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854)
러스트 [RUST]-854
역시 뉴클립스가 아닌 칼로 늑대인간의 두개골을 쑤시려고 하니 상당히 뻑뻑했다.
쯧-
식인귀들이 쓰던 걸 뺏은 전리품 단검. 버지니아 잔당 애들이 주로 사용하는 단검으로 늑대의 머리통을 해체하는 마루가 혀를 찼다.
‘감이 죽었네. 죽었어.’
예전 같았으면 대충 부쳐(butcher 정육, 고깃집) 나이프 하나만으로 깔끔하게 해체했을 텐데, 이클립스 업그레이드했을 때도 그렇고 최근에는 뉴클립스만 들고 다녔더니 감이 많이 죽은 티가 났다.
순식간에 늑대인간 머리 뚜껑을 열어 놓고 감이 죽었니 어쩌니 하는 마루의 중얼거림에 재부팅된 보조 인공지능이 혼란을 일으켰다.
인공지능이 연산 오류를 일으키거나 말거나 깨끗하게 전두부를 열어버린 마루의 눈에 조그만 자폭 칩이 보였다.
쌀알 두 개가 가운데 있는 투명한 구슬에 붙어있는 모양새. 중심부에 있는 투명한 구슬이 갑자기 짙은 자주색으로 변하는 찰나, 나이프 끝으로 톡- 제거한 마루가 해체한 늑대인간의 머리통을 챙겨 자리를 피했다.
퐁- 조그만 소리와 함께 자주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10m 넘게 피했음에도 금세 헬멧에 내장된 화생방 장비가 작동하는 것을 보면 심상치 않았다.
[독인가?] [분석결과 치명적인 융해 성분을 가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세포를 녹여버리는 일종의 융해독(融解毒)이었다. 저번 늑대인간의 뇌를 녹여버린 게 이것. 마루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이렇게 특수한 종류의 독을 생산할 정도라면 생산시설이건 연구시설이건 돌아가는 게 있는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아도 버지니아 잔당이 비밀 연구실이나 생산시설을 굴리고 있으리라고 예상했었다. 어디 한 번 걸리기만 하라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왔다.
‘새끼들 잘됐네. 아주.’
뭉클-
작은 살기에 반응해 발끝에서 피어오르는 조그만 죽음에 화들짝 놀란 마루가 심호흡했다.
흡흡하-
흡흡하-
흐으읍-하아아-
언젠가 TV에서 봤던 호흡법.
라마 머시기? 머시기 라마? 호흡법이라고 했었는데.
달라이 라마 명상 호흡법이었나?
그건 아니었던 것 같았지만, 어쨌든 효과는 좋았다.
피어오르던 죽음이 파사삭 검은 입자로 변해 사라지는 모습에 긴장이 풀린 마루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거야 원.’
한 방에 전부 날아갈 뻔했다. 아무래도 제어하려면 신경 많이 써야 할 듯했다.
[비행선에 연락해. 정보추출기 대기하고 있으라고.] [———-]그 작게 피어오른 죽음에 재부팅됐던 보조 인공지능이 또 나가버렸다. 늑대인간의 뇌를 담으려고 꺼내놓은 특수 보존용기의 냉동장치도.
[씨이이- 아아-]순간적으로 빡치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 느낌이···.
뭉클-
흡흡하-
흡흡하-
흐으으읍- 하아아아-
호흡을 통해 늑대인간의 머리통을 싱싱하게(?) 지켜낸 마루였다.
‧
우여곡절(?) 끝에 전용 비행선에 도착했다는 마루의 한탄에 김 양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렇잖음? 누가 성질 잘못 건드리면 대참사 나는 건데. 오늘은 화상회의도 하지 말고 고기를 꼭 먹고. 그냥 고기 말고 한우 투플로 챙겨 먹고. 푹 쉬셈.]“···알았다.”
한국에 친 신성 왕국 정권이 세워진 건 그런 점에서 좋았다. 일단 한우와 김만 하더라도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김 양이었다.
김치가 아니고 김인 이유는 김치는 이미 한국 배추 종자로 키워서 김장 잘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근데 김은 바다도 없고 상황이 김 양식할 상황은 아니지 않냐며 마루의 밥상을 걱정하는 그녀였다.
신성 왕국은 제국의 모듈 원전을 한국에 판매하는 중계무역으로 달달은 아니고 고소한 정도쯤 이익을 보고 있었다.
제국도 한국이라는 시장이 생겨. 원자재와 소재, 부품, 장비를 팔아먹고 부족한 반도체와 필수품을 들여올 수 있어 좋았다.
관여하지 않는 것은 않는 것이고 경제적으로 꿀을 빨 수 있으면 빠는 게 당연지사. 신성 왕국이 중계무역을 한 덕에, 한국과 제국 모두 나름대로 위기를 넘기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렇든 저렇든 초대형 비행선을 정기적‧체계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건 신성 왕국이 유일했기 때문.
[고기 먹을 때, 쌈도 꼭 같이 먹고. 같이 먹으면 좋겠는데.]“그래. 깻잎이랑 상추, 대파랑 양파까지 해서 잘 먹을 게.”
[은신 테크 올리려면 마음 수련 꼭 찍어야 함.]“······.”
‘내가 게임 캐릭터냐?’ 마루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거 있잖음. 살기를 갈무리해서 그림자처럼 들어가 한 방에 착- 그냥 대충 넘기지 말고 이번 기회에 마음 다스리는 거 찍고 가는 게 짱임. 진짜임.]‘그거 내가 예전에 하던 건데?’ 라는 마루의 생각을 읽었는지 김 양이 고개를 휙휙 저었다.
[예전에는 휙-가서 살! 해버리고 푹- 한 거고. 이제는 스르륵- 가서 살 없이 푹-해야 할 경우가 생기는 거니까 다르지.]“그래··· 다르다고 하자.”
[다른 것임. 다름.]진지하게 강조하는 김 양의 얼굴에 자기도 모르게 픽- 입꼬리가 올라간 마루가 대답했다.
“알았다. 알았어.”
그녀의 말대로 살기 섞인 감정이 나오지 않도록 안정하는 연습은 필요해 보였다. 어쩌면 죽음의 정원으로 변한 뒤 지금까지 사고 터지지 않은 게, 천운이었을지도 몰랐으니까.
마루는 늑대인간에서 뽑은 정보를 보냈다. 그거 보다가 열나서 죽음 터지면, 통신도 끊기도 비행선도 정지되는 꼴인지라 나중에 내용 요약본을 따로 받기로 한 것.
[알겠음. 잘 정리해서 보내라고 할 테니까.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마음 잘 챙기셈.]‧
확실히 마음이란 건 묘했다.
살기가 죽음을 품은 검은 정원으로 변한 지 조금 됐지만, 생각하지 않고 있었을 때는 크게 위험하다고 느끼지 않았었다. 하지만 막상 한 번 겪고 나니 계속 신경 쓰인다고 할까?
인공지능이 멈추는 것을 확인한 뒤로 재부팅 시스템도 만들었고, 완전히 먹통이 되더라도 다시 전원만 켜면 재작동 가능한 기술을 넣었지만 그걸 전군에 도입하는 건 곤란했다.
죽음의 정원이 펼쳐지면서 터지는 효과는 어디까지나 EMP(Electro-Magnetic Pulse 전자기 펄스)와 비슷한 효과였지, EMP는 아니었다.
비슷했기에 EMP 대응 장치로 어느 정도 피해를 줄일 수는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EMP는 아니었기에 회복되지 않는 손상이 누적되는 부분도 있었다.
캐나다 방면 B 섹터 12번 거점 요새를 시작으로 주변 11번 요새나 C 섹터에 있는 요새들을 정리하면서 죽음의 정원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장비들이 급속도로 노후화됐다.
그건 보조 인공지능도 마찬가지. 단순한 인공지능이 아닌 인공의식에 도달한 전자인격은 반복되는 죽음 체험에 오류를 일으키기까지 한 것.
전원이 꺼지는 것과는 다른 근본적인 체험. 백업으로 인공 자아를 지킨다고 해도 백업에 사용되는 반도체 자체가 열화(劣化)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보조 인공지능의 연산력은 계속 떨어졌고 급기야 연산 오류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인간으로 해당하면 치매나 정신착란에 해당하는 증세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
세상에. 프로그램이 인공인격에 도달했던 것도 놀라운데, 이제는 인간이 걸리는 병과 비슷한 증세까지 보이다니.
나주연을 비롯한 연구진들은 마루에서 시작된 모든 것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가칭 죽음의 정원이라고 불리는 능력도 그렇고. 그 능력이 가진 효과와 여파가 기존의 모든 상식과 과학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마음이라는 건 뭘까요?”
나주연은 ‘제약(製藥)’ 능력이 있었다. 그녀 또한 상식에서 벗어난 존재였지만, 그 상식에서 벗어난 존재조차 혀를 내두르게 했던 존재가 마루였다.
“전 그렇게 생각했어요. 마음이라는 것은 허상. 모든 감정도 본질은 생화학적 작용이며, 따라서 약을 통해 마음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죠.”
분명히 그랬었다.
그녀의 생각처럼 과거 미합중국에서는 ‘게이 가스.’라는 것도 개발하고 그랬으니까. 게이가 아닌 사람을 게이로 만드는 가스라는 건. 생화학적 합성물이 인간의 성적인 취향을 바꿀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가능한 것이기 마련.
사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과학자와 군부. 그리고 재계와 정계까지. 인간의 마음과 감정을 조종하는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과학자들은 인간이라는 신비를 주무를 수 있다는 희열로. 군부는 인간 그 자체를 병기화하고 인간을 무력화할 수 있는 무기에 대한 필요 때문에.
재계는 감정의 상품화를 통한 새로운 시장 개척으로 정계는 호감을 얻어내 선거에서 이기고자.
인간을 강화하는 약물,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약물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자연스러운 인간에서 벗어난다면 그건 인간일까?
인간의 마음과 감정이 인간의 것이 아니라면? 단지 주사기로 주입된 마음과 화학작용으로 합성된 감정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아니었어요. 만들어낸 마음은 문제가 있었죠.”
그걸 알려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약물이 통하지 않는 마루였다. 약이 통하지 않았기에 역설적으로 약의 불완전함을 깨닫게 해준 존재.
그래서 그녀는 지금 상황. 죽음을 반복한 보조 인공지능이 붕괴하는 현상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었다.
“인공지능에 마음이 생겼다면. 그 마음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임? 인공지능에 마음이 생겼으니까 옛날처럼 인격이 없는 인공지능을 만들자는 것임? 아니면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까 백신 프로그램 같은 거라도 깔자는 이야기임?”
“아니요. 그것보다 더 넓은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갑갑하네. 정말. 알아듣게 쉽게.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하면 안 됨?”
김 양의 불편한 대꾸에도 나주연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는 이제까지 종말을 환경의 변화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지진, 화산 폭발, 쓰나미를 시작으로 최저 기온과 최고 기온을 갱신하는 날씨 같은 것을 종말로 생각하고 있었다.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과 그 때문에 생긴 변이 괴수들 식인귀와 흡혈귀의 창궐도 종말이라고 생각했고.
하지만 진정한 종말은 법칙의 종말이었다. 이제까지 현상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게 한 법칙의 종말.
물리로 해석할 수 없는 물리 현상. 화학으로 분석할 수 없는 화학 약품. 생물학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생명체까지.
그리고 죽음이라는 기존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실에 현현한 죽음. 기존의 과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건 분명 기존 세상의 종말이었다.
“종말에 대비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었죠. 우리는 이미 종말에 들어섰고 새로운 세상에 직면했어요.”
“······.”
“······.”
“······.”
종말에 대비하기 위해 능력자가 생긴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존의 세상이 종말을 맞았기에 능력자가 생겼다는 이야기.
식인귀와 흡혈귀가 종말에 대항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세상과 가치관이 종말에 들었기에 식인귀와 흡혈귀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생각.
변이 바이러스가 기존의 생명체를 멸종시켰고 변이를 일으킨 생명체는 기존에 분류했던 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설명해서도 안 된다는 접근방식까지.
나주연은 발상의 전환을 역설했다.
“살기가 담긴 마음이 죽음을 유형화할 수 있는 세상에서는···. 실체를 얻은 죽음이 마음을 죽일 수 있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가 될 테니까요.”
“······.”
“······.”
“······.”
종말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에서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는 나주연의 주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쿠직-
뼈와 살이 갈리는 소리. 늑대인간의 목을 썰어버린 마루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가볍게 휘두른 단검이 깔끔하게 목뼈를 자르고 나간 것.
휙휙-
나이프를 공중에 휘둘러 피를 털어낸 마루의 표정이 어쩐지 심각했다. 그냥 단순하게 고기를 잘 자른다고 하고 넘어갈 감각이 아니었기 때문.
월드 축산에서 작업 잘한다고 했을 때, 그저 고깃결을 잘 보고 잘 썬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단순히 그렇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도망쳤을 때도 그렇고 한국에서 탈출하면서 여러 차례 백병전(白兵戰)을 거쳤다.
좀비처럼 변한 변이체와 싸웠고 정예 직원들과도 싸웠으며, 특수 능력을 사용하는 능력자에 식인귀까지. 다양한 적들과 교전했었다.
그때마다 마루를 구한 건 특이한 감각과 상식에서 벗어난 칼질이었다. 위기를 감지하고 경고해준 감각 그리고 특유의 칼질.
싸구려 회칼과 장미칼로 싸웠던 기억. 보위 나이프로 요트 옆구리를 찢었던 일. 칼 한 자루로 헬리콥터도 썰고 나중에는 빌딩 등판을 쪼갰던 것까지.
휙휙- 나이프를 허공에 휘두른 마루가 날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그저 특별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칼날이었다. 하지만 자를 때 손맛이 달랐다. 아무리 결을 따라 목을 쳤다고 하지만 처음에는 거칠었던 손맛이 지금은 부드럽게 변한 것.
‘계속 써보면 알겠지. 그나저나 정보 추출한 거 보낸 지가 언젠데. 정리가 늦네.’
마루가 늑대인간의 잘린 머리통을 보존용기에 담자, 멀찌감치 떨어져 대기하고 있던 로봇이 보존용기를 회수해 갔다.
그렇게 잠시 뒤 김양의 얼굴이 HUD에 떠올랐다.
[마음 상태는 좀 어떰?]괜찮냐고 묻는 김 양이 어쩐지 진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