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892)
러스트 [RUST]-892
식인귀를 멀리서 추격하던 희연은 갑자기 흑마가 투레질하자 진정시켰다.
“왜?”
푸르릉-
“갑자기 사라졌다고? 흔적은?”
푸르르릉-
눈보라가 이렇게 치는데 흔적이 남았겠느냐는 푸르릉- 소리에 희연이 흑마의 옆구리를 박차(拍車)로 콕 찔렀다.
“방향이 어딘지는 기억하지? 마지막에 기척이 지워진 곳. 그쪽으로 가자.”
히이이잉-
얼마나 갔을까?
펑펑 내리다 못해 쏟아지는 눈보라 사이로 들리는 희미한 목소리.
“방금 들었어? 들었지?”
끄덕-
희연과 흑마는 숨죽이고 접근했다. 3개월이 넘도록 식인귀를 추적하면서 야영 실력과 기척 감추고 추적하는 능력만큼은 확실히 숙련된 둘이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린데.’
칼잡이 식인귀 목소리는 확실히 아닌 것 같고.
그래도 영하 20~30도에 눈보라까지 치는데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건 이상하긴 한데.
툭-
“두 사람?”
푸릉-
흑마가 고개를 휘휘 끄덕였다.
“알았어. 조용히. 살금살금 가자.”
푸르르-
그렇게 야금야금 거리를 좁히자 눈발에 반쯤 묻힌 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두 사람이 대화하는 소리였다. 그것도 둘 다 아는 목소리.
‘기순과 왕님?’
공식적으로는 폐하지만 애칭으로 왕님 또는 그분으로 불리는 마루였다. 기순의 이야기는 그녀도 계속 고민하는 바였다.
어쩌면 클론으로 부활한 자들이 안고 가야 할 천형(天刑)일지도 몰랐다. 지금처럼 변한 세상에서는 정말 중요한 문제가 될지 몰랐다.
희연은 링크를 이용해 자매들이 중간 기점에 잘 도착했는지 확인했다. 다들 문제없이 도착했고 보급까지 끝냈다는 감각이 이어졌다.
‘여기? 괜찮아.’
링크는 텔레파시라기보다는 거의 혼잣말과 느낌이 가까웠다. 양방향이 아니라 거의 한쪽이 일방적인.
‘올 필요 없어. 거기서 쉬고 있어.’
그렇기에 클론이라 하더라도 인격이 명확하면 인간으로 본다고 선언했지만, U+ 자매들은 그 대상이 되지 못했다. 반쯤은 생체 안드로이드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다들 인격이 발현되는 건 어렵겠지.’
희연은 가끔 나루즈가 떠올랐다. 부산스럽고, 정신없고, 조금은 미친년들 같지만. 그래도 완전히 미치지는 않았다. 거기에 특유의 복작거리는 분위기는 뭐라고 할까. 부럽다고 할까.
마루와 기순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무거운 주제였고, 어떻게 생각하면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이야기였다.
다만. 자신의 유전자와 똑같은 개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자신은 죽어도 된다는 건. 기분이 이상했다.
유 이사의 클론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은 유 이사가 아니라는 선언을 한 그녀였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흑마는 다른 것 같았다.
푸릉- 푸르릉
애들도 아니고 싸우네? 흑마가 코웃음 쳤다.
“싸우는 거 아니라니까.”
그리고 마루와 화면 속 기순의 시선이 그녀와 흑마를 향했다.
‧
‧
‧
마루의 눈빛은 멀리서 봤을 때는 인간의 눈빛이었지만 가까이서 봤을 때는 뭔가 좀 달랐다. 흑마는 말이었기에 그 차이를 더욱 극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인간을 먹는 인간과 싸우기를 수십 차례, 베테랑(veteran)이 된 흑마였기에 갈기에서 꼬리 끝까지 뻣뻣해지는 위기감에 투레질했다.
푸르릉-
도망치자.
흑마는 자기도 모르게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희연은 ‘얘가 왜 이래?’ 하는 표정으로 챙겨 놓은 당근을 흑마의 입에 물렸다.
오도독-오도독- 당근을 씹으며 마루의 눈치를 보는 흑마의 모습에 ‘얘가 무턱대고 이럴 애가 아닌데.’ 하는 생각에 희연도 살짝 긴장했다.
“식인귀를 추적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예? 네.”
바닥에 흩어진 고깃덩이들.
작게 토막 난 잔해와 내장 조각이 식인귀의 최후를 알려주고 있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데 방향 놓치지 않고 잘 추적했네.”
“아- 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할 상황인지, 분위기인지 모르겠지만. 희연은 자기도 모르게 감사인사를 했다. 무언가 그래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흑마에게 그 핏덩이가 들어갔다고 했지?”
“예? 네. 지금 관련 자료 전송하겠습니다.”
희연이 빠릿빠릿 대응했다. 이미 보고했던 영상에 덧붙여 조금 전 식인귀와 교전한 내용까지 추가로 첨부한 그녀였다.
공중에 둥둥 떠 있는 3D 모니터를 바라보던 마루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핏덩어리가 흑마의 상처에 달라붙은 장면과 식인귀가 흑마의 옆구리와 배를 찔러 난 상처에서 흐르던 핏방울이 촉수처럼 펼쳐진 부분을 보면서였다.
“피가 곧 생명이니. 피를 지배하는 자는 생명도 지배할 수 있다.”
“······.”
“놈의 교리는 흡혈귀가 한 말과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아. 캐나다 연맹을 지배하려고 한 흡혈귀에 대한 자료는 아직 보지 못했나?”
“결과만 전달받았습니다.”
마루의 시선이 흑마를 향하자, 오독-오도독- 당근을 씹던 소리가 뚝 끊겼다.
“흡혈귀의 피는 감염력이 약했지만, 사이비 놈의 피는 기생충처럼 영향력이 컸어.”
사이비 놈은 자신의 피를 사람들에게 나눴다. 놈의 피를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뽑아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거나, 회춘한다거나, 신체능력이 강해지는 등의 효과를 보게 됐다.
결과적으로 올드 이스트 빌리지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일반인보다 강한 생명력을 갖게 됐고 타인의 생명력을 갈취하는데 양심의 가책을 갖지 않았다.
종말의 세계에서 양심과 도덕을 지키는 자들이 드문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산 사람을 제물로 해 생피를 뽑는 걸 열광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그랬다.
어째서 그랬을까?
하나같이 광기에 빠져 산 제물을 찾아다닌 이유가 뭘까?
혹시 기생충 같은 놈의 피가 사람들의 성격을 변화시킨 것이 아닐까?
기생충에 감염된 숙주의 행동이나 태도, 성격이 바뀌는 건 생각보다 흔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어떤 기생충에 감염되면, 자기도 모르게 기생충 숙주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되어 먹이를 가져다주게 된다거나. 기생충의 숙주를 지키기 위해 대신 싸우기도 하는 등의 행동을 하기도 했다.
증세는 점점 심해져, 월급 대부분을 기생충의 숙주를 위해 쓰고 나중에는 기생충의 숙주를 모으고 번식시키는데 자신의 인생을 갈아 넣게 된다는 이야기.
과학적 증거가 빈약하다며 도시 전설 취급받던 이야기지만, 지금은 과학을 넘어선 무언가가 실제로 현현하는 세상이었으니. 마냥 ‘아니다. 그럴 리 없다.’고 단정하긴 어려웠다.
사이비 놈의 핏물이 기생충처럼 감염성을 가진 핏물이라면?
그래서 흑마가 나중에는 기생충 같은 피를 퍼뜨리고, 그 피에 감염된 것들이 숙주인 흑마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게 될지도 모른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마루의 서늘한 눈빛이 희연을 향해 물었다. 갑자기 딸꾹질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은 희연이 목소리를 쥐어짰다.
“저. 정밀 검사를 해야겠죠.”
“굳이 정밀 검사를 하고 어쩌고 여지를 줄 필요가 있을까?”
‘깔끔하게 처분하고 클론으로 새로 뽑는 게 낫지 않겠어?’하는 듯한 마루의 눈빛에 희연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전우잖아요.”
“전우라.”
‘기생충에 감염된 전우라.’ 마루의 혼잣말에 희연이 호소했다.
“제어할 방법을 찾을지도 모르잖아요. 피 능력은 좋은 능력이고. 그걸 잘 다룰 수만 있다면···.”
“네 뜻이 그렇다니 알겠다.”
마루의 ‘알겠다.’는 말 뒤에 함축된 의미. ‘안다면 그 책임도 너에게 있다.’는 뜻이라는 걸 희연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리고 이어진 끔찍한 살기? 죽음의 공포?
희연의 몸뚱이는 유 이사와 여러 전문가의 경험에 따라 다람쥐처럼 반응했다. 실로 인간의 한계에 달한 움직임이었지만, 죽음의 넝쿨을 완전히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이프를 휘감은 죽음의 넝쿨이 그녀의 허벅지를 쓸고 지나갔다. 왈칵- 피가 튀며, 스쳐 지나간 죽음에 희연의 다리가 풀려버렸다.
철퍽-
주저앉은 그녀가 허망한 얼굴로 마루를 바라봤다. 놀랍도록 담담한 표정의 마루의 시선이 향한 곳은 흑마였다.
히이이잉-
죽음의 넝쿨이 희연을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반응한 흑마의 몸엔 굵직한 상처가 쩍 벌어져 있었다. 쫙- 벌어진 상처에서 핏물이 차올라 붉은 촉수를 만들어내는 모습.
죽음의 넝쿨에 대항하듯 붉은 피의 촉수가 사방으로 휘둘러졌다.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죽음의 넝쿨과 엮이는 순간 생명력을 잃고 무너지는 형태.
죽음에 닿은 핏방울은 검붉게 변하다 못해 피딱지나 피 찌꺼기 흔적이 됐다. 그렇게 순식간에 흑마의 생명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죽는다?
살고 싶어.
피가 모자라.
죽을 수 없어.
생명이 모자라.
피가 필요해.
살고 싶어.
생명이 필요해.
살고 싶어.
피. 피. 피.
생명이···.
흑마가 싱싱한 피 냄새를 맡았다. 흑마 눈에 들어온 것은 허벅지에 상처를 입고 쓰러진 인간 암컷의 모습.
피다.
생명이다.
흑마의 상처에서 돋은 붉은 촉수가 피를 탐하려, 생명을 향해 쭉 뻗어 나갔다.
“안 돼!”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인간 암컷의 모습이 파트너의 모습으로 변했다. 정신이 번쩍 든 흑마가 뻗어 나간 핏줄기를 틀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강인했던 근육이 언제 말라비틀어졌는지 힘이 없었다. 몸을 반이나 돌리고 나서야 희연을 향해 뻗어가던 피의 촉수가 힘을 잃었다.
머릿속을 웅웅- 울리는 갈망.
싱싱한 생명과 피 대한 갈증.
흑마는 머리를 흔들며 크게 울부짖었다.
히이이이이이이잉—
길고 긴소리를 끝으로 털썩- 쓰러지는 흑마의 눈에 보인 건. 허벅지에 피를 철철 흘리며 자신을 향해 기어오는 파트너의 모습이었다.
푸-푸르르-
‘오지 마.’
바싹 말라버린 흑마는 더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지켜보던 마루가 판결을 내렸다.
합격은 아니고···.
“흠- 유예.”
[악마냐?]기순의 목소리가 톡 튀었다.
‧
‧
‧
마루의 판단은 냉정했다.
[악마냐?]“악마는 무슨.”
흑마 새끼 처음에는 분명 눈 돌아갔었다. 희연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듯이 보였지만···. 그것도 전부 지켜보고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지 않을까?
“지켜보는 눈이 있어서 저렇게 끝난 거지. 없었다고 가정해봐라. 그래도 좋게 끝났을까?”
[······.]인간이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판국에 말이 사람의 생명과 피를 탐하지 않을 것이라 단언하긴 어려웠다.
“그리고 흑마 놈. 싸우려고 했어.”
[······.]마루의 이야기에 기순이 생각에 잠겼다.
“죽음에 저항하려고 했다는 게 더 정확한 느낌이긴 하지만···. 어쨌든.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죽음의 신이니 어쩌니 그러지 않았다는 것부터 따져보는 게 좋겠지.”
그게 흑마 특유의 성격인지 아니면 피 기생충 때문인지 확인하는 것부터.
[그래서 언제까지 지켜보려고?]“수상도시로 이전하기 전까지.”
그동안은 같이 다니면서 지켜봐야겠어.
“얘들 데리고 내려 갔다 오마.”
[제대로 된 밥 먹고 쉬었다가 가라니까? 깡통만 먹지 말고.]식인귀를 보낸 놈이 현재 이곳의 상황을 알아챘을 가능성은 없었다. 머리통과 상반신 일부가 살았으니 죽으면서 상위 개체에 전하는 건 쓰지 못했을 테니까.
“놈들이 위화감을 느끼기 전에 싹 쓸어버려야 해.”
[하-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하겠다고?]뽑은 정보가 싱싱할 때 한시라도 빨리 가는 게 맞았다.
“어.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잔소리 그만해라.”
[잔소리는 무슨···. U+ 전원 같이 갈 거지? 보급선 바로 보낼 테니까. 그거 받고 가라.]희연과 흑마의 상처를 치료한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
칼잡이 식인귀를 보낸 놈은 캔자스 주에 있는 흡혈귀였다.
12 귀족이라 칭하는 흡혈귀 가운데 하나였고 상당히 독특한 지배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독특한 지배력이라.’
능력을 각성하는 것은 오직 능력자뿐. 식인귀와 흡혈귀는 다양한 능력을 각성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세상의 규칙이 변하면서 식인귀나 흡혈귀도 일종의 능력을 각성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자유 캐나다 연맹을 장악하려 했던 흡혈귀 백작. 놈은 흡혈귀라는 명칭답게 피를 움직이는 능력이 생겼다. 사람들의 생각과 명칭, 지칭이 현실에 영향을 주는 세상.
‘매력적인 흡혈귀라.’
백색의 유려한 비행선이 남쪽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