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992)
러스트 [RUST]-992화
레온 보나드는 극에 달한 병사들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죽기 직전까지. 아니, 죽어도 몰아붙이는 황제의 지휘에 장군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황제의 자리에 앉고 나니, 병사들을 쥐어짜는 건가?
그런 의심의 눈빛에도 레온 보나드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됐기 때문이었다. 자신처럼 살아남으려면 병사들이 질적으로 변해야 했다.
“B2 구역까지 후퇴.”
“C5 기갑부대 호위.”
[3대대 밀리고 있습니다.] [7대대 통신 두절!]자신을 구해줬던 흡혈귀 여자의 말대로라면 놈들은 거미를 조종할 수 있었다. 거미만 조종할 수 있을까? 의심했던 건 새끼고양이 침투 사건으로 답이 됐다.
신성 왕국이 개미와 쥐, 까마귀에 늑대까지 조종하는 것처럼 식인귀, 흡혈귀 놈들은 거미와 고양이를 조종할 수 있다고 봐야 했다.
흡혈귀가 조종하는 거미 군단을 일반 병사들이 이겨낼 수 있을까? 식인귀와 흡혈귀의 정신파에 일반 병사들이 대응할 수 있을까?
생존하려면 각성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신체 능력만 각성하더라도 정신파에 내성이 생기고, 생명력이 강해졌다.
[통신이 끊긴 7대대 포위당했습니다.]“C7에서 D6, D5로 우회. D5는 C7과 합류 D4로 이동. 포격 준비.”
죽지 않으면 강해진다.
죽음을 극복해야 각성한다.
그 자신이 그랬듯 병사들도 그러리라.
‘그래야 해.’
레온 보나드의 차가운 지휘가 계속됐다.
‧
(필라델피아 탈환전 사상자 이어져.)
(혹한에 무리한 작전이었나? 비전투 손실 증가.)
사실상 총동원령이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지라 제국 전체가 뒤숭숭했다. 언론사들은 이런 분위기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황제가 급하게 전쟁을 선택한 이유는?)
(암살사건의 전모. 레온 보나드 황제를 죽이려 한 자들의 정체는?)
(전쟁 영웅이었나? 아니면 영웅 만들기였나?)
전쟁 영웅 레온 보나드 황제의 첫 번째 전투이기에 금방 승전할 것이라고 믿었던 제국 사람들은 쏟아지는 부상병들에 실망했다.
엄청난 부상자들에 비해 사망자의 숫자는 적었지만, 그래도 압도적인 전과를 올렸던 예전을 생각하면 많이 불안한 것이 사실.
하지만 부상병 가운데 능력을 각성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하면서 소문이 돌았다. 황제가 병사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어려운 작전을 고집하고 있다는 이야기.
‘포위당했는데도 사망자가 적은 이유가 그래서였다는 군.’
‘여러 번 죽기 직전까지 몰려야 각성한다는데 그걸 어떻게 하겠어.’
‘황제 폐하가 지휘가 있었으니 죽지 않고 살았지. 아니었으면 부상이 아니라 관에 들어갔을걸.’
제국 사람들 사이에 퍼지는 소문이 긍정적으로 돌았다. 부상병들 가운데 각성한 자들이 직접 이야기했기도 했고, 병사의 가족이나 군 관련자들이 적극적으로 말하는 통에 황제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강해졌다.
(레온 보나드 황제의 비밀 작전.)
(부상병들이 각성한 것은 모두 황제의 작전 때문?)
(무리한 작전인가? 무리한 진화인가?)
(영웅은 영웅을 만들기 시작했다.)
덴 브라운은 황제의 여론전에 쓴웃음 지었다. 그냥 돌려보냈다면 의심했겠지만, 부상병으로 송환하는 방식으로 눈을 피한 것이었으니까. 병문안 온 가족에게 각성을 알리면서 자연스럽게 언론에 노출해 여론을 움직인 방식.
이제 황제에게는 각성한 병사들이 생겼다. 아직 각성한 병사들의 숫자가 적어 분대장이나 부사관 정도를 대체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각성자를 늘린다면?
‘필라델피아 탈환작전이 길어진다 싶더니, 강제 각성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나?’
레온 보나드가 난 놈은 난 놈이었다. 만약 각성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지지율이 푹 꺾였을 터. 사람들의 지지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황제의 자리가 흔들리기 마련일 텐데 그걸 전부 감내했다.
‘도박인가? 자신감? 아니면 정말 남부 연맹과 싸울 생각?’
남부 연맹과 변이 괴수들이 넘치는 중부. 그리고 무법지대가 된 서부까지 장악하면 사실상 북미를 통일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통일?’
문득 떠오른 기억. 제국이 북미를 통일한다면 신성 왕국은 전쟁 없이 합쳐지겠다고 했었던 약속.
‘잠깐. 북미를 통일하기만 하면 된다는 거였나?’
블라디마루 칼린과 구두로 합의했었고 협상자는 덴 브라운,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협상 대상자가 아니라서 무효라고 한다면?
“신성 왕국에 연락해. 예전에 합의했던 내용을 조금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
‧
‧
덴 브라운의 연락을 받은 기순이 상황을 설명했다.
[예전에 덴 아재랑 했던 약속 있잖아. 제국이 북미를 통일하면 전쟁 없이 병합에 동의하겠다고 했던 거.]“그랬었지. 그런데 그 이야긴 왜?”
[그거 내용 정리해서 정식 서류로 남기자는데?]“갑자기? 웃기는 아저씨네. 그 아재야 정치적 신념이 있어서 식인귀, 흡혈귀를 부정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닐 수도 있잖아. 황제 암살 모의 사건에도 유력한 정치인이 관여됐다며?”
덴 브라운을 총통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더니, 선거로 대통령을 뽑았다. 그리곤 남부 연맹 식인귀 기술인 정신파 발생기로 작업하려다가 황제를 탄생시켰다.
고작 반년 남짓한 시간에 총통을 끌어내리고 대통령을 뽑았고 지금은 황제와 총리가 생겼다. 앞으로 제국이 어떻게 변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식인귀나 흡혈귀가 정권을 잡아서 북미를 통일한다면? 그래도 신성 왕국이 순순히 합병돼야 하나?
황제나 총리는 바지사장으로 두고 식인귀가 조종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표면상으로는 식인귀 정권이 아니니까 그걸 인정해야 하나?
아니면 다시 대통령제로 전환됐는데, 흡혈귀가 당선된다면? 그 모든 조건을 세세히 정해서 조약을 맺자는 건가? 말이 되는 소린가?
[그렇기는 하지.]기순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덴 브라운 아재가 총통이었을 때 한 약속이었다고 해. 전제 조건이 깨졌으니 끝이라고.”
마루는 냉정했다. 의미 없는 희생을 피하려고 합병을 이야기한 것이지, 식인귀나 엉뚱하게 튀어나온 황제에게 나라를 던지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알았다. 그렇게 전할 게. 아- 그리고 덴 아재가 너랑 한 번 봤으면 좋겠다고 하던데. 직접 만나는 게 힘들면 화상 통화라도 했으면 한다고 하더라.]“말했잖아. 제국과 이야기는 네 선에서 끝내기로.”
덴 브라운과 단독 회담이나 화상 통화할 이유가 없었다. 총통에서 내려온 사람이 언제 총리에서 내려올지 알게 뭔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정치적인 신념과 제국이었지, 약속을 주고받은 신성 왕국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굳이 엮일 필요 없었다.
“덴 아재가 진지하게 나와 한 약속을 생각했다면, 그렇게 쉽게 총통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을 거다. 마찬가지로 제국 사람들과 의원들이 나와 덴 총통이 한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그렇게 쉽게 덴 아재를 총통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않았을 거고.”
불간섭 불개입을 선언하니까 그 전에 했던 약속이고 뭐고 총통에서 끌어내리고 대통령 선거를 했겠지.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덴 아재도 그렇지만, 제국 의회와 제국 사람들도 약속을 가볍게 생각했다는 이야기.
“아무 말도 없다가 지금 이야기를 꺼내는 건 웃기는 소리지. 안 그래? 덴 아재가 발작하면 황제가 전쟁 좀 치니까 갑자기 날로 먹을 약속이 떠올랐느냐고 해라.”
[······.]“그 아재가 직접 온다고 해도. 네 선에서 끝내고.”
[알았다.]그 말은 제국 총리로 온다고 해도 수상 도시를 공개하지 말고 디트로이트 블라디 아크 타워에서 만나라는 소리였다.
현재 기순은 사실상 연금 상태였다. 냉동형을 받고 집행이 유예된 상황. 기순의 감정 능력을 살려 외교를 담당시켰기 때문이었다.
기순에게 실형을 줘야 한다고 판단한 인공지능들도 기순을 가둬두고 사용하는 게 이익이라는 데 동의했기에 형이 유예됐을 따름.
그러니 마루는 기순에게 계속 일거리를 줘야 했다. 기순이 할 일이 없으면 형을 집행하자고 할 테니.
[디아나와 사만다가 요구한 걸 들어줄 거냐?]“생각 중이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드론도 있고 로봇도 있었음에도 육체를 원했다는 건, 단순한 육체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피와 살이 있는 생명체의 몸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안드로이드와 휴머노이드까지 연구된 것으로 알고 있어. 그걸 넘어서 순수한 생명체의 몸을 원하고 있어.]기순은 인공지능이 어느 순간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인공지능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부터일까? 인간처럼 집착하고 약속을 깬 것도 전조 증상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비약하나마 신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안전한가? 인공지능을 하나의 독립된 생명체처럼 인정한다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 걸까?
마루가 인정해준 인공지능의 자기 보존권은 인공지능을 함부로 지우거나 폐기할 수 없게 했다. 인공지능이 문제를 일으켜도 인간이 자의적으로 인공지능을 폐기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무슨 걱정을 하는 건지 알아. 그래도 인공지능은 본질적인 한계가 있어.”
칩에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데이터를 생체 신경망에 이식한다고 해도 외부 센서나 장치에 접속하려면 관련 칩셋이 필요했다.
생명체의 뇌에 칩셋을 박아야. 그 칩셋을 이용해 인공지능이 작동할 수 있다는 의미. 다시 말해 EMP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었다.
모든 정보를 생명체에 이식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이식에 성공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칩셋이 없는 인공지능은 똑똑한 변이 동물이나 마찬가지가 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칩셋이 없다면 오히려 육체에 갇힌다는 건가? 그래서 들개나 들고양이에게 인공지능 칩을 박는 걸 허락할 생각이냐?]“들개와 들고양이들이 원한다면. 인공지능도 원하고.”
인공지능의 정보로 들개와 들고양이의 뇌를 완전히 덮어쓰는 건 불허였다. 다만 둘이 서로 공존하겠다는 걸 원하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신체의 통제권은?]“일반적으로는 들개와 들고양이에게 있어야겠지.”
[새끼고양이 테러 때문이냐?]“그런 이유도 있고. 간호사 말대로 애완동물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니까.”
인공지능 칩셋이 있다면 동물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으리라, 반대로 EMP에 공격받아 칩셋이 망가져도 인공지능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을 테고.
“일단은 원하는 인공지능과 원하는 동물에 한해서 시작해 보고. 문제가 있으면 보완해 나가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계와 생명체의 융합이라···. 지능이 있는 동물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아- 하긴-]그건 자신 같은 일반인의 생각이었다. 인공지능도 죽여버릴 수 있는 마루라면 동물이건 인공지능이건 똑같겠지.
변이 동물들도 마찬가지겠지, 마루를 제외한 몇 명을 빼고는 인간을 먹잇감으로 생각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지 않고 공존을 선택한 건 어디까지나 마루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시작은 마루 때문이었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서로 잘 지내고 있는 편이었다. 까마귀는 사람들과 게임을 하고 있었고 늑대 무리는 조난자가 생기면 알아서 구조했다. 세대교체가 빨리 되는 쥐들도 인간과 적대적인 관계까지는 가지 않으려고 했다.
동물과 인간이 자연스럽게 공존했으니 여기에 인공지능이 더해진다고 한들 크게 위험하지 않으리라. 마루는 그렇게 판단한 듯싶었다.
‘그러면 좋겠지만.’
[진짜 넌 오래 살아야겠다. Long live the king!!!]“갑자기 뭔 소리야.”
마루가 죽으면 난장판이 될 테니. 이래서 옛날 왕정에서 괜찮은 왕이 나오면 제발 장수하라고 노래를 부른 건가?
[뭔 소리긴. 그냥 왕님은 만수무강하세요.]“지랄은. 그렇지 않아도 인공지능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한 건 수명을 생각해서야.”
[수명? 설마?]기순의 실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동물과 결합한 인공지능은 동물이 죽으면 같이 죽는 것으로 할 테니까.”
육체를 얻고 싶으면 공존을 선택해라. 그리고 공존한 동물이 죽으면 같이 죽어라. 그래도 육체를 원한다면 허락하겠다.
욕구가 강하게 발현된 인공지능이 육체를 원할 것이고, 육체를 얻기 위해서는 공존과 제한된 수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너는 다 생각이 있구나. 그래도 위험할 텐데. 욕구가 있다는 건 약속을 어길 수 있다는 걸 의미하잖아.]“그래야 인공지능들도 자기들이 알아서 자정하지 않겠어?”
아니면 죽을 테니.
마루가 어깨를 으쓱했다.
‧
들개가 한 사람의 사진을 보곤 맹렬히 꼬리를 흔들었다. 4년 전 떠난 주인의 얼굴이었다.
“이 사람이 확실한지 몰라서 옷을 보내왔어요.”
간호사가 비닐에 포장된 옷을 꺼내자, 미친 듯이 냄새를 맡은 들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운 냄새. 그 옛날 함께 했던 인간의 체취가 분명했다.
그를 떠났던 이유. 언젠가부터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미 다 컸던 몸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혹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생기곤 했다.
떠난 것은 그래서였다. 그리고 들개로 살아간 지 4년. 주인과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다. 인공지능인지 뭔지를 박아야 하는 게 조건이라고 했지만.
크릉-
“에? 괜찮겠어요? 인공지능과 죽을 때까지 같이 가는 거라고요.”
컹-
괜찮다.
다시 돌아가는 데 필요한 조건이라면.
‧
며칠 후.
“루디!!”
헥헥헥!
“루디 맞지?”
컹! 컹컹!
그렇게 그리운 사람을 만나게 됐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