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38
무서워.
그러니까 차라리 당신이 정말 끔찍한 괴물이었으면 좋겠어.
악몽을 꿀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잠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
적막한 11월의 엘킨스키, 시야니예 사의 정비소였다.
이제 더는 성탄절이 없기에 우리는 연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겨울은 항상 같았다. 세상은 흰 눈에 덮이고, 우리는 부츠를 꺼내 신는다. 겨울은 언제나 끔찍하다.
아버지가 처형당하던 계절도 겨울, 어머니와 내가 열차를 타고 수용소를 떠나오던 계절도 겨울, 오빠들이 죄수가 된 계절도 겨울.
담배에 불을 붙였다. 희뿌연 연기를 내뱉으며 힘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위르겐 씨는.”
외로움은 파도처럼 밀려와 사람을 익사시켰다. 그 무렵의 나는 외로움에 떨고 있었다.
“절 싫어하시나요?”
아버지의 기일이 며칠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국화꽃을 사 들고 찾아갈 묘지도 없었다. 아버지가 죽은 날은 혁명 기념일이었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기념했다. 나는 사람들을 이해하려 애를 썼다. 아버지가 얼마나 끔찍한 사람인지 상기하려 노력했다.
이미 죽은 아버지보다는 나와 함께 살아갈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11월입니다.”
담백한 목소리였다.
“11월에는 그 누구도 당신처럼 다니지 않습니다.”
장갑 하나 구할 형편도 없다는 걸 들켜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위르겐이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 내게 건넸다.
“끼세요.”
나는 그가 건넨 장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차피 면장갑을 껴야 해서…….”
장갑을 벗은 위르겐의 손은 길고 곧았다. 혈관과 힘줄이 불거져 있었지만 뼈마디가 굵지 않아 우아했다. 그의 손끝이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쳤다. 그는 마치 시간을 재는 것만 같았다.
“나한텐 작습니다.”
그가 내게로 장갑을 밀어 냈다. 열없는 행동이었다.
“고마워요.”
낯설었던 남자가 익숙해졌음을 깨달은 건 그쯤이었다. 지겹도록 찾아왔지만 그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외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르겐, 안녕히 가세요.”
미워해야 마땅할 텐데.
그가 플라스틱 테이블 위에 두고 간 장갑을 붙잡아 들었다. 가죽 장갑을 손에 끼워 넣었다. 부드럽고 투박한 장갑 속에는 여전히 그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따뜻하기보다는 뜨거웠다.
내게는 터무니없이 큰 장갑을 주고 멀어지는 위르겐을 응시하였다.
왜 미워해야 한다고 생각했더라……. 당신의 행동이, 옷차림이 군인 같아서. 그것도 아니면 당신이 힐덴베흐크 남자라서?
소리가 멎으며 사방이 고요해졌다. 그 탓에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박동하는 심장이 전신을 뒤흔드는 것만 같았다.
“스볘타. 드디어 장갑을 끼고 왔구나.”
스미르노프 씨가 호탕하게 웃으며 작업용 면장갑을 건넸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얼굴을 붉혔다.
빠지는 것도 모를 만큼 부드러운 늪 속으로 걸음을 디딘 것만 같았다.
일을 마친 뒤 정비소를 나오자 노을이 등 뒤를 달궜다. 등진 햇살을 돌아보았다. 얼굴 위로 붉은 볕이 쏟아지자 눈이 부셨다.
가늘게 뜬 눈을 비벼 다시 한번 황혼을 감상했다. 분홍색 구름이 하늘을 헤엄치며 떠내려갔다.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웠다.
***
“방으로 들어가세요.”
위르겐은 온몸을 덜덜 떨며 잠든 나를 흔들어 깨웠다.
“위르겐?”
넥타이를 매고 겉옷까지 차려입은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현실감이 없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독한 항생제를 먹고 잠들었을 당신이 왜 나갈 채비를 한 걸까. 벽시계를 보기 위해 눈을 굴렸다.
너무 어두워 시계를 볼 수 없었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다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내내 울다 잠든 덕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현기증이 일었다.
“위르겐!”
독한 약을 처방했으니 운전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몸도 정상이 아닌데 이대로 나가게 둘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걸음을 빨리했다. 이미 몇 걸음이나 앞선 그를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현기증이 일어서 몸이 휘청거렸다. 그 순간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뛰지 마세요.”
다가온 그가 내 팔뚝을 붙잡았다. 팔을 휘감은 그의 손이 여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염증이 생겨 열이 오르는 것이다.
“당신이 정말 지독하게 밉지만…….”
마른침을 삼키며 그에게 붙잡힌 팔을 빼냈다.
“오늘은 위르겐 씨를 보낼 수 없어요.”
그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물어뜯었다.
“이해가 안 됩니다.”
“알아요.”
위르겐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렇지만 난 위르겐 씨와 달라요.”
온 힘을 다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의 눈길이 내 손가락에 엉겨 붙었다.
“오늘은 집에서 주무시고 가세요.”
그 순간 손을 붙잡혔다. 강한 악력이었다.
위르겐을 따라 침실로 끌려가는 내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르겐은 나를 침대 위로 밀친 뒤 겉옷을 벗고 넥타이를 풀었다.
“집에 계실 거죠?”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셔츠 차림으로 방을 나갔다.
날이 밝았을 때 위르겐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아주 긴 악몽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책상으로 몸을 끌고 가 만년필을 들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너무 오랫동안 오빠들과 편지를 주고받지 못했다. 만년필을 잡는 게 어색해서 촉이 삐걱거릴 정도였다.
안녕. 오빠. 잘 지내? 일은 할 만해? 언제 한번 직접 찾아가야 하는데…. 수용소에서보다는 물론 잘 지내겠지만 나는 오빠가 걱정돼.
의례적인 말들을 빠르게 써 내리다 그만두었다. 이런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내가 진짜 쓰고 싶은 말들은 따로 있었다.
나 너무 힘들어. 나 너무 무섭고 외로워. 지금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줄은 아는 거야? 결혼한다는 여동생을 챙기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떠난 거야? 어쩔 수 없이 떠난다는 건 알아. 위르겐이 손을 썼겠지. 하지만…….
편지에 쓸 원망과 투정들을 떠올리다 관두었다. 펜촉 아래로 검은 잉크가 형편없이 번졌다. 잉크로 젖은 편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은 뒤 다시 침대 위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아도 누워 있는 건 익숙한 일이 되어 버렸다.
내가 도망가면 오빠들은 다시 수용소에 갇힌 죄수 신세가 될까? 아예 외국으로 빼돌릴 수 있으면 빼돌리는 편이 좋을 텐데. 그런데 좀처럼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오빠들이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석방된 죄수가 통행증을 받는 건 법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만일 내가 부유했다면 뇌물을 먹여 가짜 신분증이라도 만들면 되었을 것이다. 돈이 없는 건 늘 서러웠지만 지금은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서러웠다. 지금 떠오르는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뒤에서 쫓아오는 군인들을 등지고 내달리는 것.
그런데 이미 몇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긴 오빠들더러 차마 그걸 시킬 수는 없었다. 모든 사실을 고백할 수도 없었다. 그럼 도대체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말 내 미래는 아무것도 없다는 건가.
내가 할 줄 아는 건 자동차를 고치는 일이었다. 그마저도 경력이 많은 스미르노프 씨가 훨씬 고수였다. 위르겐의 자동차에 장난질을 칠 배짱도 없었다.
결국 나는 편지를 쓰는 일을 포기하고 침대 위에 축 늘어졌다.
“스볘타 아가씨. 오늘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었나요?”
노크를 하고 들어온 나스챠가 상냥하게 물었다.
“손님이라뇨?”
“위르겐 경의 손님이라는데요. 젊은 아가씨 한 분이 찾아왔어요.”
“네?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위르겐이 없다는 말도 전하셨어요?”
“네. 아가씨를 뵙고 싶다고… 이름이 뭐였더라… 엘라 귄트허겐이라고…….”
“당연하지만 모르는 분이에요.”
“그럼 돌려보낼까요?”
위르겐의 젊은 여자 손님. 위르겐을 아는 사람.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들어오시라고 전해 주세요. 대신 이러고 나갈 수는 없으니까… 한 삼십 분만 기다려 달라고도 전해 주시고요.”
제대로 씻지 못한 바람에 머리는 엉망이었고, 씻지도 못한 와중에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을 리도 만무했다. 이대로 손님을 만나 위르겐을 골려 주는 것도 재밌는 일이겠지만 역시 내 체면이 상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스챠의 시중을 받아 간신히 구색을 갖추고 나니 벌써 삼십 분이 흘러 있었다.
응접실은 멀었다. 나는 집 안을 걸어 다니는 것조차 오랜만이었고, 그의 집을 제대로 살펴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응접실은 깨끗했다. 우아한 무늬가 새겨진 천 소파와 비단 벽지는 색이 잘 맞았다. 한편에 놓인 초를 꽂아 둔 피아노 위로는 섬세한 레이스 천이 깔려 있었다.
엘라 귄트허겐은 바로 그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하고 있었다.
연주를 끊고 싶지 않을 만큼 실력이 좋았다.
“안녕하세요, 귄트허겐 양.”
인사를 들은 그녀는 연주하던 것을 그만두지 않고 묵례하였다. 묵례를 하면서도 그녀의 손가락은 유연하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연주가 끝난 뒤 엘라는 흰색 레이스 장갑을 낀 뒤 악수를 청했다.
“엘라 폰 귄트허겐이에요.”
“스베틀라나 시클렌코바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귄트허겐 양. 스볘타라고 불러 주세요.”
“엘라라고 불러 줘요, 스볘타.”
염색한 금발의 단발머리를 화사한 생화로 장식한 그녀는 잡지에서나 볼법한 현대적인 미인이었다. 시원하게 뻗은 팔다리, 굽 높은 힐, 오동통한 입술과 귀엽게 굽은 콧마루, 둥근 얼굴. 아주 뛰어난 미인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눈길을 붙잡는 스타일이었다.
무엇보다 엘라는 외국 영화 속 주인공처럼 풍만한 가슴과 종아리를 전부 드러내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금도 천박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당당하고 우아해 보였다.
옷에는 관심이라곤 없던 나조차 감탄하게 만드는 타고난 감각이었다. 화려한 패턴도 상당한 노출도도 전혀 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토록 세련된 옷차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엘라에게선 서구권 여자 특유의 여유가 흘러넘쳤다.
“그나저나 스볘타는 말을 아주 잘하는군요. 배우기 어려웠을 텐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말을 아주 느리게 하는 걸 보면 내 애매한 외국어 실력을 파악한 것 같았다. 알아듣긴 알아들어도 작문 실력은 엉망이었고, 발음 또한 그만큼 엉망이었다.
“하루 종일 교본만 보니까요.”
그런데도 말 자체가 빨리 는 것은 사실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 방문하는 외국어 선생님이 진심으로 칭찬할 정도는 되었다.
“지겹겠다.”
“조금요.”
오래 서 있기가 꺼려져 엘라에겐 묻지도 않고 응접실에 놓여 있던 안락의자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런 귀족 아가씨를 대하려니 벌써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피곤했다. 귀족이라니. 한때는 내게도 귀족의 피가 분명 흘렀다지만 이제는 아득한 과거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