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23
“뭐?”
“죄송합니다, 아버지.”
하나도 죄송해 보이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는 질겁하며 포크와 나이프를 떨어트렸다.
“무슨 소리예요, 위르겐?”
“숨길 것 없어요. 진작 눈치챘습니다.”
“의사 앞에서 진단받은 적 없어. 멋대로 결론 내리지 말아요.”
끔찍하다. 정말 최악이다. 나는 울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만. 결론적으로 문란하게 몸 뒤섞은 건 맞단 겐가?”
“그게 아니에요. 전….”
“또 위르겐을 탓하려고 하나. 내 아들놈 성정 정도는 아네. 위르겐 저건… 여자를 곁에 둘 놈이 아니네. 아가씨가 얼마나 달라붙었으면 저게…….”
쯧쯧. 귄터가 두어 번 혀를 찼다.
“스베틀라나. 철없이 좋은 시절을 남자 때문에 낭비하지 말게.”
“탓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이에요. 제가 아니라… 그러니까…….”
“그렇게나 저놈한테 매달린 게 부끄러우면 이만 그만두게. 진심으로 하는 충고일세.”
이 대화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다. 위르겐이 뭐라도 좀 말해 주길 기다렸지만, 그는 늘 중요한 순간에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보수적인 부모님을 둔 젊은이들의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우리 윗세대는 결혼 전 남녀가 몸을 뒹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부친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는 위르겐이 부러워서 울고 싶어졌다. 위르겐에게는 부모가 남아 있었다.
“총리님. 전 정숙해요. 정숙하지 못한 건 총리님의 아드님이세요.”
그래서 내가 무얼 말하고 싶은지조차 잊었다. 정숙하다는 나의 말을 들은 귄터는 대답도 없이 고기를 썰고 입에 넣었다. 그는 어쩐지 무척이나 피로해 보였다.
“결혼할 거면 차라리 빨리하는 게 낫겠군.”
“…….”
“정말 임신인가?”
귄터가 나를 훑을 때 나도 모르게 아랫배를 응시했다. 아니에요. 아니라고 했잖아요. 아직 확실한 건 없다는데 왜 멋대로 진단하세요? 속으로 내지르는 아우성은 고장 난 시계보다도 무용했다.
“우길 수 있을 시기가 좋겠군. 위르겐, 네 아버지는 독실한 신자다.”
“…….”
“네 눈에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 눈에는 그래야 해.”
“최대한 빨리 결혼식을 치르겠습니다.”
“빌어먹을……. 끝까지 네놈은 날 성가시게 만드는구나.”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음식이 맛이 좋아요.”
겨우 고기 두 조각을 먹은 주제에 꺼낸 뻔뻔한 일격이었다.
“…많이 드시게.”
“노력해 볼게요. 아…버님.”
빨리 먹으면 빨리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릇을 순식간에 비웠고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취기가 오른 귄터는 말수가 급격히 적어졌다. 결혼식 장소와 날짜에 관해 짤막하게 이야기한 뒤 우리는 식사를 마쳤다.
귄터는 중년의 나이치곤 상당히 건장했고 여전히 군인 일을 하는 것처럼 근육이 붙어 있었다. 식후에 시가를 물고 연기를 내뱉는 모습은 우리네 서기장과 퍽 비슷했다. 더는 군인이 아니라 정치인이라더니 여전히 살갗이 불그스름하게 그을린 것이 조금 어색했다. 서구의 정치인들은 죄다 허여멀건 했으니까.
귄터는 위르겐이 쓰던 방을 알려 주겠다며 나를 안내해 줬다. 정말 사랑에 빠져 덜컥 임신까지 해 버린 뒤 하는 결혼이었다면 설렘에 가슴을 떨었겠으나, 실상 피로만 몰려왔다. 나와 귄터, 그리고 위르겐까지 전부 지친 얼굴이었다.
위르겐이 쓰는 방은 늘 구조가 비슷한 모양이었다. 꽉 잡힌 균형. 강박적이고 어두운 색감.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액자가 곳곳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귄터가 자리를 비켜 주겠다며 나가자마자, 나는 황급히 액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린 위르겐, 옛날 위르겐…. 위르겐……. 혹시라도 나와 연관점이 있다면…….
“이건 몇 살 때예요?”
“아마도 일곱 살 즈음일 겁니다.”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위르겐은 친탁을 한 건지 어머니를 그다지 닮지는 않았다.
건장한 체격과 고집스러운 인상을 가진 그의 어머니는 꽤 미인이었다. 베레모를 쓰고 멜빵바지를 입은 위르겐은 지금과 달리 제법 귀엽고 예쁘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지금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사나웠다. 쪼끄만 게 눈빛이 얼마나 사나운지 커다란 흰색 개를 껴안고 있었는데 개가 조금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이건…?”
“열 살쯤.”
총을 든 군인인 아버지와 찍은 사진. 이 즈음 저놈들이 우리 민족을 포함한 열등 민족을 말살하겠다는 계획을 짰을 것이다. 역겹다는 생각에 자세히 보지 못하고 급하게 다른 사진을 찾았다.
“어머니는 언제 돌아가신 거예요?”
성장 과정이 찍힌 사진 속 어머니가 어느 시점부터 부재했다.
“열두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병으로?”
“전쟁 때 폭격으로.”
나는 고요히 애도했다. 폭격이라면 나 또한 겪어 본 적 있었다.
귀가 먹먹할 만큼 째지는 사이렌이 울리면 한바탕 난리가 난다. 하늘을 채운 전투기는 순식간에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었다.
나는 석탄처럼 그을린 사람들을 지나치며 운이 좋았다고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팔다리가 잘린 채 널브러진 사람들이나, 얼어붙은 시체가 점차 익숙해졌다. 폭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조차도 가슴속 어딘가를 죽여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사진 속에 담긴 위르겐의 인생은 그다지 특별한 게 없어 보였다. 승마하는 사진, 졸업식 사진, 군인일 시절 동료들과 찍은 사진……. 비싼 취미를 가지고 좋은 학교를 다니는 전형적인 상류층 자제의 모습이었다.
조금 의외였다. 위르겐 곁에 이런 사진을 찍어 주는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것도, 그에게 추억이 담긴 사진을 액자에 담을 줄 아는 정성이 존재한다는 것도.
까닭도 없이 위르겐이 힘들게 자랐을 거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고난도 없이 사람이 그토록 성마를 수는 없는 법인데.
“형제들인가요?”
“예.”
마지막 액자였다. 질이 썩 좋지 않아 위르겐을 찾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머리채 붙잡힌 사람이 당신이에요?”
몸집 큰 형한테 머리채를 붙잡힌 채 찡그린 사람이 아무리 봐도 위르겐이었다. 형…. 위르겐에게 형이 있었던가. 분명 장남이라고 했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유심히 사진을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그의 형이 맞는 것 같았다.
“예.”
“형님이 짓궂은 편이었나 봐요. 그런데 왜 셋이 아니라 넷이에요? 위르겐 씨는 삼 형제 아니었나요?”
“형제 한 명은 죽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동정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이유를 묻고 심정을 물으며 기억을 되새김질하게 하는 건 좋지 못하다는 걸 알았다.
“내 사진이나 볼 거면 이만 가죠.”
위르겐이 껄끄럽다는 듯 목소리를 낮춰 읊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사람들의 사진을 보는 게 껄끄러울 수 있었다. 어머니의 사진 한 장 못 챙긴 나는 못내 그가 부러웠지만.
***
귄터는 저택을 떠나기 전 우리에게 초대장을 한 장 쥐여 주었다.
“눈도장 정도는 찍어 두는 게 좋을 거네.”
은박을 입힌 화사한 초대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귄터는 위르겐과 내 관계를 인정해 줄 생각인 건가? 인정 따윌 받아 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 차라리 반대나 하실 것을.
헤어질 땐 가짜 시아버지와 포옹으로 인사했다. 다정한 포옹은 아니었고 지도자답게 억세고 단단한 포옹이었다.
위르겐과 달리 따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그 때문이었을까?
***
집에 오자마자 위르겐의 뺨을 갈겼다. 얼굴이 돌아갈 만큼 세게 후려쳤기에 그의 입술이 터졌다. 위르겐은 손가락으로 검붉은 피를 쓸어 확인하더니 표정을 굳혔다. 그 모습에 나는 겁을 먹고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당신 멋대로 판단하지 마세요. 내가 의사한테 진단받았어? 아니잖아요. 당신 아버지 앞에서 어떻게 감히… 나를 그런 식으로…….”
위르겐의 행태가 치가 떨릴 만큼 불유쾌했다. 임산부가 되어 배가 부른 나를 상상하자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를 가르고 나올 핏덩이를 생각하자 세상이 핑핑 돌았다.
“진단받고 싶으면 받든가.”
“…….”
“당장 왕진 불러 줘요?”
위르겐은 나를 향해 다가와 내 양어깨를 아프도록 부여잡았다. 나는 그의 형형한 안광에 겁을 먹고 숨을 들이켰다.
“당신 말마따나 우린 거래했는데 뭐가 그렇게 억울하지?”
“…….”
“수락한 건 당신입니다. 이제 스볘타 당신도 떼쓰면 그만인 어린애가 아니잖아요.”
전부 맞는 말이다. 나는 눈에 힘을 바싹 준 뒤 이를 악물었다. 원래 내가 이 지경은 아니었었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멍청해진 걸까?
“정확하지 않아요. 여자들 몸은 제멋대로 날뛸 때가 있어서… 그래서… 한 번쯤 건너뛸 수도 있고…. 그러니 임신이 아닐지도…….”
침착한 척 반박하다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니까 진단받으세요.”
“아니요. 기다리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될 텐데.”
“그럼 받아들여요.”
받아들이라니. 고압적인 명령에 팔다리가 저려 오는 것만 같았다. 위르겐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우울했다.
“당신이 아니라… 언젠가 쵸마의 애를 가지고 싶었어요.”
그가 아르춈의 이야기를 하는 걸 싫어한다는 걸 상기하며 꺼낸 이야기였다. 그의 성질을 긁고 싶었다.
“위르겐, 이미 내 인생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어요.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죠? 난 너무 무서운데… 당신이 너무 멀쩡한 게 짜증 나요. 이런 건 공평하지 않잖아요.”
이번에도 아르춈처럼 나를 구해 줄 사람이 생길까? 아니. 생기지 않을 것이다. 도움을 기다릴 게 아니라 내가 힘을 내서 벗어나야 한다. 혼자 도망치는 건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오빠들이다. 오빠들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데 갈피가 보이질 않았다.
나는 열다섯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세상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
“애를 가진 게 문제가 아니라 내 애를 가진 게 문제인 겁니까?”
“그런 것 같아요. 아니… 그래요. 당신 애인 게 문제예요.”
아기라면 언젠가 가질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을 만드는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말이다.
내게 자식은 어쩌면 가족이라는 기틀을 되찾기 위해 필요한 존재였다. 분리된 철판에 못을 박아 넣듯…. 남녀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기가 가족의 형태를 고정한다고 믿어 왔다.
나는 대다수의 여자들이 그러하듯 오래전부터 임신과 출산을 당연히 여기고 살아왔었다.
그러나 이토록 절망스러운 건 아기가 위르겐의 아기이기 때문이다. 도망칠 때 애를 데리고 도망쳐야 할까? 아니면 그의 호화스러운 집에 남겨 두고 떠나야 할까? 그럼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보다도 더 망가질 수 있다는 걸까? 정말로?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요?”
저런 질문을 진지한 얼굴로 던지는 위르겐이 경악스럽다.
“감히… 당신이 사랑을 입에 담아요?”
“그래도 노력해 보세요.”
드디어 위르겐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어깨가 욱신거렸다. 아픈 어깨를 문지르다 위르겐과 눈이 마주쳤다. 제발, 제발. 그딴 얼굴 하지 마.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위르겐. 설마 나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건가요?”
“사랑해요.”
증오한다고 지껄일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냉혹한 음성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불안하다. 무섭다.
“의사 불러 진단받기 싫으면 마세요. 그런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당신은 어차피 어느 때가 되었건 내 애를 가질 겁니다.”
그가 내 아랫배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옛 기사처럼 몸을 낮춰 내 허리를 붙잡곤 찬찬히 아랫배에 입을 맞췄다.
나는 그 광경에 기겁하여 뒷걸음질을 치다 다리가 엉켜 바닥에 널브러졌다. 위르겐은 그런 나를 일으켜 줄 생각은 않고, 외려 발목을 잡아당겼다. 그에게 질질 끌려가지 않기 위해 애를 쓰다 손톱 밑이 전부 상해 버렸다.
결국 나는 위르겐의 품에 안겨 헐떡이는 처지가 되었다. 익숙해진 그의 남체가 틈 없이 부대끼며 나를 옭아맸다.
“아, 스볘타.”
나를 내려다보는 위르겐은 답지 않게 다정한 얼굴이었다. 눈을 접으며 웃는 그의 잿빛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왜… 웃는 거예요?”
위르겐이 나를 사랑한다고? 그는 잔인할 만큼 태연하고 뻔뻔했다. 누군가 내 심장을 뜯어낸 기분이었다.
전처럼 옷을 찢어발기진 않았지만, 원피스 단추를 끄르는 그의 손길은 갈급했다.
“스볘타. 당신이 내게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군다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잖아.”
위르겐은 입술을 끌어 올려 조소했다. 나는 창백하게 질린 위르겐을 바라보다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나를 샅샅이 벗겨 낸 뒤, 음미하듯 알몸을 훑는 그가 징그러웠다.
코앞에서 위르겐의 짐승 같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그가 내게 품은 감정이 흥분인지 분노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아르춈을 그 입에 담아 봐요.”
그는 나를 일으켜 앉힌 뒤,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젖무덤을 간질이는 그의 짙은 고동색 머리칼이 경련하듯 요동쳤다. 위르겐은 흐느끼듯 신음하다, 말캉한 젖가슴을 움켜쥐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일말의 배려도 없는 폭력적인 손길에 나는 고통으로 신음했다.
“내 인생을 훔치고도 뻔뻔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