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15
나를 딸처럼 아껴 주었었던 그들에게 죄스럽다.
오빠들이 견디지 못할까 봐 어머니의 죽음도 알리지 않았다. 그간 오빠들에게 어머니의 소식을 한 마디도 전하지 않았으니 눈치는 챘을 것이다.
나는 오빠들이 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견뎌 주길 바랐다. 견디고 견디다 세상으로 나와 당당하게 살아가길 원했다. 숙청을 피했으니 언젠가 잘 살 기회가 생길 거라고 굳게 믿었다.
수용소에 수감되지 않은 나조차 이렇게밖에 못 살고 있는데 도대체 내가 뭘 바란 걸까?
내가 희망 고문을 한 걸까? 아니다. 그래도 오빠들은 나왔다. 앞으로 잘 살면 된다. 오빠들은 나와 다르니까. 나보다 굳세니까.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나가서 가족들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위르겐이 먼저 다이닝 룸으로 들어왔다.
“안 나와 봅니까?”
“못… 못 나가겠어서…….”
“자리 비켜 줄 테니 빨리 끝내세요.”
그 말을 끝으로 위르겐은 집을 나섰다.
잠시 뒤 문소리가 들렸다. 아직 형제들의 얼굴을 보지 않았는데도 눈물이 터져 나왔다. 두르고 있던 흰색 앞치마가 눈물로 얼룩졌다.
식탁 앞에 앉은 나는 통곡하는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오빠들이 나 혼자 사람처럼 산 걸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귀족의 특권을 누린 게 죄였다면 나 또한 죄인인데 여자라는 미명 아래 비겁하게 형벌을 피했다. 너무나도 죄스러웠다.
“스볘타. 오빠 얼굴 안 볼 거니?”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오르기, 로만. 둘 중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르겠다. 사실은 오빠들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을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야윈 오빠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스볘타. 울지 말고.”
“미안해, 오빠. 내가…….”
“네가? 네가 뭐가 미안해? 스볘타, 오히려 내가 죄스럽지.”
코앞에 서 있는 오빠는 내가 고개를 들기를 기다려 줬다. 더는 숙이고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무거운 고개를 간신히 들었다.
게오르기 오빠가 내 눈앞에 서 있었다.
“고샤…….”
“그래. 스볘타.”
활짝 웃는 게오르기 오빠는 이 몇 개를 잃은 채였다. 그 탓에 발음이 새고 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광대뼈가 불거진 얼굴이 창백했다. 게오르기 오빠에게선 예전과 같은 풍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심장이 철렁했다. 사진으로 이미 오빠의 상태를 보았음에도 가슴이 미어졌다. 끅끅대며 우는 나를 보며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너 얼굴이 왜 이래? 팔은 또 왜 그렇고?”
“자전거 타다 넘어졌어.”
“조심했어야지.”
“로마 오빠는…?”
“안 왔어.”
몇 해 만에 만났음에도 게오르기 오빠가 입 안의 혀처럼 익숙했다. 그런데 왜 로만 오빠가 없지? 불길함에 몸이 달달 떨렸다.
“설마 잘못된 거야?”
“아니야. 그런 거.”
“오빠……. 그런데 왜 로마 오빠는 안 왔어? 왜…?”
“그놈은 널 만날 자신이 없단다. 병신 같은 새끼.”
“아아…….”
나는 로만 오빠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이유를 듣지 못했지만 이미 알 것 같았다. 갑갑했다. 억울했다.
우린 이런 일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재산을 몰수해 갔으면 그만이지 왜… 왜 이렇게까지.
억울한 사람이 한둘이 아님을 알았다. 이웃 나라에서 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죽어 나가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이 순간 나는, 세상에서 제일 서럽고 억울한 사람이었다.
“로만 오빠는 내가 보고 싶지도 않대? 응?”
서러움에 흐느끼며 오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오빠.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정말로… 보고 싶었어.”
“스볘타.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벌써 이런 아가씨가 됐구나.”
“미안해. 미안해. 나 혼자만… 혼자만…….”
“너까지 수용소에 처박혔으면 오빠가 못 견뎠을 건데? 게다가 네가 아니었으면 나오지도 못했을 거야. 쓸데없는 자책 말래도.”
비슷한 대화를 반복하며 우린 긴 인사를 나눴다. 그사이 식탁의 음식들이 전부 식었다. 그래도 게오르기 오빠는 내가 한 음식이 맛있다며 웃음 지었다.
나는 오빠가 라솔니크를 떠먹는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살로를 입에 넣고 씹는 것도, 정신없이 맥주를 마시는 것도 오빠답지 않았다.
게오르기 오빠는 더는 귀족 같지 않았다. 고상하지 않았고 우아하지 못했다.
잔인할 만큼 모든 것이 고스란했다.
어제의 내가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게오르기 오빠는 수용소에서도 살아 돌아왔다.
그런데 나는 비겁하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을 두고도 체념하고 죽으려고 했다.
오빠는 귀족이었다. 수용소에 처박히기 전까지는 군에서 소령으로 있었고, 장남은 아니었어도 예정된 미래가 찬란했었다.
게오르기 오빠는 편지로 이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은 스스로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도 그토록 굳센 오빠가 자랑스러웠다.
“로만 일……. 이해하지?”
“이해해. 나라도 날 보고 싶지 않을 거야.”
“네 잘못이라는 게 아니야. 미안하다, 스볘타.”
“아냐. 아냐…….”
“잊지 않고 나를 챙겨 줘서 고맙구나. 그리고 미안하다. 이렇게 네게 도움을 받는 게 부끄럽다.”
“그런 말 하지 마. 난 오빠 여동생이잖아.”
게오르기 오빠는 나를 아기처럼 껴안아 주었다. 나도 오빠를 껴안아 주었다.
너무 야윈 바람에 뼈마디가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오빠는 충분히 든든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와 세료자 오빠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게오르기 오빠는 눈물을 글썽였다. 오빠가 수용소 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땐 내가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정비사가 되었다고 말하자 오빠는 웃음을 터트렸다. 오빠는 내가 어릴 때부터 시계나 장난감을 고치곤 했으니 정비공이 된 게 어색하지 않다고 했다. 듣고 보니 그럴싸해서 한참을 웃었다. 나도, 오빠도 전부 예상치도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세료자는 희망을 잃어서 죽은 거야. 의지가 없는 인간은 죽는 수밖에 없어. 나약하다고 손가락질하는 게 아니야.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나쁜 거지.”
오빠의 그 말 한 마디가 꼭 내게 하는 말 같았다. 나는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
나조차 왜 이런 구질구질한 삶을 영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이고, 동물이면 응당 살고 싶어 한다고 들었다. 이대로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게오르기 오빠와 로만 오빠가 또 한 번 가족을 잃게 할 순 없었다.
식사를 마친 게오르기 오빠는 손을 흔들며 저택을 떠났다.
오늘 밤 오빠들은 남부의 항구 도시로 떠날 예정이었다. 예전에도 몇 번 휴양을 목적으로 방문한 적 있는 도시였다. 그러나 이제 오빠들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그 도시로 떠나게 되었다.
위르겐이 구해 준 직장이랬다. 씁쓸해서 가슴이 저며 왔다. 좋은 남자를 만난 것 같다던 게오르기 오빠의 말에 나는 부러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나는 게오르기 오빠와 다시 이별하게 되었다. 로만 오빠를 만나지 못한 게 아쉬웠다. 부득불 기차역이라도 찾아가고 싶었지만, 로만 오빠의 뜻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그날 저녁 위르겐이 돌아왔다. 나는 전처럼 위르겐의 눈을 피하는 대신 그를 똑똑히 응시하였다.
잘은 몰라도 그에게 내가 필요한 게 분명했다. 가족들의 직장까지 구해 줄 만큼 공을 들였으니 내가 간절히 필요한 모양이었다.
사실 벌써 벌벌 떨며 모든 걸 포기할 필요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내겐 2년가량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물론 위르겐과 부대끼며 버틸 것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긴 했지만.
“위르겐 씨. 팔이 너무 아파요.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붕대를 감아 두었음에도 붓기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가만히 있어도 식은땀이 날 만큼 고통스러웠다. 돈 몇 푼 아껴 보겠다고 병원에 가지 않고 버틴 내가 한심했다. 아무리 돈이 중요해도 몸만큼 중요할 수는 없는데.
“병원에 가야겠어요.”
“이 시간에? 다 닫았을 겁니다.”
“정 안 되면 왕진을 불러 주세요. 아무래도 팔이 부러진 것 같아요. 제가… 아는 번호가 없어서…… 전화만 부탁드려요. 돈은 제가 낼 테니까.”
그는 대답 없이 다가와 내 왼팔에 감긴 붕대를 풀었다. 나는 얌전하게 의자에 앉아 붕대를 푸는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
위르겐의 혈관이 불거진 길쭉한 맨손을 보는 건 드문 일이었다.
“부러지진 않았습니다.”
“어떻게 알아요?”
“군대를 다녀왔으니까. 엄살 피우지 말고 들어가세요.”
“고마워요.”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하며 옅게 웃었다.
위르겐은 그런 나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가 놀라는 게 무리도 아니었다.
“그간… 내가 목숨을 내놓은 게 무섭고 화가 나서…… 마냥 당신이 미웠었는데. 그래도 고마워요. 당신이 내 형제들의 직장까지 구해 줬다고 들었어요. 당신은 두 사람의 인생을 구원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물론 내 인생은 망쳤지만.”
이렇게 많은 투자를 한 위르겐이 얻어 갈 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미안하진 않았다. 죽음의 공포를 느껴 가며 몸까지 내어 줬다. 이만하면 내가 죄스러워할 건 없지 않나.
“고마워하지 마세요. 공정한 거래입니다. 서로 잃을 건 잃고 얻을 건 얻는.”
그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난 목숨을 잃을 거고……. 위르겐 씨는 무엇을 잃죠?”
“아버지를 잃을 겁니다.”
“네? 아버지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이 신경 쓸 건 없습니다.”
네. 그렇겠죠.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뒤 방을 향했다. 그러다 걸음을 멈췄다. 생각해 보니 팔이 아파서 식탁을 치우지 못했다.
“식탁…을 못 치웠네요. 미안해요. 지금은 팔이 아파서 못 치우겠어요. 내일 치울게요.”
“하루 만에 낫진 않을 겁니다.”
“그런가요?”
“그 팔을 하고 앞으로 어떻게 씻고 어떻게 일할 겁니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만일 이곳이 내 집이었다면 팔이 아무는 동안은 그냥 거지처럼 살았을 것이다. 제대로 씻지도 않고 침대에만 누워 있었겠지. 그러나 동거인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상대가 깔끔한 성격이라면 더더욱.
“부러진 게 아니라면 나흘 안에 나을 거예요. 그동안은 알아서 해결해 볼게요. 이것도… 우선 제가 최대한 치워 보죠.”
“도와 달라고 해 보세요.”
나는 미간을 좁혀 가며 얼굴을 구겼다. 감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소리였다. 위르겐은 뻣뻣한 표정 그대로였지만 난 아니었다. 표정을 숨길 수 없을 만큼 당혹스러웠다.
“길거리 모르는 놈 도움도 받는데 내 도움은 싫습니까?”
“어젠 상황이 급했고 지금은 아니잖아요. 정비소에 며칠 출근하지 못한다고 말해 둬서 시간이 많아요. 천천히 치우는 건 가능할 거예요. 폐 안 끼치게 노력할게요.”
“당신 보호자는 나예요.”
등골이 오싹할 만큼 싸늘한 목소리였다.
“당신 처지를 아직도 자각하지 못했습니까?”
보호자라니…! 성녀도 비웃을 소리를 하고 앉아 있다.
일찌감치 위르겐을 이해하는 걸 포기했다. 그에게선 매 순간 병적인 집념이 느껴졌다.
이미 스무 살인 내게 보호자 같은 게 필요할 리는 없었지만, 나는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말싸움할 바에는 원하는 걸 얻어 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당신이 내 보호자라면 내가 힐덴베흐크어를 배우는 걸 도와주세요. 사전이라도 하나 사 줘요. 나도 떠날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젠 힐덴베흐크 말을 배울 열정이 생겼다. 가급적 엘킨스키 안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보험을 들어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사전 하나 없이 낯선 언어를 익힐 수는 없다. 그런데 사전을 사려니 또 돈이 아까웠다. 홧김에 자전거를 사고 택시까지 타고 온 바람에 이젠 지출에 여유가 없었다. 은행에 맡겨 둔 돈이 있지만 조금도 꺼내 쓰고 싶지 않았다.
“선생을 붙이겠습니다.”
“팔을 못 쓸 동안은 당신네 말을 배우면 되겠군요. 고마워요.”
나는 그에게 웃어 보인 뒤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붕대를 풀고 팔을 쓰자 통증은 더더욱 거세졌고, 고통으로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등 뒤로 위르겐이 방으로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도와 달라는 말을 하라더니 도와주지 않고 떠난다. 그게 서운하지 않고 만족스러웠다.
아픈 팔로 식탁을 치우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위르겐 말로는 부러진 게 아니라지만 내일은 꼭 병원에 가 보기로 결심했다. 아. 병원……. 병원에 간다면 임신을 피할 방법도 알아볼 생각이었다.
식탁을 치우고 방으로 돌아갔다. 위르겐은 말끔한 실내복 차림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식탁은 다 치웠어요.”
“당신이 치울 필요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아침마다 가정부가 옵니다.”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았느냐 따져 물었다. 그러자 위르겐은 당신이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면 가정부가 올 것을 말해 줬을 거라 대답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냥 소리 내어 웃었다.
***
날이 밝았다.
애석하게도 나는 위르겐과 ‘함께’ 병원을 찾게 되었다.
위르겐이 차 키를 들고 나를 따라나섰을 때 억장이 무너지는 줄만 알았다. 의사에게 피임에 대해 묻고 싶었는데 낭패였다.
“골절입니다. 근육도 파열됐고요. 다행히 인대는 멀쩡합니다.”
“골절이요?”
“양쪽 팔에 금이 갔어요. 부러진 건 아니니 금방 나을 겁니다. 그런데 어쩌다 팔을 다치신 겁니까? 거기다 온몸에 상처가 많군요. 지금 보니 얼굴에도…. 혹시……?”
의사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위르겐을 올려다보았다. 의사가 무얼 의심하는지 빤히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