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34
“혀?”
“혀 깨물었어요. 피… 피 나는 것 같은데…….”
정말 아픈지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위르겐은 눈을 부릅뜬 채 굳었다.
“하…….”
그러다 결국은.
“하하하!”
결국은 웃음을 터트렸다. 식당 안의 사람들이 전부 그를 쳐다볼 만큼 크게 웃었다. 그는 주먹으로 식탁을 탕탕 쳐 대기까지 했다. 하마터면 국물을 담은 스볘타의 그릇이 엎어질 뻔했다.
스볘타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자지러지게 웃는 그를 찌푸린 채 바라보다 작게 투덜댔다.
“위르겐 씨는 평생 혀 안 깨물 줄 아나 보죠?”
혀가 둔해져서인지 잠시간 스볘타는 어린애처럼 발음이 어눌했다.
세월은 그런 식으로 흘렀다. 기억하길 기다렸으나 스볘타가 그를 기억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위르겐은 초조했다가도 안도했고 안도했다가도 경기했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었을 무렵. 수면제를 삼켰다가 말았다가를 반복하며 그는 도둑놈처럼 고국으로 엘킨스키의 자료를 빼돌리는 것에 열중했다. 스볘타를 찾아가는 일도 줄어들었고, 잠들지 못하는 날 또한 줄어 갔다.
시간이 흐르면 추위나 악취 따위가 무뎌지듯, 위르겐의 죄책감도 차츰 무뎌지고 있었다. 이따금 정말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감까지 일었다. 뭐가 됐건 끝을 내고 그만두고 싶었다. 죽은 형제의 얼굴은 지워질 것처럼 희미했다. 사진이 없었다면 아달베르트의 인영조차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은 다시 증오나 죄책감이 불타기도 했다. 식었다가도 해가 들면 달궈지는 대지처럼 위르겐 또한 식고 달궈지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면 잠을 자지 못했고 식욕을 잃었으며 스볘타를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
해가 짧아졌다.
위르겐은 드물게 술에 취해 있었다. 그날은 형의 기일이었다.
국화꽃 한 다발을 사서 든 그는 저도 모르게 스볘타의 정비소를 찾았다. 이미 해가 진 뒤였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정비소 특유의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빛이 번진 곳으로 향하던 위르겐이 뚝 걸음을 멈췄다.
“아르춈…….”
울음기를 베어 문 스볘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르겐의 앞으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서로를 껴안은 스볘타와 아르춈은 언뜻 연인처럼 보였다. 아니. 어쩌면 이미 연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고심해 빚어낸 조각상처럼 보였다. 그 때문에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의 가슴팍이 아프도록 요동치기 시작했다.
“괜찮아.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할 건 아르춈이 아닌 위르겐, 자신이었다. 스볘타가 가진 전부가 당장은 그의 것이었다.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죽는 걸 봐 주지도 못했어요.”
위르겐의 영역이었다. 아르춈은 잠시 쓰인 도구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됐다. 가슴속이 고통스럽게 들끓었다. 괴로웠다. 실로 오랜 세월 괴로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괴로웠던 적은 없었다. 어딘가를 끄집어낸 것처럼 공허했고 명치를 얻어맞은 것처럼 숨통이 막혔다.
“아르춈. 이상해요. 왜 소중한 것들은 전부 떠나가는 걸까요…?”
아르춈에게 주먹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아르춈의 뼈라도 부러뜨려 놓는다면 분이 풀릴지도 모른다. 목을 졸라 죽이고 내장까지 발라내면 이 역한 분노가 가라앉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위르겐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들의 그림자를 훔쳐보았다. 애정이 깃든 편지를 뜯어 훔쳐 읽었던 어느 순간처럼 비참했다.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씨씨도 그렇고…….”
내용을 듣고 보니 아무래도 정비소에서 키우던 강아지인 씨씨가 죽은 모양이었다.
“무서워요. 전부 내가 잘못해서 떠나가는 것 같아…….”
그녀는 가장 약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부 떠나갔다는 현실 속에서 내내 괴로워했어도 결코 드러내는 법이 없었는데 그걸 아르춈에게 내보였다.
몇 해를 봐 왔지만 위르겐에겐 결코 허락된 적 없는 내밀한 속내였다.
그녀가 약한 티를 내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위르겐은 잘 알고 있었다. 무른 면을 내보이면 잡아먹힐 거라고 굳게 믿었기에 독기만 내세울 줄 알았던 여자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남들 앞에서는 괜찮다고 웃는 여자였다. 위로받을 바에는 차라리 뿌리치는 여자였다.
그런데 그 스볘타가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이 주는 충격에 위르겐은 석상처럼 굳었다.
“가지 마세요. 아르춈….”
“가지 않아. 스볘타. 그러니까 진정해.”
위르겐은 여전히 굳은 낯을 하고 있었다. 조금도 일그러지지 않고 마냥 성말라 보였기에 뇌를 갈라 속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의 미묘한 변화를 알지 못할 것이다.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눈가가 벌게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간신히 붙잡았던 이성을 잃고 당장이라도……
당장이라도…….
벌건 눈을 한 위르겐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쥐새끼처럼 숨어 몰래 그들을 지켜보는 게 애석하게도 최선이었다.
빌어먹게도 잊고 있었다. 일이 끝나면 떨어져 나가기로 거래를 한 주제에 파렴치하게 그 곁에 붙어 있는 아르춈도 스볘타를 마음에 품을 수 있는 것이다. 세상 모든 놈들이 그러했다. 스볘타는 어쨌거나 겉보기에는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사슴 같은 목덜미에 잇자국을 내고 싶은 충동을 다른 사내들 또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위르겐은 스볘타를 철창 안에 가둬 두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 꼴을 목격한 이후 이미 치열하게 자신만의 잔인한 계획을 세운 뒤였다.
창살로 틀어막은 방 속에 가두어 다른 그 누구도 넘볼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스볘타의 몸이 부서지도록 추삽질하고 싶었다. 어차피 그녀는 그의 죄수였다. 그러니 그래도 괜찮았다.
추잡하고 초라하다.
고작 저런 년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고 절망하고 말았다는 점이 그러했다.
그런데 모든 일이 이미 늦지 않았는가. 위르겐은 진실로 오랜 세월 노력해 왔다. 우악스레 움켜쥔 바람에 짓무른 국화꽃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져 짓밟았다. 죽은 형에게 바쳤어야 할 국화꽃이 질척한 흙바닥을 초라하게 장식했다.
위르겐은 짐승처럼 씩씩댔다. 좀처럼 노기가 가라앉질 않았다.
3년.
그 안에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찌해야 할까. 기억한다면 어찌 되는 것일까. 그럼 정말 영영 저 여자를 못 보게 될 텐데.
그러니까 충동이라는 것은 본래 한순간이다. 그간 쌓아 왔던 것들을 순식간에 부숴 넣을 만큼의 강한 충격이나 격돌.
영영 못 보게 된다. 그의 인생에서 떠나는 것이다. 이제 더는 저 여자를 곁에 두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야 전부 끝낸다는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섬뜩했다. 끝을 내고 싶어 했던 주제에 그걸 가정한 적이 없었다.
스볘타가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익숙하게 아침부터 밤까지 곱씹고 원망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스볘타를 놓아줄 생각 같은 건 이미 추호도 없었다. 오래전 스볘타는 그의 일부가 되었다. 가슴께가 아프다는 이유로 심장을 아예 도려낼 수 없듯 그녀 또한 도려낼 수 없는 그의 일부였다. 익숙하게 그를 넘나드는 공기였다.
차라리 스볘타가 기억해 내지 못한다면…….
어차피 스베틀라나는 영영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이미 위르겐과 아달베르트를 여덟 살의 어느 일상으로 남겨 두었다가 지웠을 터였다. 이제 와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 그럼 마땅히 벌해야지. 마땅히……. 파렴치한 죄인을 벌하는데 자책할 것 있나? 망설일 것 있나? 단순한 논리가 그를 진정시켰다.
위르겐은 발걸음을 옮겼다. 정비소의 불빛이 정면으로 보였다. 스볘타와 아르춈 또한 정면으로 보였다.
술잔을 움켜쥔 스볘타는 눈물 맺힌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쵸마. 자네는 나와 선약이 있지 않았나? 그런데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위르겐이 아르춈을 강한 힘으로 끌어당겼다.
“……그래.”
아르춈이 위르겐의 건조한 회안을 피했다.
위르겐은 아르춈의 약점을 붙잡고 있었다. 힐덴베흐크와 내통했다는 증거가 이미 위르겐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럼에도 위르겐의 뜻을 어기고 이 여자를 보러 온 것이다.
그럼 목숨까지 내건 사랑인가? 아르춈의 애틋한 얼굴을 마주하자 분노가 더더욱 거세졌다.
“내가 허튼짓을 해 버리기 전에.”
실수였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복수하려다 더한 수렁에 빠지고야 말았다. 지난 9년의 세월이 스볘타를 이해하고 동정하게 만들었다. 거기서 끝냈어야 했다.
그런데 가지고 싶었다. 두고 갈 용기가 없었다. 매 순간 스볘타가 내뱉는 숨결까지도 쥐고 싶었다. 열망의 깊이가 지나쳐 무시할 수가 없었다. 열망을 놓는 순간 깊은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3년이 흘렀다.
스볘타는 여전했다. 오래전 묻어 두었던 기억을 꺼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위르겐은 차라리 환희했다.
스볘타를 용서하지 않아도 될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를 용서하고 엘킨스키를 떠날 이유가 사라졌다.
기대감에 심장이 달뜨게 떨렸다.
“스베틀라나 안토노브나. 나와 결혼해서 해외로 떠납시다.”
손깍지를 낀 손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반지를 꺼내 보였을 때 여자는 기뻐하지 않았다. 알았다. 진작 알았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청혼에 기뻐하지 않았다.
스볘타는 애초에 그와 같은 색의 마음을 띠었던 적이 없었다. 비할 수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저를 대한다는 것을 몰랐던 적 없었다.
“당신…… 날 놀리려고 찾아왔군요.”
짤막한 대답은 분명한 거절이었다. 단호하다 못해 그녀는 위르겐의 행태에 분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위르겐은 그녀에게 달콤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그가 바라는 반응을 보여 주지 않을 테니까.
위르겐은 가족밖에 안 남은 여자에게 가족의 사진을 내던졌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사진을 응시하는 여자의 얼굴이 우울했다. 기어이 터트린 눈물을 빗물처럼 뚝뚝 떨어트릴 때, 위르겐은 길 잃은 아이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젠 스스로가 무얼 원하는지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스볘타의 행동 하나하나에 흔들리는 스스로가 경멸스러웠을 뿐이다.
“도와주세요. 3년간 우정을… 봐서… 아니요. 무상으로 요구하진 않겠어요. 평생에 걸쳐서라도 은혜를 갚을 테니……. 도대체 왜…… 어째서… 이제야… 이걸…….”
뚝뚝 말이 끊어졌지만 분명히 전달되었다.
우정. 우정이라고 했다. 감히…….
갚겠다고 말한다. 상대가 아르춈이었더라면 꺼내지 않았을 말들이었다.
“글쎄요. 증오 때문이려나.”
그녀의 형제들이 담긴 사진을 내던졌을 때, 비로소 그를 응시하는 스볘타의 눈동자에도 감정이 담겼다. 그간 가구를 보듯 무던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녀의 부라린 눈이 사납게 일렁였고, 그 속에 담긴 것은……
증오였다.
한순간 열두 살의 과거로 돌아온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스베틀라나의 눈에 새겨진 증오가 선명했다. 번뜩이는 하늘색 눈동자가 맹렬했다.
“고마워요, 위르겐 씨.”
그런데도 스볘타는 그를 거절하지 못했다. 결혼이라는 건 일생이 걸린 일이었음에도 그녀는 그토록 쉽게 받아들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스볘타는 단 한 순간도 가족들을 버린 적이 없었다. 유약하기 짝이 없어 징징대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어미조차 어미라고 보듬었고, 가축처럼 농노를 사고팔던 징그러운 아비 또한 사랑했고, 그 아비를 닮아 잔악한 세르게이 또한 사랑했다.
비틀린 감정이 밀려들었다.
[사랑해.]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최면이라도 걸린 양 같은 말이 반복되어 들렸다. 사랑한다는 말과 대비되는 눈앞의 증오는 더더욱 오물처럼 역겹게 느껴졌다.
“결혼 하나로 값을 치르기엔 내가 당신한테 관심이 없습니다.”
위르겐은 익숙하게 감정을 숨기고 뇌까렸다.
“제가 더 치러야 할 값이 뭐죠?”
“우선 자식이 필요합니다.”
그의 머릿속은 캄캄한 어둠 속에 잠식되었다. 막연히 가졌던 심연 속의 꿈을 끄집어낸 바람에 그러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낳고 살아가는 평범한 삶, 영원한 종속, 살아오는 내내 겪어 보지 못했던 애정이 주는 기쁨.
사실은 그런 걸 원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간 남몰래 그렸던 것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단란하고, 안온한 곳에서 너와 함께…….
그걸 내뱉은 뒤에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을 만큼 그는 정신이 나가 있었다.
내가 감히 무슨 말을 지껄인 거지? 위르겐은 치미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절망했다.
실수를 깨달은 위르겐은 한 마디를 더 내뱉었다. 본래 꺼내려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