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4
“목숨까지 내준 마당에 위르겐 씨한테 질질 길 생각은 없는데…….”
나만 한 여자를 찾는 것도 어려울 거라는 경고였지만 위르겐에게는 그다지 스산하게 다가오진 않은 모양이었다.
“저 남자가 당신과 같이 당번입니까?”
“아니요. 그냥 호의로 도와주시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위르겐은 이고르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지갑을 열어 돈뭉치를 꺼내 아저씨에게 건넸다. 너무 당황한 나는 그를 말려야겠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선생님, 오늘만 부탁합니다. 저 아가씨와 볼일이 있어서요.”
정중히 건네는 두둑한 루블화를 거절할 수는 없었는지 아저씨는 돈을 주머니에 찔러 놓곤 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넌 뭐냐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게 부끄러워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였다. 좋아하는 이웃한테 이상한 오해를 받기는 싫었는데. 더 큰 문제는 그게 오해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무슨 짓이에요?”
순순히 그의 차를 향해 걸어갔지만, 속이 뒤틀려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고르 아저씨가 당신 하인도 아닌…….”
“돈을 주고 노동을 사고. 문제 있습니까?”
그를 지독한 공산주의자라고 여겼던 과거의 나를 향해 침을 뱉어 주고 싶었다. 위르겐은 그냥 지독한 인간이었다.
오늘 아저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그가 알 리가 없지만, 아저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오늘은 아저씨의 아들이 아픈데….
순간 지독한 현기증이 일며 세상이 점멸등처럼 깜빡였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을 깜박이자 깜빡거리던 눈앞이 그나마 잠잠해졌다. 어제부터 먹은 거라곤 반쯤 남긴 보르시와 술, 그리고 크바스가 전부였으니 현기증이 날 만도 했다.
“잘됐군요. 오후 출근이면 시간도 넉넉할 거고.”
“…….”
“스베틀라나 씨는 앞으로 최선을 다해 날 피할 텐데 내가 좋은 기회를 잡았습니다.”
위르겐에게 오후 출근이라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차 뒷자리에 타려는 날 잡아끌어 기어이 옆자리에 처박았다. 핸들에 몸이 부딪힐 만큼 우악스레 밀쳐진 나는 신음하며 간신히 기울어진 몸을 일으켰다.
“빌어먹을….”
편지에서 세료자 오빠가 뭐라 했었더라. ‘빌어먹을’ 교도관이 알몸으로 벗겨 내 채찍질까지 한댔지. 처음에는 걱정하지 말라고 편지를 보내던 오빠는 결국 이러다 뒤지게 생겼으니 소포로 음식이라도 좀 보내 달라는 애원을 써 보냈다. 어느 순간부터 오빠는 애원조차 관뒀지만.
어느덧 차에 탄 위르겐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똑똑한 발음으로 다시 한번 지껄였다.
“빌어먹을.”
위르겐에게 욕하지 말아야 하는데. 혹시 그가 마음을 바꿔서 오빠들을 안 빼내 주겠다고 하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내 인생을 강제해 버린 그가 증오스러웠다.
다행히 내 욕설을 듣고도 그는 반응이 없었다. 조용히 시동을 걸고 운전을 시작했을 뿐이다.
“어디로 가요?”
“어디가 좋겠습니까?”
“당신이 없는 곳이면 어디든 달갑겠어요.”
나는 말을 내뱉고 후회했다. 어찌 보면 공연한 분풀이다. 내 감정이 어떻건 간에 위르겐은 오빠들을 구해 줄 사람이었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던 춥고 황량한 벌판에서 일하고 있을 가여운 오빠들을……. 도대체 연방은 그 신도 버렸다던 쓰레기 땅을 개척해 어디다 써먹으려는 건가!
“죄송해요….”
“스볘타, 기죽을 것 없어요. 공정한 거래가 아닙니까?”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아서, 나는 실없이 웃지도 못했다.
“당신이 발 둔 시트 아래로 내 가방 보일 겁니다.”
“네.”
“가방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세요.”
나는 위르겐이 시키는 대로 그의 가방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검붉은 벨벳 재질의 케이스에는 우아한 금장식이 달려 있었다. 케이스를 열자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반지가 튀어나왔다. 섬세하게 세공된 나뭇잎 모양 반지는 언뜻 전설 속 요정들이나 낄 법한 생김새였다.
밋밋한 옷차림에 비해 반지 고르는 취향은 상당히 사치스러운 모양이었다.
“끼세요.”
나는 잠시간 반지를 쏘아보다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굳은살이 박인 손에는 썩 어울리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잘 맞았다.
“맞네요.”
“여자들 손가락은 거기서 거기니까. 케이스는 가지세요.”
“네.”
반지 케이스를 넉넉한 코트 주머니에 우악스레 껴 넣자, 꼴사납게 주머니가 튀어나왔다.
“난 뭐든 질질 끄는 건 질색입니다.”
“알고 있어요.”
손목시계를 항상 차고 다니면서 확인하는 사람다운 말이었다.
“술은 좀 끊으시지.”
“네?”
취한 티는 조금도 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술 냄새를 풍긴 모양이다. 입을 헹굴 시간도 없이 질질 끌려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당신이 못 끊는 술, 담배, 대마. 냄새가 죄다 역겹습니다.”
“그러세요?”
“끊어요.”
술, 담배, 대마. 인정하기 싫지만 내 인생을 지탱하는 세 가지 요소였다.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옆얼굴이라도 위르겐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싫었으니까. 냄새만 역겨울 나보다는 그가 더 최악이다.
겉가죽이 어떻건, 좋은 비누 냄새를 풍기건, 그의 속은 더럽게 썩어 있을 게 분명하다. 사람을 담보로 목숨을 앗아 가려는 사람보단 차라리 담배에 찌들어 사는 내가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 그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니.
“당신 밑구멍에까지 역한 내가 배어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저속한 말에도 나는 무덤덤했다. 저런 말들은 열다섯 때부터 많이 들어 와서 이젠 아프지도 않았다.
“그래도 내 아랫도리 핥아 보려는 남자들이 줄을 섰어요. 운이 좋네요, 위르겐 씨.”
다만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되갚아 주지 않는 건 내 성정에 영 맞지 않았다.
***
“여기가 어디예요?”
울창한 침엽수 숲을 지나자 단층짜리 석조 주택이 나타났다. 건물의 규모가 크고 시멘트 건물이 아닌 석조 건물이니 관공서로 쓰일 확률이 컸다. 연방이 사치스러운 주택들을 전부 관공서로 개조했으니까.
“혼인 신고부터 하려고요?”
“남들 보라고 하는 결혼인데 식을 안 올리겠습니까?”
“그럼 여기가 어딘데요?”
침엽수림 한가운데에 포장된 길이 나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사치스럽게 지어진 건물이 있다는 건 더 신기했다. 숲으로 둘러싸인 흰색 석조 건물은 꼭 옛날 영주의 성 같았다. 자동차 창문 틈새로 숲 특유의 향기가 퍼져 코끝을 찔렀다. 그간 도시에서만 지냈던 터라 숲에 온 건 정말 간만의 일이었다.
“내 집입니다.”
“…….”
“잠깐 임대해 사는 거지만.”
나는 차에서 내리는 위르겐을 따라 얼떨결에 내렸지만 영문을 몰라 당황스러웠다. 엉거주춤 서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뇌까렸다.
“한동안은 당신 집이기도 할 거고요.”
“무슨…?”
“조만간 졸업식이 있을 겁니다. 오세요. 예쁘게 입고.”
차 문을 잠근 위르겐은 넓은 보폭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마치 숲에 널리고 널린 나무 중 하나가 된 것처럼 대지에 콕 박혀선 그를 응시했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아무리 고민해도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러나 나는 곧 정신을 차리고 그의 집이라는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아무쪼록 수용소에 있을 오빠들보단 나은 신세니까.
저택의 외관은 언뜻 18세기의 고결한 귀족이 살 법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내관은 그렇지 못했다. 외관에 비해 내관은 초라하고 누추했다. 넓은 실내에 가구가 몇 없어서 묘하게 내가 살고 있는 공용 아파트가 떠오를 정도였다.
나는 위르겐을 뒤따라 걸으며 페인트칠도 제대로 하지 않은 벽을 손끝으로 더듬어 보았다. 그래도 청소를 소홀히 한 건 아닌지 먼지는 묻어나지 않았다.
“화장실은 두 개죠?”
그간 공용 화장실을 써 왔다지만, 저 남자와는 화장실을 죽어도 공유하기 싫었다.
“세 개 있습니다.”
“당신 졸업식 전까지만 여기서 살면 되나요?”
위르겐이 유령처럼 보일 만큼 복도는 으스스했다. 20세기에 전등이 아닌 양초로 밝힌 복도라니…! 게다가 페인트칠이 죄다 벗겨져 있었다. 복도를 거닐며 나는 양초의 개수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복도가 꽤 긴 걸 보면 방이 많은 모양이다.
“졸업 후엔 고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
“얼굴 보니 여기가 싫은 것 같은데 조금만 참으세요. 곧 뜰 거니까.”
그럼 그 전에 도망쳐야겠군. 섬광처럼 생각이 스쳤다. 낯선 타국에서 도망치는 것보단 내 나라에서 도망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다못해 힐덴베흐크어라도 안다면 모를까. 내가 할 줄 아는 힐덴베흐크어는 기껏해야 인사말 정도가 다였다.
“열심히 공부해야겠어요. 당신 아내로서 구색을 갖추려면…….”
빈말을 내뱉은 나는 방문을 열기 위해 멈춰 선 위르겐을 따라 걸음을 멈췄다.
“선생이 필요하면 말하세요.”
“선생씩이나… 독학으로 돼요.”
“외국어를?”
“정 그럼 붙여 주셔도 좋고요.”
위르겐은 녹이 슨 열쇠로 문을 따 냈다. 이미 바깥에서 문을 한 번 잠갔는데 왜 또 잠갔는지가 의문이었다.
“방문까지 굳이 왜 잠가 두셨어요?”
“외출할 때 문을 잠그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 방이 제 방인가요?”
“들어가죠.”
내 등을 미는 위르겐의 힘이 거세서 덜컥 겁이 났다. 생각해 보면 이 숲에, 아니 이 집에는 위르겐과 나뿐이었다.
오소소 소름이 끼친 팔을 감싼 채 발걸음을 옮기자 넓고, 또 넓은 방이 드러났다. 이렇게 넓은 집에 사는 사람들은 어지간해선 서재와 침실을 분리해서 쓰기 마련인데, 이 방은 서재와 침실을 합쳤음에도 빈 공간이 많았다. 그만큼 넓은 방이었다.
벽을 빼곡하게 채운 책장과, 책장 근처에 자리를 잡은 호두나무 책상이 꽤 인상적이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주인의 취향이 여실히 드러났다. 너른 책상 위에는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가 쌓여 있었다.
방 주인의 강박적인 성격은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꾸며지진 않은 방이지만 부러 균일하게 색을 맞춘 티가 났고, 바닥에 깐 카펫은 무늬 없이 단정한 잿빛이었다. 위르겐의 방에선 평평한 저울과도 같은 균형감이 느껴졌다.
역시나 지나친 결벽이 내 결벽증을 불러일으켰다. 심장이 겉잡을 수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를 닮은 잿빛의 우울감이 내 머릿속을 잠식했다. 당장이라도 위르겐이 철걱이는 수갑을 채워 나를 잡아 가둘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 방에는 이미 짐이 좀 있는데요. 제가 쓸 방이 맞는 건가요?”
불안함을 이기지 못한 나는 식은땀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제 물건들입니다. 내 방이기도 하니까.”
“네. 하지만 우린…”
“공식적으로 결혼한 사이는 아니죠. 하지만 곧 할 거고, 앞서 말했듯 나는 질질 끄는 게 싫습니다.”
나는 그를 비뚜름히 올려 보았다. 오만하게 내리깐 그의 잿빛 눈동자가 지독하다.
저보다 키가 한참이나 작은 상대를 위해 고개를 조금도 숙여 주지 않는 위르겐은 마치 군인 같았다. 군인 같기는 아르춈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아르춈은 지나치게 질서를 따랐어도 따듯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는 마치…….
어둡고 침침한 취조실의 창백한 조명 아래에서 만날 것만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언제 성교를 하건 상관이 없다는 거군요.”
“당신은 신경 씁니까?”
“새삼. 이미 다양한 족속들한테 박혀 봤는걸요.”
되도 안 될 허세라고 비웃음 받는 한이 있어도 위르겐에게 지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위르겐 앞에서는 정숙한 아가씨보단 더러운 창녀가 되고 싶었다.
“오빠들은 언제 풀어 줄 거예요?”
“이미 손을 봐 뒀습니다. 며칠 안에 소식이 들려올 겁니다. 더불어… 화요일쯤 당신 오빠의 부고를 알리는 소포가 도착하겠군요.”
“마음의 준비는 이미 했어요. 가능하면 장례를 치러 주고 싶은데…… 도와줄래요?”
“정교회 식으로 치를 수는 없을 겁니다. 당신 오빠가 천국에 가는 동안 당신은 감옥에 가겠죠.”
“알아요. 그래도… 화장이라도 해 주고 싶어요. 하얀 지옥 한가운데에 버려지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설원에 내던져져 들짐승에게 잡아먹힐 세료자를 상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나는 울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미 버렸을 겁니다.”
위르겐의 냉정한 말을 들은 나는 마른침을 삼킨 뒤 습관대로 담배와 성냥을 꺼냈다.
“냄새가 싫다고 말했을 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불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곤 성냥불을 켰다. 성냥불만큼이나 손이 꼴사납게 떨렸다. 담배 끝에 불을 붙이기도 전에 위르겐은 내게서 성냥불을 낚아챘다. 그가 낚아챈 성냥은 몸을 태워 가며 불붙었지만, 추락하는 동시에 힘없이 꺼져 버렸다. 그 사소한 광경조차 너무나도 비참하게 보였다.
“담배를 안 피우기로 약속한 적은 없어요. 당신과 내가 약속한 건 자식, 그리고 죽음이에요.”
“당신 몸에서 풍기는 냄새 때문에 동하던 것도 식습니다.”
“난 안 그런 줄 알아?”
담배는 열여섯 살 때 어머니에게 배웠다. 어머니는 생각하기를 그만둘 수 있어서 좋다며, 아픈 와중에도 꼭 담배를 물고 계셨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담배를 피웠다. 요즘은 다들 비슷한 이유로 담배를 피운다. 궐련 대신 시가나 파이프 담배를 무는 여유로운 사람들조차도.
“난 아예 위르겐 너한테 꼴릴 자신이 없어.”
나는 그의 얼굴에 바짝 붙어 삿대질을 했다. 위르겐은 눈을 내리깔며 미간을 좁혔다. 그의 경멸 어린 눈빛에 나의 분노는 더 거세졌다.
“천박하게 혀 놀리지 말고 입조심 좀 하지.”
“천박한 게 과연 누굴까? 힘 가지고 사람 하나 짓밟아 죽이려는 당신일까, 나일까?”
나는 흥분으로 달뜬 숨과 함께 거친 말들을 토해 내며 헐떡였다. 나는 그를 치졸한 개자식이라고 헐뜯으며 화를 냈고, 기어이 위르겐의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처음 한 대는 맞아 주었지만, 내가 다시 한번 손을 휘두를 때 위르겐은 내 팔목을 휘어잡았다.
그 순간 그에게 붙잡힌 팔목이 부서진 줄만 알았다. 고통을 못 이겨 꽥꽥대며 비명을 질러 대도 그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악악대며 버둥거리다 뒤늦게 풀려난 나는 반동을 못 이기고 바닥에 엉덩이를 박고 넘어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