 것이라면. 거미 술사의 뇌에서 뽑은 꼬리는 함정일 거다.
마찬가지로, 지금 제국의 혼란은 주요 인사를 암살할 기회를 노리는 것일 테고. 기순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다.
“단순히 혼란을 노리는 건 아닐 겁니다.”
[알고 있네.]피로에 찌든 덴 브라운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스쳤다.
“당분간 서로 지원할 여력은 없는 것으로 하지요.”
지금부터는 각자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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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순은 김 양의 연락을 받았다.
“후퇴한다고?”
[응.]“개미는? 개미들의 참전은?”
[다른 루트로 개미들과 소통해야 할 듯. 저번에 왕님과 안면 튼 개미 여왕 있잖음. 걔랑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음.]김 양이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쪽 무리를 믿을 수 없다?”
[그렇잖음? 애초에 경비 개미랑 수색 개미가 계속 사라져 근처 무리랑 연합해 수색하기로 했다면서, 그거 범인이 거미 같다고 했더니, 윗선에 보고부터 해야 한다고 하는 건 뭐임? 보고 할 거면 처음부터 했어야지 않음?]“······.”
[우리가 가지 않았어도 대규모 수색하려고 했으면서. 그럴 거면 우리랑 같이 거미 잡으면 되는 거 아님? 굳이 보고하니 어쩌니 시간 끄는 게 이상하지 않음?]속을 알 수 없다는 게 김 양의 주장이었다.
“미치겠네···. 그래서 여왕개미가 구조 요청한 걸 무시하고 후퇴했다고?”
[그럼 뜬금없이 아래로 내려와서 도와달라는 데 아무런 정보도 없이 들어가야 함? 난 그렇게 못 함.]누가 공격했는지 주어도 없고.
어떻게 공격받았는지 제대로 된 정보도 없는데.
뜬금없이 지원 요청받았으니까.
가서 뒈져야 함?
답답하면 지금이라도 직접 기순이가 들어가든가. 김 양은 떳떳했다.
기순은 일단 마루에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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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거기. 아마 함정이다.]기순의 통신에 마루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돌리지도 않았고. 가도 찝찝하기는 한데, 되돌아가려고 하면 어쩐지 찝찝함이 커졌다.
무엇보다 찝찝하기만 했지, 심장이 떨린다거나 두근거리면서 위험을 경고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함정이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뚫고 나올 여지가 있다는 뜻.
[상관없어. 함정이라고 해도 여길 정리하지 않으면 곪을 거다.] [하- 그래 조심해라. 김 양 그쪽으로 보낼까?] [아니. 됐어.]마루의 대답과 동시에 사방에서 쏟아지는 거미줄.
우우우웅-
강력한 노심이 에너지를 뿜는 소리와 함께 동그란 방어막이 거미줄을 막았다.
‘어딜. 거미줄 따윈 소용없다.’라고 생각하던 마루가 당황했다.
?
방어막 위로 쌓이고 쌓이는 거미줄.
마루의 노심 기체를 방어막과 함께 통째로 돌돌 싸기 시작한 거미들이었다.
이게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