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881)
러스트 [RUST]-881
감정이 비틀리게 보인다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본래 기순의 능력은 감정을 색과 이미지를 섞어 판단하는 능력이었다.
붉은색이라고 해도 긍정적인 이미지일 수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었다. 사랑이나 열정 같은 붉은색이 있는가 하면, 살의나 살기도 붉은색 계통으로 드러났으니까.
하지만 비틀렸다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감정이 비틀렸다고밖에 달리 표현하기 힘든 느낌. 기순은 그렇게 고른 사람들을 따로 걸렀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 없어 보이는 사람들. 어쩌면 선량하기까지 해 보이는 모습에 기순은 혹시라도 자신의 능력에 혼선이 온 건 아닌지 잠시 고민했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
기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 따로 가뒀습니까?”
[예. 각기 독방에 넣었습니다.]“어디 봅시다.”
[예. 실내 CCTV 화면입니다.]독방에 넣은 사람들의 모습이 CCTV 화면에 잡혔다. 편안하게 누워있는 사람을 시작으로 소파에 앉은 사람, 책을 읽는 사람 등 불안해 보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 장면을 본 기순의 가느다란 실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따로 격리했으니 불안할 법도 하건만, 한 사람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있다?’
이건 확실히 이상했다. 확률적으로 생각해 봐도 백 명 넘는 사람 가운데 몇 사람 정도는 불안해하고 초조하기 마련이었으니까.
‘비틀렸다는 게 이런 의미인가?’
단순히 공포심이나 불안감이 거세된 상태라는 뜻은 아닐 테고. 뭔가 뒷배가 있다는 건가? 아니면 자신들은 안전하다는 믿음?
‘믿음?’
기순은 바로 근처에 있는 들쥐 군단을 호출했다. 1,300만 마리가 한꺼번에 무언가를 했을 때 생긴 감정을 확인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장면이었기도 하거니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다. 1,200만이 넘는 하나의 종족이 한목소리로 염원하면서 발산하는 이미지를 감당하기도 어려웠을 것.
하지만 사람들의 감정에 비틀림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상 쥐들의 감정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염원과 믿음. 그런 것들이 섞여서 비틀림이 발생하는 것인지. 그게 실체화, 유형화, 현실화되는 것이라면.’
코끼리를 신성시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본다면 진짜 변이 코끼리를 넘어 신성을 획득한 코끼리가 나올 수도 있다는 거고.
황소를 믿는다면 황소가 그렇게 변할 위험도 있었다. 단순히 수십 명이 믿는다고 그렇게 쉽게 변하지는 않겠지만, 인식과 생각이 조금이라도 현실에 영향을 주고 있는 세상에선 뭐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씨발. 끌어 담굼의 법칙도 아니고.”
당김이 아니라 담굼. 수천만 하나의 염원으로 망하길 원한다면 진짜 망해 버린다고 생각해 보자, 진짜 골 때리는 세상이 되지 않겠나?
“미치겠네. 와-”
세상이 점점 개판이 된다는 건. 이렇게 개판이 되길 원했던 존재. 어쩌면 세상에 원한을 품은 개체들이 많다는 건가?
기순은 머리를 흔들었다. 거기까지는 너무 나간 것 같고. 어쨌든 개체의 비틀린 무엇부터 확인해야겠지.
110-23 들쥐 군단, 군단장을 비롯한 영관급 들쥐들 100여 마리가 도착했다. 기순은 그들을 향해 능력을 사용했다.
?
선명하게 떠오르는 비틀림. 인간보다 더 직관적이고 명확한 비틀림이 있었다. 기순은 능력을 해제하곤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가둬둔 인간들은 들쥐들이 마루를 믿는 것과 비슷하게. 무엇인가를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비틀림의 모양과 형태가 색이 다른 것으로 보아. 마루가 아닌 다른 존재를 믿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겠지.
들쥐들은 마루의 곁에서 쓰임 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성전에 참여해서 영원한 낙원으로 가기를 원했고. 살아서는 포상을 죽어서는 영생을 원했다.
그렇다면.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갇혀 여유를 부리는 저들은 뭘 원하는 걸까? 무얼 노리고 도시에서 대피하라는 명령에 응한 걸까? 아니, 무얼 믿는 것일까?
기순의 이야기에 나주연의 흐릿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선후는 확실했으면 좋겠네요.]“선후?”
[네. 바이러스 사태와 대재앙이 닥쳤고. 그 뒤에 벌어진 일이라고 봐야 해요. 그러니까 염원(念願)이나 신앙이 실체적인 힘을 얻은 건 나중 일이라는 것이에요.]순서를 바꾸면 안 됐다. 지구의 법칙이 무너지기 시작한 뒤 힘을 얻은 것이지, 힘이 생겨서 지구의 법칙을 바꾸기 시작한 건 나중이라는 나주연의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그 비틀렸다는 사람들. 이쪽으로 보내주시겠어요?]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나주연이 흐릿한 눈빛으로 요청했다.
[연구가 필요할 것 같은데 말이죠.]‧
‧
‧
흔히 이런 말이 있다. ‘지구가 멸망한다.’는 말.
하지만 정확하게 따져보자면 지구는 멸망하지 않는다. ‘인간이 멸망할 뿐’. 그리고 인간이 멸망한다는 뜻은.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문명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여러분은 보았습니다.”
캐나다 런던시 오래된 교회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도덕, 인권, 법, 질서, 문화, 예술 그 모든 것이 목숨보다 중요하던가요?”
영하 20~30도는 넘나드는 추위에 교회 곳곳에 세워 놓은 난방기가 빨갛게 달아올라 은은하게 빛났다.
“그 어떤 것도 구원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고 생존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홀리교를 믿었던 겁니다. 홀리교에 투신했던 겁니다.”
사람들은 단상에서 설교하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와 몸짓 그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중하고 있었다.
“···인류의 희망. 인류의 구원. 분명히 홀리교는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했고. 우리에게 삶의 희망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까?”
“이곳을 보십시오. 그 희망의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그 구원의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사내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그리고 공기가 조금씩 뜨거워졌다.
“인류의 구원과 인류의 생존을 위한다는 그가 한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수많은 목숨이 사라지는 동안 신의 대행자, 신의 화신, 구원자, 인도자라고 불린 성스러운 그라고 우리가 믿은 그가 한 일은. 나누고, 구분하고, 버리고,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믿는 자는 오라고 하여 오지 못한 사람, 올 수 없는 사람까지 믿지 않는 자로 만들어 버렸고. 자유를 원하는 자를 버림으로 이곳에 있는 우리는 자유를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과연 진정한 신의 대리인이자, 구원자입니까?”
사내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것은 열기였다.
“신께서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분이십니다. 그 어떤 종교도 인간을 버리라고 한 종교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스럽다는 홀리교를 국교로 하는 신성 왕국은 인간을 버리고, 포기하고, 심지어 사람들이 괴물에게 죽어감에도 방관만 했습니다.”
사람들의 열기 속에 분노가 녹아들기 시작했다.
“캐나다의 형제자매들이 죽어가는 동안 신성 왕국은 어떻게 했습니까? 난민들이 살려달라고 이곳으로 올 때, 우리의 가족, 친지들이 구원을 바랄 때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신성 왕국은 타락했습니다. 우리가 믿었던 구원자는 구원자가 아니라 학살자였던 것입니다.”
그 뜨거움 속에서 사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동물에게 인간 대접을 하고, 인공지능을 사람 취급하는 게 신의 뜻이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신께서는 그러라 하신 적 없습니다. 인간을 치유하고 인간을 지키고 인간을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
오오오오—-
“영혼이 고달프고 육체에 병이 있는 자들을 치료하라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은 가두고, 죽이고, 버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진정한 신앙은 치유의 신앙입니다. 갇힌 자를 풀어주고, 죽을 자를 살려주며, 버림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오오오오—-
“이제 나오십시오. 치유가 필요한 분.”
휠체어에 탄 사람이 단상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휠체어에 탄 중년 여성과 휠체어를 밀고 있는 딸로 보이는 여자에게 사내가 이것저것을 물었다.
언제부터 휠체어 신세를 졌는지.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는지.
10년 전 교통사고 때문에 하반신 마비가 됐다는 이야기를. 몇 차례의 수술로도 고쳐지지 않았으며 이혼했고 생활고로 딸과 살기 힘들었다는 한탄이 이어졌다.
은신한 채,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마루는 어이가 없었다.
이걸 믿는다고?
그냥 전형적인 사이비 아닌가?
무엇보다 휠체어 타고 나온 중년 여자가 하는 말이 압권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바이러스 사태가 터지고, 변이 괴수와 식인귀가 캐나다를 휩쓸고 갔다. 심지어 중국이 쏜 핵까지 떨어졌었다.
복합적인 결과로 캐나다 연방 정부가 무너지고 무정부 상태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이나 이어진 상황에서 휠체어 탄 모녀가 살아남을 확률은?
좋다. 살았다고 치자.
그 모녀가 다시 신성 왕국이 장악한 캐나다 런던까지 올 수 있을 확률은? 놈이 말한 대로 도덕이고 인륜이고 전부 박살 난 세상이라면 휠체어 모녀가 어떻게 살 수 있지?
조금만 의심을 해봐도 휠체어 여자의 이야기와 놈이 하는 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었다.
“이제 신께서 제게 임하신다는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설교하던 사내가 휠체어에 탄 중년 여성의 머리에 손을 대고 중얼중얼 기도하자, 유백색의 빛이 생기기 시작했다.
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 신비로운 유백색 빛에 오래된 교회가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일어나라!”
휠체어에 앉아있던 중년 여성이 벌떡 일어났다.
“치유의 은사를!”
“치유의 기적을!”
“신께서 이 자리에 임하셨도다!”
수천 명이 하나로 외치는 광경은 광기와도 비슷했다. 열기가 고조될수록 사내의 손에서 시작한 유백색 빛이 서서히 양팔과 상반신 그리고 머리까지 올라갔다.
정말 치유일까?
하반신 마비를 단숨에 치료할 수 있는 치유 능력이라고?
10년 넘게 휠체어 생활을 해서 근육이 전부 빠졌을 텐데. 바로 일어나서 멀쩡하게 걷는다고?
마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열광의 도가니였던 치유의 시간이 지나가고 사람들은 해산했다. 교회 밖에서는 도시를 떠나는 것을 권고하는 방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흥- 이번에도 버리겠다고 하는 건가?”
“구원은 개뿔이. 이게 구원이야?”
“언제까지 버리고 언제까지 이럴 생각인지.”
“바꿔야 해.”
“거짓 왕, 거짓된 선지자를 끌어내리고 진정한 왕을 세워야지.”
“잘 싸우고 잘 죽여서 왕이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어.”
“그래.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구원자가 할 일이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두런두런 떠들었다.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저택 발코니(balcony)에서 바라보는 사내와 비서였다.
“신성 왕국 국왕이 직접 온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괜찮지 않으면? 대놓고 날 죽이겠나? 날 믿는 사람들이 있고. 치유의 능력이 있는데?”
유백색의 빛을 뿜어내던 사내는 언제 정상으로 돌아왔는지, 반질반질 맑고 깨끗한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내가 죽거나 사라지면 저 어린 양들이 어떻게 할까? 응? 그들을 내쫓고 죽인다면? 내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되겠지.”
“위험합니다. 이제 능력을 각성하셨는데.”
비서의 말에 사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신의 은혜.”
“죄송합니다. 신께서 은혜를 내려주셨는데···.”
비서의 말을 끊은 사내의 차가운 목소리.
“신의 강림.”
“···예. 치유의 신께서 강림하···.”
비서가 침을 꿀꺽 삼키곤 말을 고쳤다. 그리고 두 사람이 있는 발코니 한쪽 공간이 일렁거렸다.
[궁금한데. 치유의 신이 정말 있다는 건가?]“?”
“누구냐!”
슈칵-
비서의 팔과 사내의 팔이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끄악!
헉!
[붙여봐.]빨리.
팔이 잘려 쇼크가 온 비서와는 달리, 사내는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팔을 어깨에 대고 치유를 외쳤다. 그와 동시에 유백색 빛이 손에서 피어오르며 잘린 팔이 달라붙는 모습.
사내는 보았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일렁이는 공간을 노려봤다.
[거기 그 사람 팔은 안 붙이나?]쇼크로 하얗게 질린 비서를 내려본 사내가 비서의 팔을 붙이며 말했다.
“너는 누구냐?”
[치유의 신이라.]마루의 담담한 태도에 사내가 준엄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치유의 기적을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구나.”
[일단. 한 번 더 보자.]뭐?
사내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것과 동시에
서걱- 서걱- 서거걱-
썰리는 소리가 들렸다.
쿵-
두 팔과 두 다리가 잘린 채. 몸통이 바닥에 떨어지는 충격.
[해봐.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