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842)
러스트 [RUST]-842
데이트- 흐으응- 데에이트-
데에이트- 데이트으흐응—
김 양의 콧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후후훗-
몽실몽실하게 웃던 그녀의 미소가 일순간에 서늘해졌다.
간호사 년이 슬쩍 꼬리치기 시작했고.
PD는 은근히 후드를 미는 느낌이었다.
나주연도 착실하게 마이너스 점수를 갚고 있는 중으로 보였고.
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자신과는 달리, 다들 문제가 많은 년들이었다.
그런 년들이 먼저 부뚜막에 오르는 걸 볼 수 없었다.
제일 먼저 올라야 하는 것은 오직 자신이어야 했다.
무엇보다 자신은 성실한 마루의 직장생활을 아는 여자 아니던가?
거기에 서울 탈출 데이트도 했었고.
그래.
그때를 생각하면 이게 첫 데이트는 아니었다.
흐응-
팔이 뚫렸을 때를 생각하면 환상통이 생기기도 했지만.
어쨌든.
김 양은 거울 앞에서 선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날카로운 단발이었던 머리가 조금은 많이 길어진 모습.
흐릿했던 눈동자가 어쩐지 반짝이는 느낌이었다.
내 눈이 이렇게 반짝거렸었나?
양치할 때나 무의식적으로 보던 얼굴이었는데, 이렇게 자세히 보니 나쁘지 않은 듯한 것 같으면서 턱 라인이 좀 흐려졌나?
요즘 짭짤한 걸 많이 먹어서 살짝 얼굴이 부은 건 아니지?
그러고 보면 가슴의 볼륨도 그렇고
순간적으로 간호사의 웅장함이 떠오른 김 양이었다.
휙휙휙-
거울 속에 떠오르는 간호사의 잔상을 없애는 그녀.
‘가슴은···. 그런 걸 달고 다니는 게 이상한 거고.’
간호사를 지우자 이번엔 후드의 곱디고운 손과 반쪽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이 떠올랐다.
검은색 가면에 대비되는 하얀 얼굴.
반쪽이지만 상당히 미형인 백인 여자. 금발.
절반인데도 상당히 끌리는 느낌.
김 양은 휙휙- 머리를 흔들었다.
간호사와 후드의 얼굴이 지워진 곳엔 부스스한 얼굴의 나주연이 떠올랐다. 본판은 나쁘지 않았지만, 판다처럼 다크 서클이 생긴 나주연의 모습.
김 양은 드디어 한숨 놓을 수 있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나주연과는 충분히 협력 가능했다. 다른 건 몰라도 ‘마연시.’로 뭉친 관계.
이번 데이트 기억을 공유한다면 더욱 돈독해 지리라. 그럼 일단 이쪽은 이인 연합이 가능해질 터.
나주연이 약혼녀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지만, 과거를 생각해 보면 쉽게 좋게 일이 풀릴 가능성은 없었으니···.
후후훗-
김 양이 머릿속에서 문답했다.
Q 양. 데이트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무엇입니까?
A 김. 이년들이 작업하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기 시작해서.
Q 양. 남 주기 아까운 떡이라고 생각해서 데이트로 침 발라 놓으려고 한 겁니까?
A 김. 옆자리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님. 쟁취하는 것임.
Q 양. 사랑은 없는 겁니까?
A 김. 같이 일하다 보면 두근거리고 한 번씩 볼 때마다 심장이 조여오고 죽을 것 같으면 그게 사랑 아니겠음?
Q 양. ······.
A 김. 왜? 내 말이 틀림?
Q 양.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A 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음. 변하는 건 싫거든.
삭막한 그녀의 가슴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현찰?
인플레이션 방어 못 하는 휴지쪼가리.
다이아몬드?
멋대로 가격 널뛰기하는 돌덩이.
그래서 결론.
변하지 않는 것은 금.
성실한 골드.
황금 같은 사랑.
반짝반짝 빛나는 사랑을 하려면 뭐가 필요할까?
착한 금괴가 많이 필요하겠지.
금괴처럼 든든한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점.
누구랑 있을 때 든든한 사랑이 생겼지?
답은 명확했다.
김 양이 생각하기엔 그녀가 제일 앞서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뿜뿜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그런 것이야.’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듯, 가장 자기 자신답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모습일 터.
‘근데 가장 나 다운 게 뭐지?’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녀가 어쩐지 허전한 허리춤을 매만지며 총들이 장식된 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잘 손질된 코발트블루 색상의 콜트 파이슨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흐으응-
‧
‧
‧
“데이트 코스는 누가 정하기로 했는데?”
실눈 끄트머리까지 휘어진 기순이 낄낄 웃는 얼굴로 물었다.
“데이트 코스는 무슨. 어차피 아크 타워 안에서 할 건데.”
“야. 그래도 그렇지 데이트하자고 노래를 불렀다면서? 말은 안 했어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을 텐데 여길 한 바퀴 돌고 끝이라니. 이왕 데이트하는 거면 디트로이트라도 돌아야지.”
“됐어. 눈이 이렇게 쌓였는데 어딜 나가. 그리고 김 양이랑 둘이서 도시를 헤집고 다니라고? 그냥 둘이 거리만 걸어도 난리가 날 걸. 그렇지 않아도 가십거리가 없어서 눈이 벌게져 있던데.”
“왕님이랑 친위대 사령관과의 데이트. 디트로이트 거리에서 확인된 두 사람의 속삭임. 얼어붙은 도시를 뜨겁게 달구는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 두두둥- 그렇게?”
“그러니까 말이야. 생각보다 부담스럽네.”
“언론을 제대로 돌리니까 정치 쪽에서 부담이 적어지는 거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신, 그 책임 관계를 명확하게 묻기 시작한 신성 왕국이었다. 그 결과 가짜 뉴스가 사라졌고. 아니면 말고 식의 기사도 사라졌다.
AI가 실시간으로 기사를 검증했고, AI에 걸린 기사는 재확인 절차를 거쳐 판단한다. 만약 거짓된 기사라고 한다면 엄중한 책임을 물었다.
가볍게는 사과문을 올리는 것부터 크게는 관련 기사를 쓴 기자와 편집자를 추방하기까지 했기에 신성 왕국의 언론은 순식간에 정상화됐다.
동시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다루는 전문 기자들의 수준이 올라갔다. 인공지능이 취재를 보조한다고 하더라도 주제를 찾고 논지를 세우는 건 인간이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예전과 달리 축소된 영역이 있다면, 대중문화 -아이돌이라거나 가수. 배우- 쪽이었는데, 할리우드도 끝장났고 가수나 배우, 셀럽들도 대부분 소식이 끊겼다.
연예계 기자는 많은데, 기사의 주제가 됐던 사람들이 없어진 상황. 연예계 기자들은 다른 주제를 찾아야 했다.
누구를 주제로 삼아야지?
고민하던 기자들은 기어코 화제가 될 만한 주제를 찾고야 말았다. 신성 왕국을 건국한 영웅왕과 동료들이 바로 그것.
20대 중반의 나이로 신성 왕국을 건국한 건국 신화. 전쟁 용병으로 칼질하던 청년이 종말과 싸워 영지를 얻은 이야기.
그리고 영웅왕과 그를 따르는 여인들의 로맨스까지. 당연히 연예계 전문 기자들의 밥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발 로맨스. 제발 나오기만 해라. 뭔가 기사 좀 쓰게. 눈이 뻘겋게 된 기자들이 블라디 아크 타워 인근에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기자들이 깔렸는데 디트로이트로 나가라고?”
“그래야 연예계 기자들도 먹고살지.”
“김 양은 혼자 잘 먹고 잘 자던 애가 갑자기 안 하던 소릴 하고. 무슨 말 못할 문제라도 생긴 건가? 데이트 핑계로 진지하게 상의할 일이라도 있는 걸까?”
“걔가 어떤 앤데. 문제가 있었으면 바로 말했을걸. 그래서 네 진심은 뭔데? 데이트하기 싫냐? 김 양이 싫어?”
기순이 낄낄 웃던 표정을 정색하며 물었다.
“아니. 싫은 건 아닌데.”
“싫은 건 아닌데?”
“여러모로 특이하긴 하잖아.”
“너님께서는 안 특이하신 것 같고?”
“······.”
“······.”
기순의 실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왜? 저번에 PD 아재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그런 거야? 정치적으로 안정적이 되려면 우리 왕님이 여자들 여럿 들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그러는 건가?”
“···아니 갑자기 그 소리가 왜 나와.”
그 찰나의 머뭇거림을 놓칠 기순이 아니었다.
“이이야- 우리 왕님. 그걸 마음에 두고 있었네. 하긴 그렇지. 왕님이니까 정치적인 여파도 생각해야지. PD 아재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고.”
“······.”
“그래서 김 양과 너무 가까운 분위기가 되면 다른 쪽과 관계가 껄끄럽게 될지 모른다는 게 부담스러우시다?”
“······.”
기순의 가느다란 눈꼬리가 얄밉게 씰룩였다.
“크으- 그러니까. 그 이야기에 관심이 있긴 있었다는 거네. 캬하- 그쪽으로는 관심이 없는 척하더니. 하긴, 하렘은 못 참지. 인정.”
“······.”
신성 왕국은 다인종 국가였다.
백인만 하더라도 미국인, 영국과 프랑스계 캐나다인, 기타 유럽인이 있었고. 아시아계도 최근 엄청나게 늘어난 한국계를 비롯해 샬롯 그룹에서 데려온 일본계, 중앙아시아와 중동계도 적지 않았다.
여기에 신성 왕국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마루가 어느 인종을 왕비로 삼느냐에 따라 인종 갈등이 생긴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서 PD는 국왕 마루가 여러 인종과 계층의 사람을 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 된다고 하더라도. 국왕이 같은 인종, 출신을 홀대하지 않는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현대사회. 현대의 도덕과 문화와는 맞지 않는 생각이었지만, 종말을 생각하면 무시하기 힘든 주장이었다.
“그래서. 미래를 생각해 김 양과의 데이트는 그냥 둘이 밥 먹고 끝내려고?”
“그게 제일 무난하지 않겠냐?”
기순이 쯧쯧-하는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김 양에게 뭘 하고 싶은지. 물어봐라.”
“그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닌데. 뭔가 엉뚱한 소릴 할 것 같아서.”
“데이트인데 엉뚱하면 얼마나 엉뚱하겠어. 지하철 타고 있다가 사람들 왼발 오른발에 맞춰 따귀 때리기 내기하자는 소릴 하겠냐? 아니면 달리기 시합하는데 신발 바꿔 신고 뛰자고 하겠냐. 그냥 영 모르겠으면 김 양이 하자는 데로 해줘라.”
“어째 김 양을 챙긴다. 너?”
그러고 보니 둘이서 좀 그러지 않았었느냐는 눈빛을 마루가 보내자, 기순이 화들짝 반발했다.
“아니 무슨. 뭔 소리야. 챙기는 게 아니라 당연한 소리지.”
“그러냐? 진심이지?”
“갑자기 웬 이상한 소리야. 아오-”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소름이 돋았는지 자기 팔뚝을 쓰다듬는 기순이었다.
“어쨌든 이왕 데이트하기로 한 거 잘해줘라. 나랑 다르게 김 양이랑 너는 죽이 잘 맞잖아.”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김 양에게 문자를 보내는 마루.
뭘 하고 싶은지, 뭘 먹고 싶은지. 문자를 보내자마자 바로 답이 왔다.
[가상현실에서 한번 해보고 싶음.]뭐를?
[그러니까 한 판.]가상현실에서 대체 뭐를 해보고 싶다는 거야.
‧
‧
‧
김 양은 어쩌면 이런 순간을 기다렸는지 몰랐다.
차가운 눈 속에 파묻혔어야 할 디트로이트는 따뜻한 봄빛으로 물들어있었다. 무너진 폐허 속에서 돋아난 녹색의 싱그러움이 잔잔한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마연시에서 자주 본 광경이지만 오늘은 어쩐지 느낌이 달랐다. 엔피 마루가 아닌, 오리지널 마루와 함께 보는 장면이었으니까.
[왔음?] [그래. 갑자기 여기는 왜? 뭘 하고 싶은 건데?]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확인?] [응.]철컥-
김 양의 스코프에 마루의 모습이 확대됐다. 그리고 귀신같이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마루의 얼굴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찌릿한 감각이 그녀의 전신을 훑는 것 같았다. 오리지널은 달랐다. 엔피 마루도 무시무시했지만. 차원이 달랐다.
맨몸으로 옛날 이클립스만 들고 있는 마루의 모습. 그에 비해 자신은 전용 기체로 완전무장한 상황임에도 어쩐지 떨렸다.
[한 판 해.]김 양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동시에 마루의 신형이 스코프에서 사라졌다.
오싹오싹
두근두근
김 양은 사방에 띄워놓은 36 드론으로 마루의 위치를 찾았다.
폐허가 된 빌딩을 뚫고, 무너진 건물을 쪼개버리며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마루의 모습이 김 양의 HUD에 떠올랐다.
하앗- 하악-
자기도 모르게 거칠어지는 숨결.
온다. 그가.
그녀는 바로 버튼을 눌렀다.
쿡-
콰아아아아앙!
매설해 놓은 폭탄이 폭발하며 무너지던 건물이 완전히 터져버렸다.
사방으로 퍼지는 파편과 치솟는 먼지를 뚫고 쏘아지는 진한 살기.
숨통이 막힐 것만 같은 기분.
죽을 것만 같은 느낌에 김 양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