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847)
러스트 [RUST]-847
‘정신파?’
공간을 훑고 지나간 정신파에는 분명 지배력이 섞여 있었다.
가상현실에 들어와 있는 동안 고위급 식인귀나 흡혈귀가 블라디 아크 타워에 침입했다는 소릴까?
‘정신파 차단 장비가 상시 돌아가는 연구실에서 지배력이 섞인 정신파라니.’
마루의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바로 허리춤으로 내려간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이클립스··· 뉴클립스가 없었다.
‘······.’
가상현실에 접속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면서 옷장에 넣어둔 것이 떠올랐다. 접속 캡슐에서 나와 발을 딛자, 무언가 뭉클 밟히는 느낌.
?
바닥이 아니라 잔디?
잔디 비슷한 뭔가를 밟은 듯한 감촉에 고개를 숙여 내려다본 마루의 눈에 비친 건 일렁이는 무언가였다.
마루의 다리를 받치듯 올라왔던 일렁임이 스르륵- 환상처럼 사라지는 모습에 마루는 눈을 깜박였다.
슥- 눈을 비비고 다시 보자,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진 무엇. 그게 뭔지는 알고 있었다. 형체를 얻은 살기, 실체를 가진 죽음이 조금 전 사라진 그런 형태였으니까.
문제는 지금 이곳은 현실이라는 것. 마루는 손바닥으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설마 현실이 아니고 아직도 가상현실일까?
‘그럴 리 없어.’
마지막에 떠오른 일식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 뒤에 캡슐에서 나왔으니 이곳은 현실이었고 현실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당연히 캡슐에서 나왔을 때 인공지능 디아나가 보고해야 했는데 없었다.
‘흠- 문제가 생긴 건가?’
그러고 보니 사방에 비상등이 켜져 있었다. 인공지능이 디아나 특유의 녹색 불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중첩 때문인가?’
솔직히 지금도 기억이 뒤죽박죽이었다.
반복되는 순간도 있었고 겹친 시간도 있었다.
약간 과거와 현실 그리고 조금 미래.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머릿속에 때려 박힌 느낌.
그냥 한숨 자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마루는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정신적인 피로함을 이겨냈다.
정신파.
그것도 지배력이 섞인 정신파를 날린 놈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피로함과 짜증에 반응이라도 하듯 마루의 걸음걸음을 따라 검은 넝쿨이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발자국 모양으로 찍힌 검은 무엇에서 피어오른 넝쿨이 서서히 입자로 변해 허공에 녹아드는 이질적인 모습.
마루는 이상 현상을 몰랐다. 그저 지배력이 담긴 정신파를 쏜 놈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
‘음?’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미묘한 느낌. 정신파를 뿌렸던 놈이 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망친 건 아니었다. 정신파를 끊은 것도 아니었고.
‘지워졌다?’
흔적이 지워졌다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라 존재가 지워진 느낌. 그러니까 죽었다고 해야 할까? 마루의 미간에 약간 주름이 잡혔다.
멀리서 무언가가 죽은 것을 파악하는 감각은 아직은 낯선 감각이었기에 마루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마루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닥을 뚫고 치솟은 검은 넝쿨이 죠셉 마이어의 기억 복제를 한 뇌둥둥 단말기를 휘감고 있는 모습이었다.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처럼 서서히 반짝이는 검은 입자로 변해 허공으로 사라지는 검은 넝쿨. 투명한 보존 용기에 남은 이질적인 흔적이 같이 사라졌다.
마루는 당혹스럽고 난감했다.
그저 정신파를 쏜 놈이 뭔지 잡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진짜 잡아(?)버렸다. 그것도 가상현실에서나 발현됐던 검은 넝쿨이 현실로 튀어나와서.
이건 위험했다. 이게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앞으로 이런 식으로 뭔가 튀어나오는지에 따라 곤란했다.
쯧-
마루가 생기를 빼앗긴 죠셉 마이어의 뇌둥둥을 바라봤다. 뽀글거리며 거품이 올라와야 할 보존 용기는 잠잠했다.
어쩐지 탁해진 회백질 세포에는 생명의 기운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세포 전체가 동시에 사멸한 것 같은 느낌.
마치 세포 하나하나를 일일이 죽인 것 같은 결과. 정밀 분석을 해봐야 알겠지만, 지금 느낀 감각이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상하네.’
생체 단말기가 헛짓을 못 하게 하려고 정신파 차단 장치를 항시 가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루가 있는 곳까지 정신파가 왔다는 것은 정신파 차단 장치의 가동이 멈췄다는 뜻.
그런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자동으로 인공지능 디아나가 상황을 통제했어야 했다. 디아나가 통제하지 못할 상황이라면 사만다가, 디아나와 사만다가 통제하지 못한다면 보조 인공지능들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어야 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군.’
마루는 죽어버린 생체 단말기에서 시선을 거뒀다. 형체를 갖춘 죽음이 생체 단말기를 휘감은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죠셉 마이어의 찌꺼기가 죽기 전 발산한 정신파에 오염된 사람이라도 생긴 걸까? 마루는 연구실 중앙 통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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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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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디아나는 재빨리 연결을 복구했다. CCTV를 시작으로 다양한 센서와 접속하자 블라디 아크 타워 전체가 디아나의 인식 범위에 들어왔다.
[1층 확인] [2층 확인]‧
‧
[연구구역 확인. 개별 연구실 전체 확인 중.] [가상현실 센터 확인.] [일부 CCTV 작동 불능.] [일부 센서 작동 불능.] [수리 로봇과 드론 작업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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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이- 비상사태 발생.] [기억 보관 생체 단말기에서 생체 반응 소실.] [주변 생체 단말기 모두 생체 반응 사라짐.] [CCTV 영상 확인.] [CCTV 기록 없음.] [센서 반응 없음.] [센서 기록 없음.]인공지능 디아나는 CCTV 기록을 하나 확인할 수 있었다. 마루가 걷는 모습이었다. 걸음마다 피어오른 풀잎과 넝쿨이 사라지는 모습이 담긴 영상.
디아나는 즉시 마루가 있는 방향으로 신호를 연결하려 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접속라인이 전부 죽어버린 것.
어째서 슈퍼컴퓨터로 돌아갔는지, 왜 초기화가 됐는지 연산한 디아나가 멀리서 스피커 폰을 이용해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현재. 이상 사태가 발생했습니다.]간략하게 현재 상황을 설명하자, 중앙 출입구를 향해 나가던 마루의 발걸음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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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양은 마루가 의식을 찾고 가상현실에서 빠져나왔다는 소식에 기뻐했고 동시에 아쉬워했다. 혼돈에 빠져있었다면 한 번 더 비벼볼 기회가 생겼을 텐데 하는 아쉬움.
“그 표정은 뭡니까?”
“내가 내 얼굴 가지고 내 맘대로 표정도 못 지음? 아 그쪽은 표정도 반쪽이지. 쏘리.”
후드와 김 양이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동안 간호사는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으로 기원했다.
“별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가상현실에서 빠져나왔어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이상 현상이 있다잖아요.”
그저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을 뿐인데 어쩐지 웅장한 느낌과 함께 성스러운 기운이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
“······.”
신경전을 벌이던 후드와 김 양의 마주친 시선이 흔들렸다.
‘이거 엉뚱한 년 좋은 일 시켜주는 거 아닌가?’ 하는 공감이 잠시 눈빛을 통해 교환됐지만, 그뿐이었다.
‘똑바로 하세요. 승패가 갈렸는데도 인정하지 않고 자폭해서 그분을 위험해 빠뜨려 놓고 뻔뻔하게 그러지 마시고 말이죠.’
‘적들이 자폭하지 않을 것 같음? 식인귀고 흡혈귀고 부하들 시켜서 툭하면 자폭하는 게 일인데? 이번에 제대로 경험했으니 대비하지 않겠음? 예방주사 맞았다고 생각하면 좋은 일이지.’
‘그 이야긴 그만하죠.’
‘응. 동감.’
두 여자가 암묵적인 휴전을 선택했다. 그만큼 간호사의 걱정 가득한 눈망울은 파괴력이 컸다. 간호사를 어떻게 치웠으면 좋겠는데. 두 여자의 고민을 나주연이 해결해줬다.
“디아나의 보고에 의하면 그분의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고 해요.”
“정말 다행이에요. 하읏-”
간호사가 모았던 두 손을 내렸다. 두 손으로 역행해 중력을 거슬렀던 웅장함이 다시 흔들렸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저절로 감탄이 나오는 탄성과 무빙.
보잉보잉
저 크기로 저런 탄력과 움직임이 가능한 것인가? 세 여자가 각기 다른 탄성을 삼켰다.
“어머머.”
“Holly···.”
“시발-”
그 작은 소리에 간호사가 고개를 돌렸다.
“에에? 지금···.”
무슨 소리냐는 듯한 간호사의 순수한 눈빛에 세 여자는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눈치 보인 김 양이 빨리 이야기하라는 듯 나주연의 옆구리를 살짝 찌르자, 그녀가 반사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건강에는 이상이 없으시지만, 능력 발현에 문제가 있어 보여요.”
나주연이 모니터에 영상을 띄웠다. 마루가 걸을 때마다 발자국에서 피어오르는 비현실적인 무엇.
“저거 살기?”
“······.”
“······.”
살기가 패시브로 줄줄 샌다고?
그럼 걸어 다니는 재앙 아닌가?
“현재까지 분석한 바로는 현실화된 살기 또는 유형화된 죽음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뚜렷하게 피어올랐던 풀잎과 넝쿨이 서서히 입자로 변해 사라지는 모습.
“금방 사라지는데?”
“사라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걸을 때마다 저게 생긴다는 게 문제라는 말입니다.”
후드의 대답에 김 양의 눈매가 조금 뾰족해졌다.
“확실히 그래요. 그분의 주위에서 언제 죽음이 피어오를지 모른다는 거니까요.”
걷기만 하는데도 피어오르니, 마루 옆에 있다가 갑자기 저게 솟아나면 몰살이었다.
그러니까 맞네. 걸어 다니는 재앙.
“게다가 단순히 생명체에게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닌 것 같아요. 현실화되면서 전자기기에도 영향을 준다고 할까요.”
인공지능 디아나가 근처에 가면 바로 지워져서, 백업한 정보가 있는 슈퍼컴퓨터로 돌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CCTV나 센서도 그냥 가동이 정지됐다.
“프로그램이 지워진다는 말입니까?”
후드의 반쪽 얼굴이 심각해졌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그럼 노심 기체나 리퍼 슈트 같은 것도 쓰지 못한다는 것임?”
“능력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렇겠지요.”
“비행선은? 비행선에도 보조 인공지능을 비롯한 다양한 전자기기가 있잖음?”
김 양의 물음에 나주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확인해봐야겠네요. 능력이 너무 강해져서 프로그램과 전자기기까지 망가뜨리는 상황이라면 확실히 문제니까요.”
“······.”
“······.”
유형화된 살기가 무시무시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 반동으로 노심 기체나 리퍼 슈트, 전용 비행선까지 타지 못한다면 오히려 전투력이 떨어지는 것 아닐까?
“확실한 건 아니니까 단정할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현실화된 살기나 죽음의 넝쿨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해결될 문제니까요.”
그건 그랬다. 훈련이 필요하다는 건데.
“가상현실은 언제 다시 쓸 수 있음? 그거 살기랑 죽음 통제하려면 연습이 필수인데.”
“아니요. 가상현실을 다시 가동해도, 직접 대련 형태는 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죠셉 마이어의 기억을 담은 생체 단말기가 죽었습니다. 생명이 완전히 지워졌어요. 현실에서 죽음의 넝쿨로 생체활동을 멈춰버린 것이죠. 그뿐만 아니라 인공지능 디아나도 지워져서 백업한 슈퍼컴퓨터에서 의식을 차렸어요. 현실에서 말이죠.”
나주연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만약 프로그램을 죽였다는 쪽으로 생각한다면···. 그렇겠군요. 가상현실에서 그분의 살기로 죽었을 때, 현실에서도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요.”
위험한 이야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를 쓰려면 부대와 따로 떨어져 단독 행동을 해야 하는 마루였는데, 이제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조심해야 할 판이 됐다는 뜻.
“양자 컴퓨터를 고치고 있고 손실된 생체 단말기를 제거하고 새것으로 교체하고 있어요. 살기와 죽음을 분석하기 전까지는 만나지 않으셨으면 해요. 만에 하나라도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마루는 일종의 격리 상태가 됐다. 마음만 먹는다면 밖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마루는 선선히 격리 상태를 유지했다.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마루에 김 양이 속닥였다.
[능력 빨리 파악하고 후딱 한계 알고 그러려면 제일 빠른 방법은 실전 아님?]“그렇기는 하지.”
일리 있는 말이었다. 실전이 제일 효과적인 건 사실이니까.
근데 어디서 실전을 한단 말인가?
[제국에 손 보기로 했던 애들 우리 둘이서 작업하면 어떰?]개념 상실한 제국 의원들과 군부 인사들 치우기로 했던 이야기.
[좋잖음. 내가 원거리. 근거리는 왕님이 능력으로 조용히 착하게 만들어 버리는 코스로. 어떰? 둘이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오는 건.]겸사겸사 능력도 확인하고 오순도순 같이 작업하면 좋지 않겠음?
둘이서.
조용히.
김 양의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좋은 생각 아님?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