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920)
러스트 [RUST]-920
필리핀에서 성자와 성모가 등장했다는 이야기에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니.
웃을 수 없었다.
당장 중국 난민 사태를 단숨에 종식 시켜버린 신성 왕국 국왕이라는 존재를 두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
“······.”
“······.”
단순히 죽음을 몰고 다니는 능력이라고 이해하기엔 너무나 이질적인 힘. 마치 존재 자체가 죽음과 닿아있는 듯한 괴이함은 한국 정부와 의원들의 머릿속에 깊게 박혀있었다.
“그들의 능력이 뭡니까?”
그렇기에 정보국 요원이 보내온 보고서를 허투루 볼 수 없었다.
“반군 쪽에 있는 성자가 있어서 원숭이의 저주를 풀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숭이의 저주요?”
“필리핀 쪽에 몇몇 부족에서는 저주 원숭이라는 설화가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 그거- 저도 들어봤습니다.”
“원숭이가 저주를 내렸다거나, 주술사가 원숭이를 이용해서 저주한다는 내용입니다.”
“인도네시아와 태국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지요.”
“정확하게 어떤 저주인지도 나왔습니까?”
“예. 죽음의 저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원숭이가 죽음의 저주를 내렸고 그걸 반군의 성자가 없앴다는 건가요?”
“보고대로라면 그렇습니다.”
원숭이의 저주에 걸리면 팔이나 정강이, 목과 같은 곳에 원숭이가 움켜쥔 것 같은 형태의 멍이 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붉은 손자국 같은 멍이지만 서서히 손가락 하나씩 검은 멍으로 변하고 다섯 개의 손가락이 전부 검게 변하면 죽음에 이르는 저주였다.
“하루에 하나씩 손가락 멍이 검게 변하고 다섯 개의 손가락이 전부 검게 변하는 5일이 지나면 죽는다고 합니다.”
“죽음의 저주라.”
“멍이 검은색이군요.”
일반적으로 본다면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장‧차관급 인사들과 의원들 모두 생각에 잠겼다. 생명을 거두고 스스로 확장하는 죽음의 정원도 있는 마당에 저주 원숭이도 있을 수 있겠지.
“신성 왕국 국왕에게 저주가 걸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주에 걸리기나 하겠습니까?”
“죽음의 신이니 공포의 군주니 하는 자인데.”
“모를 일이지요.”
“죽음에 이르는 저주니까 모르지.”
“저주를 어떻게 거는지 정보가 있습니까?”
“멀리서 저주를 걸 수 있는가요?”
“저주의 메커니즘을 분석할 수 있다면 굉장히 유용할 겁니다.”
“반드시 저주와 관련된 자료와 증거를 확보해야 합니다.”
순식간에 대회의장이 웅성거렸다.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논의하도록 합시다.”
대통령이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성자는 죽음의 저주를 풀었다고 했으니 됐고. 성녀는 어떤 능력입니까?”
“정부군에 있는 성녀가 내장과 골수가 드러날 정도로 치명상을 입은 사람을 살렸다는 소문입니다.”
“치유 능력이라. 성자는 저주를 푸는 능력이고 성녀는 치유 능력이라. 둘 다 직관적인 능력에, 여론을 움직이기 좋은 능력이군요.”
“예. 그래서 반군과 정부군이 팽팽하게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필리핀 반군은 정규군 비해 압도적으로 열세였다. 중국이 몰래 반군을 지원했지만, 7개의 중국으로 쪼개진 뒤로는 턱없이 부족한 지원만 있었다.
그렇게 밀리나 싶었던 찰나, 성자가 등장한 것. 지금까지는 저주를 없애는 능력만 보고됐지만, 그 이상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필리핀은 정보를 더 확보한 뒤에 결정하는 것으로 하지요. 인도네시아로 넘어갑시다.”
“인도네시아에도 이상한 소문들이 나돌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도 초현실적인 소문입니까?”
“예.”
필리핀도 그렇고 인도네시아도 아직 부족 간에 차이가 있었다.
심지어 언어와 문화가 혼재된 지역도 있었고 토속 종교와 외래 종교가 뒤섞인 지역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뒤섞임이 복잡한 문제를 일으킨 상황이었다.
“인도네시아는 수니(sunni)파 이슬람이 다수입니다.”
“이슬람이라.”
대재난 이전에도 종교 갈등이 심했는데, 대재난 이후로는 유혈 사태와 방화까지 터졌다. 불교의 사찰, 가톨릭의 성당, 개신교 교회가 불길에 휩싸였고, 이런 폭력 사태가 사실상 인도네시아 전 지역에서 일어났다.
“위험한 종교지요.”
“식인귀 정권이 잘한 부분이 있다면, 이슬람을 물리적으로 정리한 겁니다.”
안타깝지만 역사적으로 통계적으로 본다면 그랬다. 이슬람 신도들의 숫자가 적을 때는 대부분 얌전한 이방인, 착한 종교인, 관용적인 지성인의 행동을 한다.
하지만 모스크가 들어서고 이슬람 인구가 늘기 시작하면, 이슬람인이 많이 모인 지역에서 자기들의 샤리아대로 자치하겠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샤리아(شَرِيعَة)란 이슬람교의 율법이며 동시에 사회 규범(規範)을 뜻한다. 그리고 샤리아대로 한다는 이야기는 먹은 음식에서부터 삶에 이르기까지 이슬람식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민을 왔으면서, 이민 온 나라의 문화에 동화되고 나라의 법을 준수하지 않고 이슬람식으로 하겠다는 건 뭘까?
문제는 거기서 이슬람 사람들이 더 늘어날 경우, 거의 필연적으로 폭력 사태가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신문이나 소설에서 이슬람을 풍자하거나 비판하면, 이슬람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기자나 작가, 신문사와 출판사에 테러했다. 심한 경우 사람이 죽기까지 했다.
“프랑스에서 참수 테러가 벌어졌었죠.”
“독일에서는 방화 사건이 있었고요.”
“영국에서는 폭탄 테러가 있었는데···.”
실제로 이슬람 난민을 받아들인 유럽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한 개인이나 일부 집단의 일탈이라고 하기엔 사례가 많았고, 대재난 이후 이슬람 난민들과 사실상 내전이 터진 일을 달리 해석하긴 어려웠다.
“인도네시아 이슬람교도들이 다른 종교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이 워낙 소수라 열세였지만, 현재는 축복을 받았다는 자들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축복이요?”
“네. 보고서에는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신이 응답했다는 말입니까?”
“그런 내용은 없지만, 능력자들이 능력을 각성한 것과는 결이 다른 힘이라고 했습니다.”
“결이 다르다?”
질이 다르다는 것일까?
순식간에 대회장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사이비 종교가 세력을 급격히 확장할 수 있는 이유가 ‘축복’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신적인 존재에게 실질적인 축복을 받았다면 그들을 사이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축복을 받지 못한 기성 종교가 문제가 아니고요?”
“축복이 신의 응답이라고 가정한다면, 사이비라는 명분으로 축복받은 자들을 처리한 신성 왕국 국왕은···.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제거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억측입니다.”
“억측이 아니라 일리 있는 말입니다. 자신의 경쟁자가 성장하기 전 미리 죽였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필리핀에서 ‘축복’받은 성자와 성녀의 이야기는 다른 쪽으로 불이 붙었다. 신성 왕국 국왕이 어째서 그렇게 움직였는지에 대한 분석과 상상이 들불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파편화된 정보들이 추가로 쌓이면 쌓일수록 마루의 행동 방식 가운데 이상한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확실한 건. 그가 사이비 종교나 이단이라고 부를 단체의 교주를 용납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것도 기적이나 능력을 발현했다는 곳은 밀어버렸더군요.”
“기흥-평택을 구조하는 것보다 부산 인근 해안 컨테이너선에 있는 괴물에게 먼저 갔습니다.:
“괴물에게도 뭔가 비밀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생방송으로 모든 정보를 공개한 것 같지만, 그게 아니었다. 행동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면. 목적은 숨기고 수단만 보여준 꼴이니까.
“최소한 그 존재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추가로 교섭할 수 있고. 그래야 남방 작전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테니까요.”
장‧차관과 의원들이 대통령의 의견에 동의했다. 각자 여러 가지 생각을 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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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간의 침묵 끝에 마루가 말했다.
“선택은 내가 하는 거다?”
“······.”
“그랬지···. 그랬는데. 기순아. 그 능력 나한테 써봐라.”
말을 중간에 끊은 마루가 기순에게 ‘감정’ 능력을 사용하라고 했다. 기순의 실눈이 마루를 향했다. 약간의 분노와 착잡함. 그리고 실망이라고 해야 하나? 옅은 감정의 색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네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꺼냈다니까. 나도 그러자.”
“······.”
“난 죽음을 다룰 수 있는 걸 감추자는 쪽이었다.”
백작을 잡았을 때도 그렇고 죽음의 정원을 사용했을 땐 증인과 증거를 남기지 않았었다. 그랬던 것을 한국을 지원하기로 하면서 공개했다.
‘능력을 감추기보다, 신성을 많이 얻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기순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조언이라면 듣고 판단할 수 있다.
그 결과 한국에서 능력을 공개했음에도 예상보다 훨씬 적은 신앙이 모였다. 하던 대로 하기만 하면 신앙이 넝쿨째 들어올 것 같다더니 아니었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부담됐을 수도 있겠지.
본래 조언자의 자리는 그런 부담을 안고 가야 하는 거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이야기한다면 그걸 조언이라고 할 수 있겠냐?”
누군가는 성격과 상황까지 분석한 조언이라고 할지 몰랐다. 그래 조언이라고 하면 조언일 수도 있겠고.
하지만 동남아 건에 대해서는 조언이라기보다, 잘 짜인 상황처럼 느껴진다는 게 문제였다. 사실 여부는 그렇다고 치고.
“그래서 기분이 별로다.”
“미안. 쏘리.”
기순은 깔끔하게 사과했다.
한국 정부의 움직임을 예측한 건 사실이었고. 동남아에 엮이면 한국군에 지옥이 펼쳐질 것도 예상했다.
동남아에 관여하면 할수록 한국군과 한국 정부는 마루를 향해 애원할 수밖에 터. 그 과정에서 신앙이 생기리라 생각한 것도 맞았다. 이 사실을 말하면 마루가 움직일 거라는 것까지.
예측한 것을 바탕으로 조언한 것으로 볼 수도. 아니면 판을 짜 놓고 특정한 반응을 유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기순은 사과했다.
자기 관점에서 조언이라고 해도, 상대방이 느끼고 받아들이기에 판을 짠 것 같다면. 그 순간 조언이 아닐 테니까.
“일부러 유도한 건 아니었다.”
“지랄. 그런데 세계 순방일정까지 나오냐?”
“어차피 도는 거 한 바퀴 돌아서 시간 벌어두는 게 효과적이니까. 진짜로 세계를 한 번 돌자는 건 조금 전 생각한 거다. 그렇잖아.”
“뭘 그래?”
“네가 동남아 진출에 관여해서 한국군과 동남아 사람들의 신앙을 받게 된다면, 신앙이 쌓였을 때 한 번 도는 게 맞지. 그냥 다른 애들이 신앙 쌓게 그냥 둘 건 아니잖아. 아니야?”
“거기서부터 문제야.”
마루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음의 정원을 펼치면 누구든 죽는다고 봐야 해.”
일단 펼치면 영역 안에 있는 생명체는 죽는다는 걸 전제로 한 능력. 따지고 보면 능력이라기보다 일종의 권능에 가까운 힘이지만, 어쨌든 그 근본은 죽음이었다.
“결과만 본다면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얻는 신앙이라는 소리지.”
그래서 PD가 ‘죽음의 신.’, ‘공포의 군주.’를 이야기했던 것이고.
“네 생각도 거기에 기반을 둔 거지. 그게 옳다 그르다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다만.”
마루는 죽음을 통해 신앙을 얻는 것에 대해 딱히 싫어하거나 반대하는 건 아니었다.
쥐 떼를 수십만 단위로 죽여서 얻은 신앙도 있는 판국에, 죽음이 신앙을 만든다는 걸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죽음이 필요한 상황을 만들고, 죽음을 통해서 신앙을 얻으려고 한다면 공공의 적이 될지도 모른다. 그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죽음을 통해서 얻는 신앙은 필연적으로 경계 받게 될 것이고 최악에는 모두를 적으로 두게 될지도 모른다는 게 마루의 판단이었다.
기순의 말대로 간다면, 다량의 사상자가 생긴 뒤에야 한국군은 마루를 떠올리고 애원할 것이다. 구원해 달라고. 살려달라며.
그렇게 죽음의 정원으로 적을 밀어버리고 나면, 신앙이 들어오겠지.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의 가족이나 친구들은 뭐라 생각할까?
한국군을 공격해 다 이겼다가 마루의 죽음에 쓸려버린 적들은 어떤 판단을 하고.
병사들의 손실도 손실이지만, 생존한 병사들이 맹목적으로 신성 왕국 국왕을 따르기 시작한다면 한국 정부는 어떻게 생각할까?
마루가 추구하는 것은 생존과 안전이었다.
죽음을 펼쳐 동남아에 개입하는 게, 정말 생존과 안전에 유리한 걸까?
“······.”
“······.”
보조 인공지능의 보고에 기순의 실눈이 실룩였다.
‘아- 꼬였네.’
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