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853)
러스트 [RUST]-853
붉은 점이 서서히 회색으로 변하는 HUD를 보던 마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회색으로 변한다고?’
생체 탐지기는 살아있는 것은 붉은 점으로 표시되고 죽거나 범위에서 벗어나면 붉은 점이 사라지는 것으로 표시됐다. 그런데 서서히 회색으로 변하다니.
이어서 검게 변하는 화면.
여러 센서와 보조 인공지능도 침묵했다.
헬멧을 벗은 마루가 조심스럽게 한 걸음 내디뎠다. 분명 특수화를 신고 있음에도 신발 밑창을 뚫고 느껴지는 미세한 촉감.
풀잎을 밟는 감각은 기묘했다.
뻣뻣하게 솟아오른 잡초를 밟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 풀들이 걷기 편하게 길을 열어주는 것만 같은 신기한 감각.
발걸음이 닫는 곳마다 풀잎이 스스로 누워 오솔길이 만들어졌다.
‘밟는 감각이 이상한데.’
이상하다고 생각하자, 서걱서걱한 감촉이던 바닥이 양탄자처럼 약간 푹신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마음을 읽는 것처럼.
‘······.’
반응하는 것 같았다.
‘바닥이 보이지 않으니 물리적인 함정을 조심해야 할 텐데.’
신경이 바닥에 쏠리자, 풀잎과 넝쿨이 그에 대답하는 것처럼 이동 방향을 먼저 헤집기 시작했다.
쿠직-
우득-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함정이 해체되는 감각. 마루가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신경을 집중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답답하군.’
신체 능력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기본적 신체 능력 각성자와 비슷하거나 하급 식인귀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어둠에서 까막눈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깊은 어둠 속에 흐릿한 선이 그려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던 공간이 2차원적인 선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주변 풍경이 회색과 짙은 녹색으로 그려진 선이 되어 떠오르는 듯한 감각.
‘미친.’
저번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5천이 넘는 식인귀를 죽여서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훈련한 결과일까?
생각에 반응한다면 풀잎과 넝쿨도 조종할 수 있지 않을까?
EMP 비슷한 전자기기 먹통도 적군과 아군의 것을 선택적으로 하거나 최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EMP와 비슷한 거지 EMP는 아닌 현상이니까.
마루의 생각이 복잡해지는 가운데. 바닥을 가득 채운 죽음의 정원이 마루의 시야와 촉감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일렁이는 풀잎과 넝쿨이 마치 레이더라도 된 것처럼 복도와 방을 헤집으며 정보를 전달하기 시작한 것.
정원에 펼쳐진 풀잎과 넝쿨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영역 내의 공간을 전부 비집고 들어갔다. 문틈을 시작으로 환기구, 하수구 같은 구멍까지 밀고 들어갔다.
조금씩 더 선명해지는 감각. 처음에는 2~3m 주변만 느낄 수 있었는데, 그 영역이 점차 넓어지고 있었다.
마루는 보이지 않는데 보는 것이 신기했다. 죽음이 펼쳐진 정원 속에서 풀잎과 넝쿨이 움직이며 정보를 보내오는 것이 낯설었다.
통제할 수 없는 죽음. 이해할 수 없는 현상과의 동거 같았다. 그렇게 죽은 늑대인간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마루가 갑자기 우뚝 멈췄다.
5천이나 되는 식인귀를 죽였을 때는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현기증도 없었는데, 지금은 갑작스러운 허기와 어지러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건···.’
열기. 근육통을 시작으로 전신경련으로 넘어갈 것 같은 증상이 동반되기 시작했다. 마루는 바로 영역을 해제했다.
죽음의 정원을 해제하자, 서서히 검은 입자로 변해 허공으로 사라지는 풀잎과 넝쿨. 회색과 짙은 녹색으로 보였던 공간이 다시 어둠으로 돌아갔다.
칙-
중화제를 꽂고, 이어서 에너지 보충제까지 연거푸 들이키고 나서야 가늘게 떨리던 몸이 안정을 찾았다.
마루는 전원이 꺼진 헬멧을 작동시켰다. 예민한 감각을 이용해 공간을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기엔 정신적으로 너무 지친 상태였다.
[시스템 부팅 시작합니다.] [백업 시점을 선택해 주십시오.] [센서 작동 이상 없음.] [통신 연결 이상 없음.]일단 휴식이 필요했다.
[김 양과 통신 연결해.] [통신을 연결했습니다.] [응? 괜찮음? 저번보다 빨리 해결했네.]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정원과 소통했다고 해야 하나?
[소통? 그 영역이랑 뭔가 대화를 하고 그랬다는 거?]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그 넝쿨 같은 거 조종할 수 있게 된 것임? 그럼 아군이랑 적군이랑 구별해서 공격할 수도 있게 됐고?] [아- 잠깐.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일단 좀 먹고 쉰 뒤에.
[알겠음. 로봇하고 드론 바로 보내겠음.]까마귀와 쥐떼는 주변 정찰과 인근에 있는 요새를 수색하게 했으니, 드론과 로봇을 보내겠다는 김 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마루가 몸을 돌이켰다.
‧
‧
‧
휴식을 취한 마루는 사람들에게 바로 상황을 알렸다. 죽음의 정원과 연결(?)된 듯한 현상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신기하네요.]어쩐지 조금 아슬아슬한 표정을 짓는 나주연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나온 감정이겠지만, 죽음의 정원 이후로 호기심이 넘치는 그녀였다.
[정말- 신기하면. 더- 조심해야겠지.]바로 돌려서 경고하는 마루. 혹시라도 호기심에 선을 넘게 되면 여러모로 비극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초장에 그럴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좋을 터.
[죽음의 영역이 달라진 건 로저스 센터에서 5천이 넘는 식인귀를 처리한 뒤라고 보여요.]조금은 냉정한 마루의 반응을 알아챘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이야기를 계속하는 나주연.
[그리고 당시에는 로저스 센터를 전부 장악하고도 피로하지 않으셨는데, 거점 요새 정도의 작은 공간을 완전히 장악한 것도 아닌데 그런 피로감을 느꼈다는 것은···.]어쩌면 죽음의 정원이 5천이 넘는 식인귀를 삼키고 유지됐었고 지금은 생명을 흡수하지 못해 부담을 준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제시하는 나주연이었다.
[살기는 집중력과 정신력이 소모된다고 하셨었죠?] [그랬지.]살기를 무한정 쓸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집중력과 정신력의 소모는 체력의 소모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비슷한 원리라면 죽음의 정원도 뭔가 소모해서 발현되고 유지된다는 이야기. 그게 죽음의 정원 속에서 죽은 적이든 아니면 마루의 무엇이든 간에.
[그러니까 검은 풀밭이 먹을 게 없으면 마루의 정신력을 빼먹다가 부족하면 체력도 뺏고 생명력도 뺏는다는 소리임?] [체력이 소모되면 진이 빠진다고 표현하지요? 아마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거에요.]마루의 체력을 빨아 먹는다는 이야기에 김 양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그럼. 다른 거 먹을 게 많을 때만 소환하면 되겠네.]식인귀라든지, 변이 벌레라든지 그런 거 죽일 때만 소환하면 되겠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러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해요.]나주연이 김 양의 의견에 동의했다.
[아직은 사례가 부족합니다.]단정 짓기에는 이르지 않냐는 후드.
[영역 유지 시간과 검은 정원이 죽인 개체 숫자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면 대중이 없습니다.]2~3초 사이에 식인귀 3~5마리를 죽였을 때와, 5천이 넘는 식인귀를 죽이는데 사실상 10초 전후로 걸렸던 것을 보면. 수색에 검은 정원을 사용한 마루가 급속히 허기짐과 피로감을 느낀 게 정말 위험한 걸까?
10초 정도 소환하는 데 무리가 없다면, 5천이 넘는 식인귀를 죽이는 데 무리가 없었다는 이야긴데? 그렇다면 10초 이내로 끊어서 능력을 쓰면 그만이지 않느냐는 후드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바로 시스템에 관여했다는 부분이었다. 생체 센서가 붉은색에서 서서히 회색으로 변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생체 반응 센서는 생명 반응이 있을 때는 붉은 점으로 표시되고 없을 때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붉은 점이 회색으로 변하다 사라졌습니다.]이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다.
[어쩌면 검은 정원이 시스템에 영향을 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단순히 기능을 멈추게 하고 지우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붉은색이 회색으로 변했다가 사라졌다는 건 어쩌면 왕님에게 보내는 신호가 아니었을까?]기순의 실눈이 더욱 가늘게 보였다.
[어떤 신호?]어떤 신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체적으로 신호가 아닐까 싶은 기순이었다.
발버둥 치다 서서히 죽었다면서? 아무리 늑대인간이라고 하더라도 넝쿨이 여럿 달려들었으면 금방 죽였을 텐데, 서서히 변했다는 건 의도적으로 빨리 죽이지 않았다는 뜻 아닐까?
[정원이 내 생각을 확인하려고 시간을 끌었다?] [확인해봐야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다고 보이는걸.]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내 능력이 감정을 색으로 보는 능력이잖냐. 그러니까 붉은색이 회색으로 변했다는 점이 신경 쓰이더라고.] [붉은 점이 서서히 회색으로 변한 부분이 걸렸다고? 왜?] [어째서 하필 회색일까? 노란색도 있고 파란색도 있고 색은 많은데.]그리고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공간을 회색과 녹색으로 볼 수 있게 됐다며? 그건 왜 회색이고 녹색일까? 아마도 배경은 회색이고 풀잎과 넝쿨은 녹색으로 보였겠지?
[배경이 회색. 풀잎과 넝쿨이 녹색.] [그래. 붉은 점이 서서히 회색이 된다는 건. 죽어서 배경이 된다는 뜻을 전해 준 것일 수도 있겠다.] [···무슨 어이없는 소릴. 그렇다고 치고 그럼?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이쪽 시스템에 개입했고?] [개입한 건지는 확인해 봐야겠지.]인공지능의 발달로 어지간한 프로그램은 실시간으로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핵심 기능을 제외한 편의 기능이라거나 세세한 보정 같은 것은 인공지능이 바로바로 실행했다.
[생체 탐지기 표시도 자동 업데이트됐는지 확인하라는 이야기군요.]후드가 바로 업데이트상황을 확인했다.
문제는 그게 선택지에 들어가는 색상이었다는 점. 그러니까 생체 탐지 센서에 잡힌 것을 표시할 때 빨간색으로 표시할지 회색으로 표시할지 선택하는 기능이었다는 점.
배경도 검은색 바탕에 빨강. 흰색 바탕에 회색. 노란색 바탕에 빨강처럼 선택하는 것이었지 검은 바탕에 빨강으로 시작해서 회색으로 변하는 기능은 없었다는 결론이었다.
[에또- 그거 동시에 같이 아닐까요?]간호사가 소심하게 말했다.
[동시에?] [네- 그러니까 색상 업그레이드를 변경을 이용해서 그 검은 정원이 신호를 보냈다고 생각하면···.] [어쨌든 이쪽 시스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확실히 그렇다고 봐야겠네. 사례가 부족하긴 하지만.] [어쨌든 확인하려면 더 많은 사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로군. 까마귀와 쥐떼들이 확인한 정보는 어때?] [B 섹터 8번 거점 요새에서 11번까지 1곳에만 늑대인간이 있었고 나머지는 비어있다고 했음. 그리고 C 섹터 1번에서 5번까지에도 1곳에만 늑대인간이 있었고. 응. 띄엄띄엄 있다는 보고임.] [좋아. 이왕에 확인해야 할 거. 바로 확인해보도록 하지.]마루는 영상회의에서 나온 부분을 전부 확인해 보기로 했다. 늑대인간도 잡고 죽음의 영역 실전 사용을 통해 숙련도도 높이고.
[참. 이번에 잡은 늑대인간에게서 정보추출은 했나?] [자폭 장치 같은 게 달렸는지, 로봇이 가져온 늑대인간 뇌는 전부 녹아있었음.]그것만으로도 늑대인간이 어디 소속인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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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라라라락-
확장하는 죽음의 정원이 늑대인간을 구석으로 몰았다.
크아아아앙!
구석에 몰린 늑대인간이 고개를 들었다. 벽을 타고 환풍구로 도망치자는 계산이 서자, 그대로 행동에 옮기는 녀석.
펄쩍 뛰어오른 늑대인간이 놀라운 신체 능력으로 벽을 타고 박차 올랐다. 그렇게 환풍구를 뜯어버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환풍구 속에서 폭발적으로 쏟아진 검은 넝쿨이 늑대인간을 휘감았다.
크으ㅡ어아아—
늑대인간이 죽기 전, 목을 잘라낸 마루가 바닥에 떨어진 늑대인간의 골통을 쪼개고 헤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