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960)
러스트 [RUST]-960화
마루의 등장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장렬하게(?) 기절한 나루즈가 눈을 뜨자 보인 것은 동그랗게 둘러 모인 자매들이었다.
“깼다.”
“깼어.”
“오- 기분 좋았나 봐.”
“좋은 꿈 꿨니?”
그러고 보니까 미친년들.
“뿌리가 달라붙었는데 오라버니만 보고 있었지! 그치? 그렇지? 맞지?”
침상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버럭! 사자후를 내뿜는 그녀에게 현장 촬영분을 바로 틀어주는 나루즈.
“우리가 그랬으면 오라버니가 가만히 있었겠냐?”
“뭔 미친 소리야.”
“다들 걱정하고 있었다고.”
“오라버니께서 오시자마자 너한테 데려간 게 우린걸.”
“내가 뭐라고 했어? 깨자마자 헛소리하는 거 봐라.”
아니 진짜로 무서웠다고.
“······.”
“울겠다.”
“이미 우는걸?”
“극혐.”
“본체년 성격 나오는 거 아니야?”
“오- 그건 좀···.”
“그만들 하고. 팔은 어때?”
그러고 보니 노심 아머의 팔뚝 장갑이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었다.
‘오른팔이었지.’
오른손을 들어 휙-휙- 손목을 돌려보고 이리저리 움직여봤지만, 동작에 이상한 부분은 없었다.
“괜찮아.”
“오 괜찮데.”
“잘린 흔적도 없고?”
“역시 신성 왕국의 의료기술이라니까.”
“나중에 나이 먹어도 주름살 걱정은 없겠다.”
“근데 우리가 일반인들처럼 주름살 생기고 그렇게 늙나?”
“그냥 이대로 쭉 가다가 뚝 아니었어?”
“잠깐. 잘려? 팔뚝이?”
다시 오른 팔뚝을 보자 미세하게 피부색이 달랐다. 팔꿈치 아래로 손목의 색깔이 몸보다 옅은 색이라고 해야 할까?
“뿌리가 파고들어서 오라버니께서 바로 절단하셨어.”
“그 팔은 미리 배양해둔 걸 새로 붙인 거고.”
“이럴 때는 우리가 클론인 게 다행이라니까. 스페어도 넉넉하게 있고.”
사지 결손을 대비해 팔다리를 미리 만들어놨을 뿐 아니라, 혈액과 주요 장기, 피부 등의 조직까지 넉넉하게 미리 만들어 둔 신성 왕국이었다.
“그러니까 즉사만 피하면 살 수 있다니까.”
“즉사도 그렇고 감염이나 오염도 그렇고.”
“아 맞다. 그거 뿌리가 순식간에 네 팔을 뚫고 들어가서 신경계를 장악하려고 했다고 해.”
‧
‧
‧
[신경계를 파고들었다는 게 확인됐어요.]다크 서클로도 가려지지 못하는 번들거리는 눈빛. 나주연의 목소리엔 옅은 흥분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식물이 동물의 신경계를 파고들어 신경 자극을 준다는 것은, 식물이 동물의 움직임을 조종할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나주연의 시선이 특수 용기에 담긴 잘린 팔로 향했다. 나루즈의 잘린 팔을 거미줄처럼 파고든 뿌리에 살짝 전기자극을 가하자. 잘린 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가 통하지 않고 몸에서 잘렸으니, 세포조직이 바로 손상돼야 하는데 아직도 상당수 유지되고 있어요.]잘린 팔을 영양분 삼아 뿌리가 살고, 뿌리에서 만들어진 물질이 다시 잘린 팔에 주입되어 팔의 세포가 버티는 순환이 이뤄지고 있었다.
[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잎사귀까지 온전했다면, 굉장히 오랫동안 버텼을 것으로 보여요.]나주연의 설명에 마루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취리히에 있는 괴물 식물들이 동물을 잡아먹을 뿐만 아니라, 동물의 신경계를 잠식해 자신들의 몸처럼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식물이 동물의 몸에 파고들어 이동할 수 있다는 소린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나주연은 이 변이 식물의 메커니즘을 파악할 수 있다면 의학계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다며 작게 흥분했다.
신경계를 잠식한다는 말은 신경을 이어줄 수 있는 구조와 특질을 가진다는 의미였다. 신경 이상으로 마비가 온 환자에게 대체 신경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물 무기를 만들 방법이 많고도 많았다.
[신경 잠식과 조종 능력만 놓고 본다면, 잠식한 생명체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강제 명령장치를 만들 수도 있고요.]“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
[네. 이건 신경을 직접 자극하니까요. 머릿속으로는 아니더라도 몸이 움직이게 하는 걸요.]“자연적인 변이는 아니겠지.”
[네. 인간의 손이 닿은 결과에요. 그것도 전문적으로 오랜 기간 연구한.]마루는 바로 기순을 호출했다.
[어야-]모니터 한쪽에 기순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자료 보냈으니까 읽어보고 죠셉 찌꺼기가 아는 게 있는지 확인해 봐라.”
[뇌둥둥 상태에서 정보 뽑지 않았어?]“뽑았지. 그런데 흐릿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하긴. 본체도 아니라 찌꺼기니까 그럴 수 있겠네. 일단 바로 물어볼 게.]정신파 속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된 기순이었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더라도 거짓말을 하면서 생기는 정신파를 감정할 수 있었다.
잠시 뒤. 기순이 바로 대답했다.
[취리히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위스를 중심으로 식물을 연구하던 그룹이 있었다고 하네.]놈들의 특성상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기 위해 모인 세력인지라, 다양한 그룹이 있었다. 그 가운데 식물을 통해 질서를 재확립하자는 쪽이 스위스에 있었다는 이야기.
“식물을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
[식물성 고기도 그런 류의 일환이지, 식물 백신도 그렇고.]“식물 백신?”
[네. 토마토와 상추, 배추, 감자 같은 식물이 스스로 백신을 만들도록 해서 그 식물을 먹는 동물이 자연적으로 백신을 먹게 하는 연구에요.]“미친. 먹는 것으로 접종한다는 건가? 그게 가능해?”
[가능해요. 가열하건 소화액에 들어가건 m-RNA가 유지된다면, 세포를 파고들어 세포 스스로가 백신 성분을 합성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나주연의 말에 기순이 무슨 생각이 났는지 낄낄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웃기는 사건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곡물 회사와 농부의 소송인데,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대규모로 경작하는 회사의 옥수수밭 근처에 있는 농부가 있었어.] [그런데 옥수수는 바람으로 수분을 하는 종자잖아. 회사의 땅이 넓으니까 유전자 조작 옥수수의 꽃가루가 날려서, 전통 종자를 키우던 농부네 옥수수를 덮친 거지.]농부는 날벼락을 맞았다. 유전자 조작 옥수수가 아닌 일반 옥수수를 기르기로 하고 재배계약을 맺었는데 졸지에 유전자변형 옥수수가 나올 판이었으니까.
[유전자 조작 식물이 안전하고 안전하지 않고를 떠나서 한 번 퍼지면 답이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다 알았지. 알고도 그랬다는 거야. 알면서도 로비 받아먹고 회사의 손을 들어준 거고. 덴 아재가 그렇게 그리워하는 미합중국이 그랬다니까. 낄낄.]기순의 웃음에는 예전과는 다른 경멸이 섞여 있었다.
분명 그것은 안타까움이 아닌, 경멸이었다.
“그래 알았다. 또 생각나는 게 있으면 말해줘라.”
모니터에서 기순의 모습이 사라졌다.
후-
숨을 고른 마루의 머릿속엔 옥수수밭이 아닌, 다른 풍경이 떠올라 있었다. 프랑스 서부의 황량한 도시.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했던 슬러그(Slug)처럼 생긴 변이체들. 점액질로 덮여있고 하반신이 민달팽이처럼 변한 괴물들이 떠올랐다.
“식물의 천적이라고 하면 민달팽이도 천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네? 그렇지요.]달팽이의 점액질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진균에서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고, 식물이 내뿜는 독소를 막아주는 역할을 했으니까. 어쨌든 식물을 갉아 먹고 사는 달팽이는 분명 천적이라고 하면 천적이었다.
“프랑스에 슬러그 형태의 괴물이 있었던 건 우연이 아니었던 건가?”
[네?]스위스 연구소에서 연구한 식물형 괴물. 그리고 그 연구를 알고 있던 프랑스에선 식물 괴물의 천적을 연구했으리라.
‘아마도 프랑스에서 먼저 유출됐고 스위스 취리히는 나중에 유출된 것이겠지.’
마루가 자신의 가설을 설명하자, 진지한 표정의 레서 판다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프랑스와 스위스가 연관있는 건 확실해 보이네요. 그리고···.]기순의 말대로라면 스위스 식물연구원에서는 식물을 활용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신성 왕국은 전자, 기계, 금속, 건축, 우주, 항공, 약학, 의료 분야를 중심으로 돌리고 있었다. 여기에 클론과 가상현실을 포함하면 가용 연산자원은 거의 바닥인 상황.
[식물연구원의 연구자료가 있다면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을 거예요.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태와 관련된 자료가 있을 수도 있고요.]네이팜과 소형 전술핵으로 싹 태워버릴 생각을 하고 있던 김 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냥 태워버리고 새로 연구하는 게 낫지 않겠음? 샘플 보니까 저거 괴물 식물 아주 시발 같던데.] [······.]“······.”
[그리고 기순이 말도 그렇잖아. 옥수수 얘기. 그거처럼 취리히에 있는 괴물 식물들이 바람으로 꽃가루 날려서 멀쩡한 식물들 오염시키면 시간이 지날수록 개판 될 텐데. 그러기 전에 싹 태워버리는 게 맞지 않음?]영화 보면 꼭 뭔가 도움이 된다는 둥.
샘플이 어쩌고 하다가 일이 커지더라.
응.
그런 김 양의 주장에 반대하듯 나주연이 말했다.
[식물연구원 자료에는 분명 농업 기술도 있을 거예요. 우리는 시간이 많지 않고요.]험지에서 농사를 짓는 방법이라거나, 기를 수 있는 식물 관련 연구자료가 있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화성 관련된 작물 연구가 있을지도 몰랐고.
수상 도시에서 우주로 진출하려는 신성 왕국의 방침상. 식량 관련 연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레서 판다처럼 초롱초롱한 나주연의 표정에 김 양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년이 미쳤나? 대체 어디서 뭘 믿고···.’
나주연의 시선이 향한 곳은 마루였다.
마루라면 분명 어떻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감 가득한 눈빛과 표정이었다.
‘···미친년.’
김 양은 속으로 욕했다.
‧
식물만 죽도록 파고든 연구소의 연구자료라면, 그것도 프랑스와 이탈리아 같은 국가와 협업한 연구소의 연구자료라면 분명 도움되겠지.
다른 것은 다 제쳐 놓고라도 신경계를 파고들어 다른 유기체의 움직임을 조종하는 특성만 하더라도 엄청난 것이었다.
식물을 조종할 수 있다면, 식물이 조종하는 다른 유기체를 간접적으로 조종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활용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금방 죽은 사람이라면 식물을 이용해 부활이나 마찬가지로 살려낼 수 있겠지.
내장이 터졌건 어쨌건 신경을 직접 파고들어 사지를 움직이면? 이건 또 다른 의미에서 괴물이었다.
마루는 문득 싱크홀의 괴물이 떠올랐다. 싱크홀에서 기어 나온 괴물이 이미 죽은 괴물이라면, 이 식물은 죽은 것도 산 것처럼 만드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게 아니라, 산 것처럼.
아니.
어쨌든 살아있기는 한 건가?
김 양의 말처럼 모조리 태워버리고 뿌리 뽑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마루였다.
‘후- 시발.’
깊게 숨을 내쉰 마루가 다시 심사숙고했다.
어쨌거나 왕이었으니 신성 왕국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하는 게 맞았다.
‘김 양 말대로 네이팜과 전술핵으로 쓸어버리는 건 실패할 확률이 커.’
카지노에 있던 화분의 행태만 보더라도 그랬다.
불에 약하다는 약점을 알고 있다는 듯, 여러 가지 소화(消火)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그 시설은 분명 인간이 손을 댄 흔적이 있었고.
‘자발적이든 강제는 식물이 인간을 조종하고 있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네이팜이나 전술핵으로는 죽일 수 없는 곳에 숨어 있는 놈들도 있을 터. 놈들을 뿌리 뽑으려고 하건 식물연구원의 자료를 찾으려 하건 직접 가봐야 할 판이었다.
‧
[프랑스 슬러그 괴물 샘플 이야기를 하셔서 확인해 봤어요.]슬러그 괴물의 점액질엔 다양한 효과가 있었다. 타격에 내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화학적 물질에 대한 방어력은 기본으로 내부식성, 난소화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세균이나 바이러스, 독성 화합물을 차단할 뿐만 아니라, 산에 대한 저항력까지 있다는 이야기였다.
[식물이 꽃가루나 가스 같은 걸 내뿜을 수 있으니까 생화학전에 대비한 장비가 필요해요.]마루가 죽음의 정원을 펼치거나, 자동으로 방어하는 검은 넝쿨이 튀어나오면 전자기기가 먹통이 됐다.
그러니 기존의 방식으로 대응장비를 만들어야 했다. 겸사겸사 프랑스 슬러그의 점액질까지 활용한 방호복.
“지금 나보고 이걸 입고 가라고?”
[네.]“진심이냐?”
[네.]점액질로 뒤덮여 미끄덩거리는 라텍스 느낌의 슈트가 펼쳐져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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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륵-슈륵-
걸을 때마다 점액질 스치는 소리가 귓가에 거슬렸다.
이렇게 빨리 걷는데도 한 방울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점액질의 점성도가 좋거나, 점액질 자체에 뭔가 처리를 했다는 이야기.
‘꺄아아아아앗!’
‘아아아아아앗!’
마루와 같이 작전에 참여하고 싶다고 몰려들었던 나루즈가 전부 손으로 눈을 가리게 만든 복장이었다.
‘오라질 년들.’
손으로 눈을 가린다면서 손가락 사이는 왜 벌린 건데.
세 개의 돔으로 된 식물원 인근으로 바로 강하한 마루는 그대로 식물원 지하에 있는 식물연구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밝은 햇살.
5월 하순 기온치고는 살짝 높은 온도였지만 그래도 싱그러운 날씨.
“거기 정지!”
[······.]마치 땅속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길 양옆에서 나타난 사람들이 마루의 앞을 가로막았다.
번들번들 점액질로 뒤덮인 라텍스 쫄쫄이를 입은 마루를 멈춰 세운 사람들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쯧-”
“어이-”
“마스크 벗어-”
영어로 말하는 자들.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도 아니고 영어?
그것도 영국식 발음도 아니라 미국식 발음.
[용병대인가?]“너 누구야?”
“방독면 벗어!”
이것들 보소?
나루즈가 단체로 왔을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혼자 오니까 얼씨구나 길을 막아?
[내가 누구냐고?] [신성 왕국 국왕이다.]점액질로 번들거리는 라텍스 슈트의 선언에 길을 막은 자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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