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819)
러스트 [RUST]-819
언제 종말이 시작됐는지, 그 시기에 대해서 사람들의 생각은 저마다 달랐다.
누군가는 일본의 재난과 몰락이 시작이라고 했고, 혹자는 변이 바이러스의 창궐이라고 했으며, 또 다른 사람은 미합중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가 끝난 시점부터라고 했다.
화산 폭발과 지진, 쓰나미와 같은 환경 변화로 말미암은 재난. 변이 바이러스 창궐과 같은 판데믹(pandemic).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제 질서의 붕괴와 이에 따른 국제 무역의 붕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였지만, 결과는 하나였다. 세계화(globalization) 세계시장으로 대변되는 세계질서의 붕괴는 경제의 붕괴이며 그게 종말의 시작이라는 것.
[망가진 경제로부터 시작하는 종말론이라는 건데. 솔직히 그건 오버라고 생각했거든.]기순이 탄식했다.
그렇지 않은가?
종말이라는 생사의 명제. 사느냐? 죽느냐? 하는 판국에 경제 찾고, 국제 무역 찾는다니.
하지만 본질을 들여다보면 무서운 이야기. 한국의 식량 자급만 살펴봐도 그랬다. 쌀과 몇몇을 제외하면 자급자족 불가능한 국가.
거의 모든 식료품이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변이 바이러스 사태를 잠재울 정도의 특효약을 오진 그룹 나주연이 만들었고, 비대칭적인 가치를 가진 치료제가 있었기에 그 우위를 이용해 억지로 기존 무역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치료제 레시피가 반쯤 강제로 공개되고 오진 그룹이 울릉도로 이주, 이후에는 미국으로 빠지면서 경제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을 직접 실감하게 된 한국이었다.
그렇게 천오백만에 육박하는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징집한 병사로 둔전을 짓기 시작한 뒤에야 절망적인 식량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국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글로벌 공급망이 파괴되는 순간, 먹고 사는 게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관용적이거나 비유적인 뜻이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로···.
[···그도 그럴 게 근처 마트만 털고 24시간 편의점만 털어도 굶어 죽을 일은 없었으니 착각했던 거지.]그렇기에 국제 유통망이 무너졌다는 뜻이, 사방에서 변이 괴수가 출몰해 농사를 망쳤다는 소리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했다.
그저 곡물 가격을 시작으로 식품 가격이 오르고 유가와 함께 에너지 비용이 올라 생활이 곤란해지는 정도로 생각했을 뿐. 자신들이 굶어 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풍요로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굶어 죽는다는 것은 영화와 소설에서나 있는 이야기였기에.
[캐나다는 보리 먹인 돼지를 기를 정도로 풍족해서 그런지, 그런 쪽을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아.]“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어. 그런데 진짜 굶길 거냐?]“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결정한 대로 되는 거지. 난 충분히 기회를 줬어. 정말 자유와 독립이 목표였다면, 변이 괴수 대책도 그렇고 먹고 사는 문제 전부 대비하고 있겠지.”
기순의 물음에 담담하게 답하는 마루.
“독립할 준비도 없이 독립하겠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탄압하길 바라고 하는 짓이지, 탄압을 명분으로 테러하려고 계획했을 테고. 거기에 끌려갈 필요가 있나?”
마루의 냉정한 분석에 기순도 동의하긴 했지만, 향후 논란거리를 만들지 않을 방법이 있음에도 너무 강경하게 가는 건 아닌지 싶었다.
대표적으로 언론을 통해 아무런 준비 없는 분리 독립 주장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려줄 수 있었다.
자유 캐나다 연맹은 과거 윌랜드 운하 지역을 통째로 인질로 잡았던 테러 세력의 후예라는 정보를 공개하거나.
하지만 마루는 그러지 않았다. 한 달의 유예기간을 뒀을 뿐.
“약속대로 한 달이 지났다. 그런데 결과가 어때? 자유 캐나다 연맹인지 하는 것들이 들쑤시고 다니지 못하게 자정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놈들을 신고하지도 않았지. 이유가 뭘까?”
[우리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소리겠지···. 정말 굶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겠고.]“그래. 바로 그거야. 본질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다.”
신성 왕국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블라디마루 칼린 국왕이라는 동양인을 존재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였고.
[역사적으로 인종적으로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니까.]“그걸 왜 우리가 이해해줘야 하지? 지금은 종말의 시대다. 생존과 안전이 무엇보다 최우선인 시대. 우리가 그들을 살려줬고 안전하게 해줬으면 그들은 우리를 존중해야 해. 그게 기본인 거야. 그걸 몰라서 지금 그 지랄을 한다고 생각하냐?”
인과관계에 무지해서?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하고, 도움을 받았으면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하는 걸 몰라서 그런다고?
“모르긴 뭘 몰라. 욕심 때문이지. 더 많은 걸 얻어내기 위해서 그러는 거고. 자기들이 우위에 있다는 걸 인정받으려고 그 지랄하는 거지.”
신성 왕국이 캐나다를 장악하기 전에는 변이 괴수들이 도시를 떠돌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삶과 죽음의 선택이었고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터.
그런 경험이 전혀 없었다면야 모르겠지만, 그런 경험을 하고도 ‘신성 왕국은 병력과 기술을 내려놓고 평화를 위해 나가라.’, ‘캐나다는 캐나다 사람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돌려달라.’, ‘자유 캐나다 연맹을 인정하라.’ 이딴 소리라니.
“우리가 그들을 배려해야 할 이유가 있나? 놈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이유가 있고? 놈들은 인권이니 도덕이니 그딴 걸 인질로 잡고, 기본적인 도리를 무시하는 새끼들인데? 난 그럴 생각 없다.”
한 달의 유예기간이 지나고 마루는 약속대로 식량, 에너지를 유통을 멈췄다.
자유 캐나다 연맹 지역은 자유로운 자연상태에 돌입했다.
그들이 원했던바. 아무런 간섭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자연상태로.
‧
‧
‧
자유 캐나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신성 왕국이 갑자기 식품과 에너지 유통을 멈춘다는 발표에 당황했다.
자급자족 가능한 캐나다 사람들에게 유통 중단으로 식량 파동이 생긴다는 건 정말 생소한 일이었다. 보리를 먹여서 돼지를 키울 정도로 곡물이 풍부한 나라가 캐나다였기 때문이었다.
신성 왕국이 손을 떼자 캐나다 전 지역이 순식간에 마비됐다. 자유 캐나다 연맹 지도부는 사태 해결을 위해 시민회관에 모였다.
쾅-
“이것 보십시오.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놈들은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생각하는 놈들입니다.”
“놈들이 하는 짓을 똑바로 보셨습니까? 이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저번 달부터 식량 재고를 줄이더니 이걸 노리고 있던 게 분명합니다.”
시민회관을 가득 채운 사람들 사이로 자유 캐나다 연맹 소속 지도부가 분노를 토했다.
그들이 내뿜는 분노에 불이 붙은 사람들도 있었고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곤 얼어붙은 침묵을 선택한 자들도 있었다.
“신성 왕국 똥구멍을 빨던 새끼들이 전부 도망쳤습니다.”
“어디로 갔다던가요?”
“디트로이트 근처로 간다고 하더군요.”
“윈저(Windsor)로군. 윈저만으로는 수용할 수 없을 텐데.”
“채텀(Chatham)에서 런던(London)까지 포함할 겁니다.”
대도시권 인구를 가지고 있는 윈저에서 채텀을 라인을 따라 캐나다 사우스-웨스턴 온타리오에 있는 런던까지 합하면 대략 100~150만에 달하는 인구를 수용할 수 있었다.
250만이 넘는 캐나다 인구 가운데 자유 캐나다에 합류한 인구는 100만 이상. 50만 정도가 침묵으로 관망하고 있었고 100만이 신성 왕국에 적극적으로 합류했다.
자유 캐나다 연맹 지도부는 그토록 많은 숫자가 이탈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자유, 평등, 박애가 짓밟히고 권리장전으로 대표되는 균형이 무시되는 정치 체계가 신성 왕국의 왕정이었다.
신성 왕국은 프랑스의 정신으로 판단해도 아니었고 영국의 전통으로 생각해도 아니었다. 물과 기름 같이 섞이지 않던 두 세력이 한마음으로 손잡을 수 있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블라디마루 칼린이라는 근본 없는 동양인이 왕이랍시고 군림하는 신성 왕국이라는 것. 혈통도 없고 역사도 없으며 유럽의 전통 자체를 무시하는 게 문제였다.
좋게좋게 생각해서 능력이 있으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 그럼 장악한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미래의 계획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변이 괴수를 처리했고 에너지, 식량, 치안 문제를 해결했으면 응당. 제대로 된 정부를 구성하는 게 순리에 맞지 않나?
그런데 신성 왕국은 그러지 않았다.
권력을 캐나다 시민에게 돌려주고 선거를 통한 정부를 구성해야 함에도 총독부를 신설했다. 그렇게 온 총독은 캐나다를 신경 쓰기는커녕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바빴다.
대체 뭐하는 짓이지?
캐나다를 가지고 장난하는 건가?
한다는 소리도 가관이었다. 군대 입대 제한을 철폐하겠다? 그리고 군 복무를 한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준다고? 어이없었다.
여자고 노인이고 장애고 할 거 없이 무조건 군 복무를 하지 않으면 선거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니.
그것도 모자라 거주 이전의 자유도 제한됐다. 이사하고 싶으면 가족 가운데 한 명이라도 군대에 다녀와야 했다.
이 무슨 정신 나간 법이란 말인가? 국가를 군대로 생각했던 시절 제리(독일)도 하지 않을 법한 법안이었다.
그렇게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결정타가 터졌다. 무려 200만이 넘는 동양인들을 캐나다로 데려온 것.
신성 왕국 전체 인구 비중으로 보자면 삼 분의 일이었지만, 캐나다 지역 인구만 놓고 보면 거의 현지인들과 비슷한 규모의 인구였다.
신성 왕국은 중국과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중국이 소수민족을 장악할 때 썼던 방법이 바로 선거를 이용한 통제였다.
소수민족보다 더 많은 한족을 밀어 넣고 선거를 해. 한족이 소수민족 지역의 대표가 되어 그 지역을 장악하는 방식.
국왕이고 총독이고 동양인이더니 하는 짓도 딱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동양인의 습격에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남부 연맹에서 지원이 오기로 했습니다.”
“망하지 않았습니까? 내전 상태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신성 왕국의 참수 작전이 성공하면서 남부 연맹은 말 그대로 혼돈 그 자체가 됐다.
고만고만한 능력인 식인귀들이 상위 개체가 되려고 싸워댔고, 살아남은 흡혈귀나 상위 개체는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지배력이 높은 자에게 반쯤 종속‧지배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비슷한 지배력을 가진 자들은 결코 상대가 더 강한 지배력을 확보하도록 두지 않았다.
심지어 조금이라도 강한 지배력을 가진 개체가 나오기라도 하면, 주변에 있던 세력이 연합해 더 강해지기 전에 토벌(?)하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약한 놈들을 던져, 지배력을 소진하게 하고 강한 개체들이 방어선을 종심 돌파해 지배력을 소진한 개체를 레이드(?) 해버리는 것이었다.
“신인류 사이의 서열 정리일 뿐입니다.”
“그쪽 이야기는 됐습니다. 그래서 자기 앞가림하느라 바쁜 신인류께서 뭘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겁니까?”
“그건 직접 들어 봅시다.”
“나오시지요.”
뚜벅- 뚜벅-
인간이 아닌 이질적인 기운이 시민회관 입구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피식자가 포식자의 기운을 감지하는 본능과 같았다.
이제는 질병으로 불리지 않는 식인병. 식인이란 그저 인간을 먹기만 하면 강해지는 신인류가 됐을 때 생기는 부작용 같은 것일 뿐.
뚜벅- 뚜벅-
“어떻게 도와주느냐고요?”
신인류가 되는 것은 종말의 세상에서 살아남기에 최적화된 변이였다. 안정적으로 식육 가능하다면 신인류로의 변이는 진화였고 계급 혁명이었다.
그러니까 모두가 신인류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 소수의 귀족과 다수의 식량으로 유지되는 사회가 된다는 것.
“여러분이 원하는 바로 그 진화를 드리도록 하지요. 신인류가 되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충분한 지원이 되겠습니까?”
신인류가 되도록 해주겠다. 이제는 새로운 신인류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신인류가 희생돼야 함에도 그렇게 해주겠다는 사내의 말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핏-
귀족의 좌우에서 따라오던 남녀 호위가 한쪽 구석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찍!
찌이익-
한 마리는 단검에 스친 채 도망쳤고 몸이 관통된 한 마리는 울부짖다가 서서히 눈을 감았다.
남자가 쥐 2마리를 잡고 쫓아내는 동안, 여자가 던진 단검이 창문을 깨고 밖으로 날아갔다.
쨍그랑-
퍼드드득!
까악!
까마귀가 화들짝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