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943)
러스트 [RUST]-943
세 곳을 동시에 공격하기로 했기에 마루는 교토와 오사카 사이에 있는 거점으로 향했다. 규슈는 기순이 맡기로 했고 홋카이도는 로이 스턴이 지휘했다.
‘극과 극은 오히려 통할 수 있다.’
그렇기에 마루는 기순에게 기준을 잡으라고 말했다. 부활(?)한 뒤의 기순은 확실히 예전의 기순과는 달랐다.
과도하게 인간성에 집착하거나 그에 대한 반동인 것처럼 인간을 대상화하거나. 그때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지만 불안함이 언뜻언뜻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마루가 보기엔 기순이 가진 속내가 드러난 것일 뿐이더라도 기순 스스로는 생각이 변하는 것마저 자괴감이 드는 것 같았다.
‘인공지능을 제한하자는 의견도 그렇겠지.’
마루가 보기엔 인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두 사람은 인공지능의 권한을 제한해야 한다고 보였다.
하지만 신성 왕국의 인공지능은 이미 신앙을 만들 정도로 자아와 의식을 가진 존재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기순과 PD는 인간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인공지능에 인간과 같은 권리를 주는 순간, 작은 균열로도 인간사회가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작은 균열. 해킹 능력자나 인공지능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자, 전자전 가능한 능력이 나온다면 인공지능은 완전히 무력화될 수 있다는 논리.
마루가 보기엔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인공지능보다 인간이 더 취약한 존재였다. 식인귀나 흡혈귀의 지배력과 아우라에 예속되기 쉬운 존재.
전자전 가능한 능력은 극소수였지만, 식인귀나 흡혈귀는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이 더 보안에 취약하지 않을까?
정신계 공격. 지배력에 언제든 세뇌되고 자발적으로 추종자가 되길 선택하는 인간에 비해 인공지능이 더 신뢰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끊은 마루가 뉴클립스의 손잡이를 쥐었다. ‘나는 칼이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칼일 따름이오.’를 주장하고 있는 뉴클립스를 뽑았다.
스르르르르-
깔끔하게 뽑힌 뉴클립스가 얌전한 자태를 뽐냈다.
팅-
손가락으로 칼날 튕기자.
이이이이잉-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날카로운 울림과 떨리는 진동이 마루의 호흡과 뒤섞였다.
후—-
역시 칼을 뽑으니 복잡했던 생각이 가라앉는 느낌.
혼자만이라면 식인귀건 흡혈귀건 놈들이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그냥 지나갈 수 있었다. 놈들의 지배력이나 아우라, 정신계 능력은 자신에게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놈들이 주변 사람들을 지배한다면?
주변인을 인질로 삼아 얽어매려고 한다면?
분명히 그럴 것이다.
틈을 준다면 반드시.
이제껏 놈들을 지켜본 바 그랬다.
식인귀는 대안이 있음에도 식인을 멈추지 않았고, 흡혈귀도 마찬가지였다.
더 큰 권력.
더 강한 힘에의 의지.
놈들은 인간에게서 욕망을 극대화한 존재였다.
그런 놈들이 평화나 공생을 말한다고 의미 있을까?
놈들이 무슨 소리를 하건 소용없었다.
개소리일 게 분명했으니까.
‘너도 알잖냐.’
마루는 규슈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순이 담당하기로 한 방향이었다.
‧
‧
‧
인간에 대한 믿음은 불완전한 믿음일 수밖에 없다.
불완전하기에 선택과 신념이 필요했다.
인간을 믿는다는 선택.
인간을 믿겠다는 신념.
기순은 회색빛 풍경을 바라봤다.
“······.”
모든 것은 회색빛 진창이었다.
산과 들, 무너진 도시와 마을 그리고 기억까지.
기순은 마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선택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믿음이 현실에 영향을 주는 세상.
신앙이 실제적 힘이 되는 세계에서 친구는 인간을 초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을 초월한 마루가 인간을 불신하게 된다면?
인간보다 인공지능을 더 신뢰하게 된다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 걸까?
어쩌면 자기기만일지 몰랐다.
배다른 형제라지만 그래도 형제일진대 죽이려고 했던 것이 가족이라는 인간이었고. 자기를 죽이려고 한 형제를 용서하라고 한 부친은 어쩌면 자신보다 그들이 더 소중했기 때문일지 몰랐다.
다만, 복수를 선택한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친구조차.
기순이 계승 전쟁을 포기했던 이유 중 하나가 싸움을 선택하는 순간, 마루까지 휘말릴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재벌의 승계 싸움이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싸움. 그 더러운 진창에 친구와 그 가정이 엮이는 걸 원하지 않았다.
배다른 동생을 계곡에 담가버린 자들이 죽이려고 한 동생을 구한 친구를 어떻게 할까? 그 친구의 집을 어떻게 할까?
그렇지 않아도 망해버린 친구네 집이 거기에 엮인다면? 더러워도 아주 더럽게 엮일 가능성이 컸으니까.
그래서 기순은 부친의 유언을 이용해 승계 싸움에서 깔끔하게 빠졌다.
그럼 당시의 선택을 후회하느냐?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다.
다만 죽음의 위기와 복수. 복수의 포기는 기순의 마음에 화인처럼 남았다.
인간이란 돈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가족까지 죽이려는 존재.
또 인간이란 친구를 위해 아무 대가 없이 목숨을 거는 존재.
어린 시절 기순에게 인간이란 모순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순은 인간을 긍정적인 존재로 ‘믿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인간은 지킬 필요가 있는 존재라고 ‘믿었다.’
인간이란 선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고 ‘믿었다.’
그건 실로 믿음의 영역이었다.
기순이 겪은 경험 속 인간은 극소수를 빼곤 대부분 버러지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건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사랑인지 아니면 약물이나 호르몬 작용의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기순의 사랑은 그랬다.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고. 참고 인내하는 것이 사랑이었다. 사랑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할 수 있는 무엇이라고 믿었다.
하물며 친구의 여동생이니 더욱 그랬다. 믿을 수 있는 친구의 여동생과 결혼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
하지만
누구에게는 전부지만, 다른 누구에겐 그저 지겨움일 수 있는 것.
어떤 사람에게는 진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짜증일 수 있는 것.
인간에서 살짝 벗어난 경험이 있는 기순이었기에 그 차이를 더욱 잘 느낄 수 있었다.
기순의 사랑은 덧없이 끝나버렸다.
그렇게 자신은 죽었고 클론으로 부활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단 한 명이라고 생각했던 여인이 천 명이 넘는 클론으로 살아났다. 클론으로 만들 때 사랑의 기억을 주입한다면, 원하는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
얼마나 덧없는 사랑이란 말인가?
얼마나 허무한 인간이란 말인가?
그렇기에 인공지능을 제한해야 한다고 한 기순의 선택은 모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 중심적으로 인권을 지키려고 한 행동이 이율배반적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건 인간에 대한 선택의 영역. 믿음의 영역이었으니까. 그래서 기순은 이번 흡혈귀의 기억과 행동에 영향을 받았다.
믿음과 신앙 때문에라도 인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자신과 식육과 혈액 공급을 위해서라도 인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도망칠 기회가 있음에도 끝까지 싸운 그들.
도망칠 수 있음에도 자폭을 선택한 불꽃 여자를 보면 인간답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수상 도시와 성층권 콜로니를 통해 비대칭 상황을 만들려고 한다지만, 비대칭 상황이 얼마나 갈까?
냉전시대 개발 경쟁이 터진 것처럼. 이쪽이 비대칭 상황을 만들면 저쪽도 그에 상응하는 발전을 할 터. 끝없는 경쟁과 소모전이 계속될 것이다.
그 전쟁 가운데 누군가 죽는다면?
마루가 그들을 죽인 것처럼 그들이 이쪽의 누군가를 죽인다면 어떻게 될까?
김 양이나 간호사, 후드, PD가 죽게 된다면 마루는 어떻게 할까?
복수를 포기하고 생존과 안전을 위해 성층권으로 떠나는 것에 집중할까?
아니면 복수를 선택해 전쟁에 집중할까?
어느 쪽을 선택하건 좋지 않겠지.
최고위급이 스스로 자폭할 정도라면, 놈들 또한 신념이 있을 터. 기순은 정신파 대응 장치가 달린 허리띠를 살폈다.
어차피 신성 왕국은 성층권으로 넘어갈 테고 이후 우주로 진출할 터. 서로 죽고 죽이고 끝까지 물고 늘어질 필요는 없었다.
손바닥 반 만한 정신파 대응 장비 옆에는 조그만 핵 수류탄이 달려있었다.
‧
‧
‧
홋카이도 남단.
전고 5m가 넘는 기갑병이 얼음으로 덮인 들판을 헤집고 있었다.
기이이잉-
7m에서 8m 가까이 쌓인 눈을 뚫고 전진하는 인간형 로봇은 거침없었다.
[칙- 대령님. 바닥에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삑- 물이 흐른다고?] [예. 지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정지.]로이 스턴은 행군을 멈췄다. 눈과 얼음으로 깔린 바닥 아래 물이 흐른다면 위험했기 때문.
[정찰병을 보내서 지반이 단단한 곳을 찾도록 한다. 작전 지역을 우회해도 상관없다.] [옛.] [현재 위치에서 대기. 휴식한다.] [휴식이다. 경계 시작해!]일본 혼슈와는 다르게 홋카이도의 화산 분화는 멈춘 상태였다. 화산 분화가 멎었으니 화산재와 먼지만 가라앉으면 그만이었는데, 이상하게 화산재와 먼지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전자장비는 오류가 잦았고 센서도 오작동이 심했다. 도쿄 인근과 비교해 가시거리가 길다고 해도 150m를 넘지 않는 열악한 상황.
화산재와 먼지 때문에 비행선의 지원은 어려웠고 까마귀 항공대의 공중지원도 제한적이었기에 경계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벙커 펼쳐.] [기관포대 설치.]기갑병과 노심 아머, 보급 장갑차로 구성된 로이 스턴의 부대는 임시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도고 섬 전투에서 강하부대가 벙커를 전개하지도 못하고 두들겨 맞은 경험이 있었기에, 벙커 설치하고 진지를 건설하는 건 거의 반사적인 작업이 됐다.
[벙커 전개 끝났습니다.] [기관포대 설치 완료.] [경계병?] [이상 없습니다.] [정찰팀은 반경 4km까지 확인한다.] [식사 후 교대로 낮잠을 잔다.]로이 스턴은 틈이 날 때마다 잠을 재웠다.
[최소한 2시간은 잘 수 있도록 해. 정찰대가 늦으면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한다.]식인귀 거점을 급습하는 작전임에도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도고 섬의 방어태세를 봤을 때 무조건 급습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놈들을 최대한 많이 끌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강하부대가 당한 이유는 놈들이 함정을 파놓은 걸 몰랐기 때문이었다.
‘방어선을 약화하는 게 먼저야.’
지도상 놈들의 거점은 50km 안쪽에 있었다. 정보에 의하면 놈들의 주력은 변이 괴수를 조종하는 부대였다. 그래서 기갑병과 노심 아머 위주의 병력으로 이곳을 담당하게 된 것이었다.
[어느 정도 수준으로 통제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변이 괴수는 괴수. 아무리 통제한다고 해도 놈들의 본성을 완벽히 통제하긴 어려울 겁니다.]싱싱한 피와 고기를 미끼로 삼는다면 잠시나마 통제를 흐트러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의견이 나왔다.
[변이 괴수보다 후방에 있는 식인귀를 노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조종하는 놈을 습격하면 변이 괴수를 퇴각시켜 막으려고 할 테니, 그 틈을 타서 공격한다면 어떨까요?]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속에 정찰대가 적의 거점을 확인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놈들의 거점이 있는 장소는 정보와 일치했다. 적들의 방어태세가 정보보다 더 단단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유인작전을 시작한다.]목표지점까지 적을 유인 타격한다는 작전이었는데, 놈들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신을 움츠린 거북이처럼 대응하지 않은 것.
적의 거점을 장악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는 게 중요했는데, 놈들이 이렇게 방어만 한다면 좋지 않았다. 방어선이 뚫릴 조짐이 보인다면 정보를 파기할 테니까.
적들이 정보를 파기할 것이 두려워 시간을 끄는 것도 아니었다. 놈들은 변이 괴수를 조종할 수 있는 자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변이 괴수를 많이 끌고 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로이 스턴은 결정을 내렸다.
[총공격한다.]기갑병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돌파하기 시작한 로이 스턴의 부대였다.
[돌파!] [방패 들어!] [유선 로봇부터 전진시켜!]길게 전선을 매단 로봇이 20mm 기관포를 쏘며 맹렬히 전진했다. 그리고 이어진 폭발.
[지뢰입니다!]로봇이 남긴 흔적을 따라 기갑병이 방패를 앞세우고 전진했다.
[변이 괴수 확인!] [변이 괴수 무리가 후방을 향해 접근 중.]로이 스턴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놈들이 저렇게 달려든다는 건, 이젠 지뢰가 없다는 뜻이다. 돌격!]기갑병이 후방을 노리는 변이 괴수를 향해 철퇴와 도끼, 30mm 기관포로 응대했다.
쿠워어어어어-
강철 헬멧과 갑옷을 걸친 변이 곰이 울부짖었다. 피어가 섞인 울음이었지만, 정신계 대응 장비를 장착한 기갑병과 노심 아머엔 소용없었다.
콰직- 콰드드등-
두 발로 섰을 때 6m가 넘어가는 거대한 곰과 전고 5m가 넘는 기갑병이 충돌하자, 축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뼈가 꺾이고 피가 튀는 소리. 강철 장갑이 으깨지는 소리가 뒤섞였다.
팽팽한 싸움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갑자기 놈들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놈들이 도망칩니다.] [추격하지 마. 우리 목표는 놈들의 거점이다.]함정일 가능성이 있었다. 놈들이 도망치면 거점을 공격하면 그만.
로이 스턴은 부대를 추슬러 바로 거점을 공략했다.
그럴 리가.
안으로 끌어들여 자폭하려는 걸까?
로이 스턴은 정찰대를 들여보냈다.
[함정 흔적 없습니다.] [자폭장치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방어전을 포기하고 거점을 버렸다고?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