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841)
러스트 [RUST]-841
나주연의 단호한 반대에 김 양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맞아. 응.”
기순은 그런 김 양을 보곤 조금 어이가 없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뿌듯한데?’
‘당연히 뿌듯하지. 치료제 억제제 레시피 공개했다가 그 고생을 했는데 또 레시피 준다고 했으면 실망했을 것이야.’
순간적으로 기순의 실눈에 경련이 일어났다.
이거 방금 눈빛으로 이야기한 건가?
자연스럽게 넘어가서 몰랐었는데, 자연스럽게 넘어갈 게 아니었다.
마루와 김 양이 눈빛으로 뭔가를 주고받았던 게 이런 건가?
김 양의 능력은 불렛 타임(bullet time 총알이 느리게 날아가는 시간.) 시간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인식하는 능력 그런 거 아니었어?
어쩐지 당혹스러워진 기순이 ‘실화냐?’는 눈빛을 보내자, 김 양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찢어진 눈으로 뭐라는 거니? 눈구멍을 크게 뜨든 그게 안 되면 말로 하라.”
“······.”
아니- 야?
뭐? 왜? 어쩌라고? 느끼하게 눈 찢지 말고 말로 하라. 말로.
기순과 김 양이 뭔가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릉거리는 동안, PD가 말했다.
“저쪽이 질척거리는군요.”
간단하게 보면 단순한 문제였지만,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전임 캐나다 총독인 기순도 그렇고 신성 왕국 국왕인 마루까지 분명히 제국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음에도 식인귀 판별 레시피를 요구했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신성 왕국 국왕이 실제로는 식인귀와 흡혈귀의 왕이 아닌가?’는 의혹을 언급하면서 식인귀 판별 레시피를 달라고 했으니, 레시피를 넘겨주지 않는다면 흡혈귀 왕 의혹을 써먹을 수 있게 된다.
신성 왕국 왕을 제국 정치판에 양념처럼 써먹는다고 해도 제국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걱정 없다는 저열한 발상에 PD가 속으로 분노했다.
“이런저런 것을 묶어 총통을 압박해 자진사퇴를 노리려고 할지도 모르겠군요.”
당장이야 흡혈귀 왕이니 어쩌니 언론에 까발리지 않겠지만, 여차하는 순간에 신성 왕국 국왕과 총통이 야합했다는 의혹으로 써먹을지 몰랐다.
“그러다 뒈지는 것임. 관여하지 않는다고 했지, 죽이지 않는다고 한 건 아니거든.”
입 싸고 개념 가출한 놈 정리하는 건 자기 전공이라는 듯 살벌한 미소를 짓는 김 양이었다. 무엇보다 증거와 증인이 없는 암살은 암살이 아니었다. 그냥 자연사지.
“뉴욕이었으면 힘들었지만, 보스턴으로 자리 옮겨서 구멍이 숭숭 뚫렸음. 다들 자연사 준비하고 있던 데, 저렴하게 정리할 수 있음.”
사람 죽이는 걸 쓰레기 청소하듯 작업 비용 산출하는 그녀를 보곤 후드의 반쪽 얼굴이 살포시 인상을 썼지만, 김 양은 1도 타격받지 않았다.
어쩌라고?
귀찮게 하는 것들은 빨리빨리 보내버려야 덜 지저분해지는 법.
이 당연한 이치를 왜 모를까?
모름지기 청소란 쓰레기가 쌓이기 전에 해야 품이 덜 들고, 썩기 전에 음식 쓰레기를 버려야 냄새가 나지 않는 법이었다.
“제국에서 정치인이 암살당하면 무조건 우리가 가장 먼저 의심받을 겁니다.”
“의심? 한다고 어쩔 건데? 증거랑 증인만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냥 질척거리는 것들 싹 치워버리면 자기 목숨 생각해서라도 간 보는 새끼들 없어짐. 회사에서도 조직 청소할 때 백벌일계 했었음.”
일벌백계(一罰百戒)가 아니고?
“부하들이 100명 넘게 뒈져야 대가리 하나가 생각을 고쳐먹을까 말까 하는 마당에. 윗자리에 앉은 새끼들도 한둘 뒈져서는 효과가 없지. 그냥 백 단위로 죽어 나가야 한 번 정신 차릴걸. 경험담임.”
김 양은 확신했다. 제국 의회고 군부 장군이건 최소 30%~40% 정도는 털어내야 함부로 신성 왕국을 씹고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못하리라.
“초반에 강경하게 나가야지 엉뚱한 생각을 못 함. 어설프게 식인귀 레시피를 줄 수 없는 이유가 어쩌고저쩌고 구질구질 주절주절 설명하는 것보다. 닥쳐- 싸대기 한 번 갈기고 어디서 대가리를 굴려!- 사커킥 먹이는 게 효과적임.”
김 양의 발언에 기순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무슨 쌩 양아치나 조폭도 아니고···.
외교적 갈등을 암살과 폭력으로 해결하자고 하다니.
그래. 가끔 잊고 있었지만, 김 양은 조직에서 사람 담그던 애였지.
정신이 어질어질한 건 후드도 마찬가지였는지,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묻는 후드.
“제국과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나길 원하는 겁니까?”
“파탄? 이미 파탄 난 거 아님? 그리고 파탄을 낸 건 제국 새끼들이지. 교전 영상 보고도 모르겠음? 제국 새끼들이 왕님을 가상의 적으로 놓고 기동부대 훈련 시킨 티 나는 거?”
“고위급 식인귀와 흡혈귀를 자체적으로 대비하기 위한 훈련이 겹쳤다고 볼 수 있지요. 물론 따져본다면 폐하를 견제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겠지만.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연해?”
“당연하지요. 그만큼 폐하가 강력하시니까요. 아무리 같은 편이라고 하더라도 사실상 비대칭 전력인데, 제국에서 대비하지 않았다면 그건 제국 군부와 정치인들이 무능한 거죠. 그래서 대비했다고 무조건 죽여버리자고요? 그게 정말 정상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럼. 지극히 정상적이고 역사적으로 옳은 방법이지. 까놓고 말해서? 미합중국 애들이 했던 방법이고 영국놈, 중국놈, 일본놈 전부 자기들 힘 있을 땐 실컷 했던 방법인데. 우리는 왜 못함?”
자고로 죽일 수 있을 때 죽이는 게 남는 일이라는 주장을 일관적으로 하는 김 양이었다. PD가 과열되기 시작하는 두 여자의 토론에 끼어들었다.
“제국과의 관계를 끊는다고 했으니, 그쪽이 뭐라고 하건. 무시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신성 왕국을 이용해서 정치‧경제적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자는 일벌백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러. 일벌백계가 아니라 백벌일계. 그것도 최대한 빨리해야 목숨 아까운 줄 알고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말아야겠다고 조심함. 제국 놈들 하는 짓 보면 이때가 기회라고 무기 뽑고 힘을 길러서 어디를 노릴까? 남부 연맹 밀고 멕시코랑 남미로 순순히 내려갈 것 같음? 그 제국의 전신이 미합중국인데?”
응.
김 양은 확신했다.
대체로 조직끼리 싸우다가 잠깐 휴전하면 하는 짓이 뭐였나?
바로 뒷구멍으로 세력 키우고 한 번만 걸려라. 끝을 보자고 그딴 식으로 하기 마련이었다. 그녀가 보기엔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신성 왕국이 손을 뗀다고 했으니, 이것저것 전부 하려고 하겠지. 그러다가 훅 선을 넘기 마련이고.
그렇게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되기 전, 지금 교육(?)하는 게 싸게 먹힌다고 생각하는 김 양이었다.
후드는 그런 김 양의 생각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쉽게 살인으로 해결하려는 그 사고구조를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어려웠다.
툭하면 크고 아름다운 핵을 찾고 기회만 있으면 V에 작은 x가 붙은 가스를 부르짖는 걸 정상이라고 봐야 할까?
문제가 있다고?
그 문제를 핵과 가스로 없애면 문제가 없지 않니?
이딴 식으로 생각하는 김 양이었다. 실제로도 그랬고.
하지만 지금 신성 왕국이 직면한 현실은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핵을 쓰면 반드시 그 반동이 생기기 마련이었고 그건 신경가스도 마찬가지라는 게 밝혀졌기 때문.
옐로우 스톤 화산과 지진대에 충격이 갈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본다면 전략핵을 쓰는 건 위험했다.
작고 귀여운 소형 핵도 방사능과 고에너지 반응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운 건 아닌지라, 변이 괴수에 영향을 준다는 것도 밝혀졌고.
작은 핵이라고 해도 계속 쓰다간 문제가 생긴다는 결과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경가스를 뿌려대는 것도 마찬가지.
바퀴벌레와 벼룩, 이, 빈대 같은 기생충을 비롯해 쥐를 비롯해 세대교체가 빠른 동물들이 내성을 얻고 변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계속 핵과 가스를 쓰자고?
당장 편하자고 중요할 때 써야 할 무기를 날리자?
핵과 가스를 쓰지 않으면 당장 죽을 상황이라면야 써야겠지만, 쓰지 않을 수 있다면 안 쓰는 게 좋은 것 아닌가?
후드는 진심으로 김 양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
“······.”
그리고 그건 김 양도 마찬가지였다.
쓸데없이 전전긍긍할 바에야 핵으로 적의 주력을 날려버리고 내성이 생기기 전에 살아남은 놈들을 싹 밀어버리는 게 효과적이지 않나?
신경가스를 쓰는 것도 그랬다. 사용 방법에 따라 충분히 잘 쓸 수 있지 않나?
예를 들어, 일단 신경가스로 모조리 죽인 다음. 알집이나 새끼 같은 게 남지 않도록 전부 태워버린다거나.
신경가스가 새나가지 않게 건물이고 지하고 밀봉해 버린다거나 하는 방법으로. 내성 생긴다고 벌벌 떨 게 아니라, 쓰자고 하면 쓸 방법을 찾으면 되는 일 아닌가?
‘뉴욕에서 바퀴벌레 잡을 때도 그렇게 썼으면 해결됐을 일이었고. 그때 하수도를 틀어막고 신경가스로 채워버렸으면 쥐새끼도 같이 잡을 수 있었는데··· .그걸 망친 게 그놈의 정치적 상황이었지.’
김 양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환경이 무섭고 내성과 변이가 무섭다고 죽일 방법을 아낀다면 새로운 신무기가 나와도 마찬가지 상황이 반복될 뿐.
총알만 봐도 그랬다. 변이 괴수들은 기존의 총알에 대응하도록 변이를 일으킨 지 오래인지라. 이제 소구경 일반탄으로는 바퀴벌레 껍질도 뚫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조류인 까마귀도 소구형 소총과 권총은 그냥 무시할 정도였고 늑대 정도로 가면 12.7mm 탄 이하로는 사실상 못 잡는다고 봐야 했다.
변이 괴수 부산물로 만든 특수탄도 마찬가지. 변이 짐승을 잡을 때도 초기에는 7.62mm면 충분했던 것이 12.7mm로 넘어오더니 이제는 20mm가 대세가 되고 있었다.
사실상 5.56mm와 6.8mm는 사장된 현실. 그러니까 지금 죽일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죽여야 하고, 빨리 죽여야 한다는 게 김 양의 생각이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황당한 상황인가?
짐승과 벌레 잡는데 12.7mm 쓰고 20mm를 써야 한다니.
곤충이고 동물이고, 식인귀와 흡혈귀 할 것 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잡는 비용이 더 많이 들고, 더 위험해진다는 것.
그건 그냥 보통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의 의원이건 군부 인사건 할 것 없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시간이 지난다고 가정해 보자.
제국 해상도시로 기어들어가서 개소리한다고 치자, 해상도시에 들어간 놈들을 쉽게 잡아 죽일 수 있을까? 당연히 잡아 죽이기 힘들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지금 제국 의원들과 제국 군부 인사를 죽여야 한다는 건가요?”
“시간 끌지 말고 죽여야 함. 그래야 자기들이 왜 죽는지 알아먹지. 다른 놈들도 알아서 사리게 되지.”
후드의 물음에 당당하게 대답하는 김 양.
“제국에서 우리를 경계하는 것은요?”
“말했잖음.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제국은 우리를 점점 더 경계한다니까. 이해 못 하겠음?”
가만히 듣고 있던 마루가 결정을 내렸다.
“개소리하는 제국 의원과 이상한 짓을 하는 군부 인사를 죽인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지?”
“그렇다고 해도 당장 전쟁이 터지거나 바로 관계가 파탄 나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전제로 한다면 말입니다.”
PD의 분석에 김 양이 맹렬하게 동의했다.
“증거만 없으면 됨. 여차하면 식인귀나 흡혈귀가 한 것처럼 조작해도 되고.”
기순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했잖냐?”
“그 뒤에 이어진 말도 있었지.”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다. 단, 돈이 될 때만. (Honesty is the best policy – when there is money in it.)
마루의 대답에 후드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반쪽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엔 결연한 표정이 조각되어있었다.
“제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실 생각이십니까?”
“청산한다기보다, 이제는 각자 따로 가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리고 제국 의회와 군부가 신성 왕국을 쉽게 보는 것도 좋지 않고.”
특이점에 도달한 신성 왕국의 과학 기술이 워낙 대단해서 그렇지, 제국의 기술력도 엄청난 수준인 건 사실.
넉넉한 인구와 제법 괜찮은 군사력을 가진 제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신성 왕국의 기술에 욕심을 부릴 것이다.
때로는 교역을 이용해서, 어쩔 땐 인도적 차원이라는 명분으로. 아니면 지금처럼 의혹을 사용해서라도 찔러보기를 반복하겠지.
“그렇다면 굳이 죽일 필요가 있을까요?”
“죽여야 해. 그래야 신성 왕국을 가지고 정치 놀음을 하려는 놈들이 줄어들어. 최소한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할 테니까.”
마루의 단언에 후드는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왕의 판단은 확고했고 그 결정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죽일 자를 제대로 분류하도록 하는 게 우선이다.”
신성 왕국을 모욕하고 대놓고 이용하려는 자에 한에서지만, 용서 없이 죽인다는 결정을 내린 마루였다.
오-
김 양이 마루를 보곤 방긋 눈웃음쳤다.
‘그래서 데이트는 언제?’
‘······.’
제국 가서 뺑뺑이 돌기 전에 하기로 한 건 해야 하지 않을까?
‘회의 끝나고 콜?’
‘···그래.’
김 양은 오늘 하루 일타쌍피(一打雙皮)한 느낌이었다.
제국에서 이상한 것들 작업하는 것도 통과됐고, 미뤄지고 있던 흐으응-도 잡히고.
응.
좋은 날(Good Day)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