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14
수건을 대충 두르고 욕실을 나왔다. 위르겐이 사 온 옷가지에 슬립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
아픈 팔로 간신히 옷장을 열어 보니 실크 슬립 한 장이 걸려 있었다.
이걸 입으라고? 너무 짜증나서 웃음이 다 나왔다. 그래도 외출복 차림으로 잠들 순 없으니 꾸역꾸역 옷을 갈아입었다.
가히 최악의 잠옷이었다. 입어도 따뜻하지 않았고, 몸을 제대로 가려 주지도 않았다. 고개를 내려 보니 젖가슴에 파묻힌 십자가 목걸이가 훤히 보였다.
경악스러울 만큼 차림새가 야했지만 당장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외출복을 정리하지도 않고 곧장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졸음이 쏟아졌다. 많이 다쳐서인지 오빠가 죽었다는 충격도 뒷전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누군가 나를 깨우지만 않았어도 출근도 못 하고 내리 잠만 잤을 것이다.
“당신 미쳤어?!”
머리 위로 들리는 위르겐의 고함에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깼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뒤척일 뿐 눈을 뜨지 않았다. 그냥 그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무거웠다.
위르겐은 화가 난 사람처럼 정신없이 방을 서성였다. 그의 걸음걸이는 평소와 달리 불안정했고 숨소리는 거칠었다.
“스볘타 당신 정신이 완전히 나갔군. 밤중에 연락도 없이. 제기랄. 빌어먹을 계집!!”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난폭한 굉음을 들은 나는 결국 움츠러들며 눈을 떴다.
화가 난 위르겐이 저번처럼 멱살이라도 잡을까 봐 내심 두려웠다.
“정신이 안 나가기 힘든 상황이었어요. 수용소에서 우편이 왔거든요.”
변명을 덧붙이며 시계를 보기 위해 고개를 틀었지만, 너무 캄캄해서 벽시계가 보이질 않았다. 가늠할 순 없었지만 여전히 캄캄한 밤이라는 건 분명했다.
위르겐은 불을 켜고 내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매트리스 한쪽이 위르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기울었다.
“당신 오빠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까?”
위르겐은 평소와 달리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열병이라도 앓는 사람처럼 상기된 얼굴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위르겐 씨도 다쳤어요? 꼴이 왜 그래요?”
위르겐은 이마 위에 눌러 붙은 머리칼을 거칠게 넘기며 나를 노려보았다.
“맞아요. 세료자 오빠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래서 술 마시고 다쳐서 돌아온 거고? 아. 오빠가 뒤진 게 그렇게 슬프신가? 당신 같은 여자도 슬픔은 느끼나 보지? 당신도 가족을 잃는 게 슬픈가?”
발길질보다도 더 폭력적인 말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힘없이 애원했다.
“오늘만큼은 나를…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당신도 사람이라면 오늘은 그러지 말아야지…….”
날 증오한다던 사람한테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그러나 나는 위르겐의 인간성에 기대고 싶을 만큼 지쳐 있었다. 내 바람대로 그는 입을 다물었고 나는 아주 짧은 평화를 맛보았다.
“약 발라야 합니다.”
약통을 들고 온 그가 이불을 거두자 한기가 왈칵 끼쳤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며 질질 짜기 시작했다. 눈물이 눈꺼풀 틈을 비집고 자꾸만 흘러나왔다.
“내일 3시 45분에 세롄그라드행 열차가 도착한답니다.”
“세롄그라드행 열차… 3시 45분…….”
“당신 오빠들이 올 겁니다. 한 번은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연고를 발라 주는 손길이 거칠었다. 부드럽지 않은 손길로 연고를 덕지덕지 발랐기에 나는 매 순간 신음했다. 그가 상처마다 거즈를 덧대자 순식간에 온몸이 거즈에 덮였다. 그 탓에 분명 슬립 차림인데도 단단히 옷을 챙겨 입은 것만 같았다.
“팔은 또 왜 이렇습니까?”
“넘어질 때 팔부터 부딪혔어요.”
“부었습니다. 아무래도 붕대를 감아야겠어요.”
그가 팔을 잡는 순간 또 한 번 비명이 나왔다. 나는 그가 내 팔에 붕대를 감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붕대에 감긴 내 두 팔은 가슴팍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확실히 통증이 덜했다.
예정보다 정비소를 일찍 그만둬야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슬프게도 이 팔로는 한동안 제대로 일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날이 밝는 대로 병원부터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위르겐. 시간 끌 것 없어요.”
마지막으로 내 얼굴에 거즈를 덧댄 위르겐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최대한 빨리 가요. 힐덴베흐크로.”
사실상 어느 쪽이건 내게 끔찍한 건 마찬가지였다. 우리 민족을 말살시키겠다며 학살을 감행하던 힐덴베흐크나 가족들을 수렁에 빠트린 엘킨스키나.
어차피 내겐 마음 둘 조국 같은 건 없었다. 아무리 조국에서 애국을 강요해도 불가능했다. 차라리 무정부주의자가 되는 편이 빠를 것이다.
“죽음이 기대되네요.”
정비소, 아르춈, 친절한 이웃들……. 전부 희미하다. 세료자 오빠의 마지막 편지만이 떠올랐을 뿐이다.
“당신 덕분에 간신히 깨달았어요. 난 이제 살고 싶지 않아요. 죽고 싶어요. 고통이 두려워 관성처럼 살아갔을 뿐이에요.”
오빠들이 무사히 수용소에서 빠져나온 게 확인되면 더는 내게 책임질 것이 없었다.
오빠들과 함께 도망? 허울뿐인 이상이다. 오빠들은 굴라크에서 석방된 처지다. 다른 이들은 국경을 넘다 걸려도 벌금 몇 푼으로 끝나겠지만, 우린 총살을 당할 것이다. 고작 나 하나 때문에 가족들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도록 둘 순 없었다.
그렇다고 나 혼자 도망칠 수도 없다. 내가 도망친다면 위르겐은 분명 오빠들을 다시금 굴라크로 처넣을 것이다.
나는 도망칠 수 없다. 그가 맞았다. 세료자 오빠가 그러했듯 지금 내겐 희망도 하느님도 없었다.
모든 걸 끝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편안해질 수 있다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젠 죽고 싶다고 얘기합니까?”
“총살로 부탁해요. 단번에 죽을 수 있게 뇌를 정확히 가격해 주세요.”
“고통 없이 편하게… 죽으시겠다…?”
조롱하는 어투에도 나는 상처받지 않았다.
“네.”
내 대답을 들은 위르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는 화가 난 사람처럼 두 주먹을 움켜쥔 채 덜덜 턱을 떨었다. 씩씩대는 그의 숨소리가 성난 황소의 것 같았다.
그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나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죽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간절하게 살고 싶은 것인지. 다만 분명한 건 지금 내겐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체념한다면 편해질 거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한동안은 알싸한 침묵이 감돌았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나였다.
“세료자 오빠가 편지에 몇 번이나 썼어요. 보고 싶다고. 그래도 찾아가지 않았어요. 오빠한테 남은 유일한 연고가 나였는데……. 수용소에 가 보신 적 있으세요?”
외국인인 그가 굴라크에 가 봤을 리는 없었다. 수용소로 끌려간 외국인은 전부 죽었으니까.
“혁명이 일어나고 수용소에 며칠을 갇혀 있었어요. 단언할 수 있어요. 그때가 내 인생에서 제일 끔찍한 순간이었다고…. 지금보다도 몇 배는 더 힘들었어요. 그곳은 지옥이에요. 난 그래서 한 번도 수용소에 오빠들을 면회하러 가지 않았어요.”
수용소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구역질이 일었다.
“세료자 오빠가 나를 보고 싶다고 몇 번이나 편지를 썼지만 난 끝끝내 가지 않았어요. 오빠가 이렇게 죽을 때까지요.”
고해 성사를 하듯 위르겐에게 내 비밀을 속삭였다. 원래도 나를 증오하는 남자니 이젠 나를 더 증오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순간의 그가 증오를 못 이겨 나를 목 졸라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오빠를 외면한 벌을 받을 수 있다면…….
세료자 오빠가 머무는 수용소는 세롄그라드에서 고작 몇백 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기차를 타고 한나절을 달리면 다다를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그런데 나는 가족의 외로움을 알고도 외면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빠의 시체를 찾으러 수용소를 찾아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오빠의 시체가 설원에 버려져 짐승에게 물어뜯길 게 자명하다지만 차마 수용소에 찾아갈 용기가 없었다.
“당신이 날 증오하는 까닭을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네요.”
이불 위로 툭툭 눈물이 떨어졌다.
“나도 내가 증오스럽거든요.”
“가증 떨어 봐야 나는 속지 않습니다.”
내 눈물을 닦아 내며 위르겐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곧 정돈된 걸음걸이로 방을 나갔다.
나는 위르겐에게 조금도 상처받지 않았다. 위로를 바라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가증스럽다. 가증스럽다……. 그가 한 말이 반복적으로 머릿속을 울렸다. 그래, 맞는 말이다. 나는 가증스러웠다. 그래서 이토록 가슴이 욱신거리는 모양이다.
잠시 뒤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먹어요.”
쟁반을 들고 다가온 위르겐은 대뜸 내 입가에 수저를 가져다 댔다.
말문이 턱 막혔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다.
“설마 라솔니크예요?”
그릇에 담긴 국은 분명 숙취가 심할 때 끓여 먹는 라솔니크였다.
“제가 먹을게요.”
“그 팔로?”
그가 내민 수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국물이 담긴 수저는 내 입가에서 미동도 없이 멈춰 있었다.
“입 벌려요.”
“위르겐 씨. 사람이… 정말 이상하네요. 설마 본인이 만든 건가요?”
“그게 문제입니까?”
위르겐이 요리하는 모습을 상상하다 눈을 찌푸렸다. 세상에, 요리하는 위르겐이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약을 탄 건 아니겠죠?”
“안 탔으니 먹어요.”
결국 나는 입을 벌려 따뜻한 국물을 삼켰다. 맛이 좀 역겨운 걸로 보아선 위르겐이 만든 게 맞긴 맞는 거 같았다.
분명 맛이 끔찍했지만 고분고분 잘 받아먹었다. 전날의 과음 탓에 몸이 떨리는 와중이었다. 뭐든 먹어 치워야 몸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 같았다.
“당신 몸을 애 갖기 좋은 몸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나도 오래 끌긴 싫으니….”
한참 뒤에 위르겐이 눈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알고 있어요.”
“술 끊어요. 오밤중에 길거리에서 흥청망청…. 보기 싫으니까.”
아. 잊고 있었는데……. 설마 벌써 애가 들어선 건 아니겠지.
그와의 성관계 횟수는 아직 열 손가락도 채우지 못했다. 고작 이 정도로 아기가 들어설 리는 없다. 아랫배는 판판했고 입맛은 여전했다. 위르겐이 추삽질하던 순간이 떠오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스산한 공포가 내게로 밀려들었다.
그날 밤, 결국 나는 억지로 먹었던 라솔니크를 전부 게워 냈다.
***
아침이 밝았다.
열차는 오후 3시 45분에 도착한댔다.
팔이 다쳤지만 출근은 했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서 하는 수 없이 위르겐의 차를 얻어 탔다.
다친 몸으로 일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결국 얼굴만 보이고 곧장 퇴근하게 되었다. 며칠 출근하지 못할 거라는 선언은 덤이었다. 마음씨 좋은 스미르노프 씨가 상관이라 망정이지 아니었음 뺨이라도 한 대 얻어맞을 만큼 이기적인 선언이었다.
어제 스미르노프 씨에게 후임을 구해 두라 말해 두었는데 벌써 후임을 구했단다. 대기하던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2월이면 새로운 정비사가 들어온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걱정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며칠째 민폐만 끼치는 나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너무나도 쉽게 구해진 후임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나는 여전히 철이 없다.
위르겐의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오빠를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요리라곤 한평생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팔까지 엉망이었다. 하는 수 없이 솥에 남은 라솔니크를 대접하기로 했다. 소의 콩팥과 절인 오이를 조금 더 넣었더니 그나마 맛이 조금 나아졌다.
상점에서 하얀 빵과 질 좋은 고기를 구했다. 제일 전통적이고 맛있는 식단이었다.
오빠들은 굴라크 안에서 달콤한 간식거리를 거의 못 먹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잼이 듬뿍 올라간 파이를 바구니 가득 샀다.
굴라크 안에서는 기름진 음식도 먹기 어렵다고 들었다. 그래서 살로와 버터도 바구니 가득 샀다.
새하얀 레이스 식탁보가 깔린 식탁이 음식으로 가득 찼다. 저녁상을 전부 차린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식사 준비를 하느라 무리했더니 견딜 수 없을 만큼 팔이 아팠다. 너무 아파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오늘은 꼭 병원에 가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일로 바빠서 가지 못했다. 약국에서 독한 진통제라도 사다 먹고 싶었지만 약속 시간이 다 되었다.
긴장감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삼십 분 전에 위르겐이 차를 끌고 나갔다. 열차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오빠들을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가족들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지나치게 막막했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입술을 잡아 뜯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오빠들인데,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오빠들이 빨리 왔으면 싶다가도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싶었다. 면회 한번 가지 않은 여동생을 어떻게 생각할까? 원망스럽고 얄미울 것이다. 어쩌면 증오스러울지도 모른다. 가족들에게 미움받을까 봐 너무나도 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