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40
“아니에요… 다만 유산기가 있다고 해서…….”
“그래. 조심하는 게 좋겠지. 위르겐에게 네가 유산기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네… 그…… 소파에 앉으세요. 아버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괜찮네.”
그에게 받은 장갑과 코트를 벽난로 앞에 걸었다.
“금방 갈 걸세.”
“네. 그래도 차나… 술이라도 내드릴까요?”
귄터가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저번에는 중년의 나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정정하다 생각했는데 오늘은 어쩐지 그가 지치고 피로해 보였다. 어쩌면 내가 지치고 피로해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 모습에서 아버지를 떠올린 나는 괜히 콧등을 붉힌 채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하네.”
예상치 못한 방문만큼이나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미간에 깊게 주름을 패며 그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네?”
“미안하네.”
귄터는 눈에 띄게 말라 초췌해진 얼굴을 쓸며 마른세수를 하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놀란 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문자 그대로일세.”
“아버님…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영문 모를 말들을 듣던 나는 무언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을 놓치고 있다는 확신을 했다. 그가 그대로 나가려 들 때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낯이 뜨거웠다. 기회였다. 이게 무엇이건 기회가 분명했다. 그는 위르겐이 나를 증오하는 이유를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 잠시만…….”
내 부름을 듣고 돌아선 귄터는 스산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는 괴로운 기침을 반복하면서도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궐련을 낀 손가락이 위태롭게 경련하고 있었다.
“미안하다니…… 설명을 해 주세요, 아버님.”
뿌연 연기를 내뱉는 그를 향해 애원했다.
“제발…….”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
그는 내 대답에 응수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꺼내 들었다. 알고 있는 게 있을 리가 없다. 위르겐은 내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귄터 폰 베흐만조차 무언가를 알고 있는 와중에 나는 바보 천치처럼 아무것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와 몸을 섞고, 아이를 가지고, 그의 증오를 받았다.
“아무것도 몰라요. 정말…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어떻게든 귄터를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싸늘한 표정을 마주했을 때 나는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위르겐은?”
피로에 찌든 목소리였다. 갈라지고 흠이 많았다. 나는 얼굴을 감싼 채 대답했다.
“요즘은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아요. 어디서 계집질이라도 하는 모양인가 보죠.”
무슨 마음으로 그런 대답을 했는지.
다만 귄터의 증오 섞인 표정이 위르겐과 닮아 있어서, 날 선 원망을 퍼붓고 싶었다. 귄터는 내 애원을 듣고도 기어이 침묵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도와주세요. 위르겐이 저를…….”
문소리가 들렸을 때가 되어서야 얼굴을 감쌌던 손을 떼어 냈다.
차라리 이대로 저 문을 아무도 열지 않는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초조해졌다. 어딘가로 사라진 위르겐을 기다리는 것인지 두려워하는 것인지. 스스로의 마음조차 모른 채로 창가를 바라보았다.
아침을 알리는 새들이 울창한 숲으로 날아들었고, 이따금 사슴이 지나갈 때도 있었다. 하늘은 매일매일 다른 풍경을 그렸고, 세상은 매일매일 온기를 더해 갔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배가 불러 오기 시작했다. 부풀어 오르며 무게를 더해 갔다. 배를 감싼 채 안락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했다. 난롯가의 불꽃이 타닥타닥 타들어 갔다.
이번 겨울, 마지막으로 눈이 내리던 밤이었다.
고요하게 내리는 눈이 밤을 장식했다. 바람조차 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운 채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던 나는 적막을 깨는 인기척을 느끼곤 눈을 감았다.
위르겐은 침대 옆에 놓인 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눈을 감았지만 그의 시선은 느낄 수 있었다. 침대 시트를 움켜쥔 나는 아침이 밝을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날이 밝았을 때 그의 손등이 뺨에 닿았다.
내리쬐는 창백한 햇볕조차 뜨거워 아주 가늘게 떴다.
“이 정도는 욕심내도 괜찮다고 생각해.”
그가 내 뺨을 천천히 훑으며 읊조렸다.
“결혼하자, 스볘타.”
수요일 오전, 그는 투박한 화병에 라일락을 한 다발 꽂았다. 꽃에서 풍기는 향기는 아주 짙어 방 안의 공기를 빼곡하게 물들일 수 있었다. 물방울이 맺힌 연보라색 꽃을 바라보다 고개를 틀었다. 열어 둔 창가로 찬 바람이 들어왔다.
옷장을 열어 겨울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그는 좀처럼 단추를 채우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단추를 채웠다. 나는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며 입술을 떨었다. 부츠를 신고, 코트를 입고, 리본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었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위르겐은 제대로 먹지 못한 내게 빵을 먹이고, 수프를 먹이고,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는 나를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모른 체를 했다.
운전대를 붙잡은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약지에 끼인 반지가 조명을 받아 시리게 반짝이고 있었다.
“내게 뭘 원하는 거예요?”
얼마 전 찾아온 귄터와 위르겐은 같은 것을 원하고 있을까.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 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헐떡이자 창문 위로 입김이 서렸다.
“이 결혼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을까…… 치열하게 고민해 봤는데도 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어요.”
핸들을 꺾는 움직임이 부드러웠다.
“당신이 내게 바라는 게 무엇일까, 나를 증오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밤새 쌓인 눈을 치우는 사람들은 저마다 분주해 보였지만 나와 위르겐 사이의 시간은 아예 멈춘 것만 같았다.
“당신을 이해하고 싶어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더듬어 보았다.
“위르겐, 당신을 이해하고 싶어요.”
관청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말을 아꼈다. 그는 차에서 내린 뒤, 조수석의 문을 열고 내게 손을 뻗었다. 내민 손을 붙잡고 차에서 내린 나는 비틀거리다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
혼인 신고의 절차는 복잡하지 않았다. 사인을 하고 도장을 찍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작성된 서류는 나와 그를 묶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손은 수갑처럼 나를 붙들었다.
위르겐을 따라 하천을 걸었다.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위로 하얀 눈이 얼어붙어 있었다. 얼어붙어 무엇도 비추지 못하는 냇물은 흐르지 못하고 갇혀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의 발소리를 따랐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쌓였던 눈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당신을 죽일까 두렵습니까?”
다시 눈을 떠 위르겐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당신을 죽일 수가 없어요.”
단단한 두 팔이 내 등을 감쌌다.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영원히 버둥거리다 차라리…….”
당신 곁에서 죽고 싶어요.
갑갑할 만큼 억세게 나를 껴안은 위르겐이 조금 전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려 보려 애를 썼다. 지금껏 나를 죽이겠다고 겁박하던 그가 방금 무언가를 말했는데, 그게 전부 위태로운 꿈인 것만 같았다.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당신 곁에 있고 싶습니다.”
음울한 고백이었다.
나를 껴안은 팔에 더욱이 강한 힘이 실렸다. 밀어 내기 위해 그의 팔뚝을 붙잡았지만 끝끝내 힘을 주지 못했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 후드득 떨어졌다.
“그러니까 나를 버리지 마세요.”
애처로운 애원이었다. 사납고 난폭한 겁박도, 뜨거운 고백도 아닌 애원이었다.
나는 주먹이 떨리도록 그의 팔을 움켜쥐고, 인적 드문 강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위르겐,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봐.
나는 이제…….
따지고 화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미 오래전, 너무 지치고 말았다.
비아냥대고 조롱해도 당신은 같은 말로 받아치겠지. 내 가족들을 가지고 협박하겠지.
머릿속을 맴도는 수천 마디의 원망들을 삼켰다.
그 잿빛 눈동자를 마주하면 수용소의 창백한 조명이 떠올랐다. 흐리게 반짝이며 이따금 점멸등처럼 깜박였었던. 그럴 때면 나는 이제 더는 당당하게 기념할 수 없는 성탄절을 떠올렸다.
정비소 앞의 초라한 식당 또한 떠올랐다. 주일을 제외하면 하루도 빠짐없이 문을 여는 이라 아주머니의 식당에서, 위르겐과 나는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햇볕이 바늘처럼 내리꽂히던 어느 여름날, 그는 나를 비웃었다.
“비웃을 일이 아니에요.”
위르겐의 싸늘한 웃음을 마주한 나는 까닭도 없이 겁을 먹고 고개를 숙였다.
“고매하신 위르겐 경.”
농담하듯 꺼낸 호칭이었지만 내 목소리는 처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가 죽을 뻔했다는 게 당신한텐 기쁜 일이라도 되는 건가요?”
절단된 리프트 와이어 덕에 차에 깔릴 뻔했던 날이었다. 무겁게 추락한 쇳덩이는 나를 뭉개지 않았지만 여전히 가슴이 초조하게 떨렸다. 음식을 삼키지도 못할 만큼 진득한 여운이 남아 있었다.
따듯한 찻잔을 움켜쥐었다.
들리지 않는 대답을 기다리다 지쳐 포크를 들어 빵을 조각냈다.
“차라리 다른 직업을 찾아보세요.”
고개를 들었다. 비웃는 기색은 없었다. 서늘하고 메마른 어조였다.
“미련하게 덜덜 떨면서 버티지 말고.”
위르겐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차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여전히 여름이었지만 나는 추위에 떨었다.
“옷도 제대로 못 챙겨 입고 다니는 주제에.”
그와 마주 보고 앉으면 취조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때론 고해 성사를 하기 위해 신부 앞에 앉은 기분이 들었고, 때론 발가벗겨진 채 욕실 바닥에 앉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가 나와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으로 견뎌 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가족들에게 소포를 보내느라 옷을 구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해요.’
말없이 빵을 씹으며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어떨 때는 가족들에게 사랑이 아닌 책임감과 죄책감만 느껴요. 소포를 부치고 편지를 쓰는 내내 잘 기억나지 않는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떻게든 그들을 사랑하려 애를 써요. 그렇지 않으면 나는 외로워서 비틀어지고 말 테니까.
위르겐.
나는 가끔 오빠들이 내 곁에 없는 게 고맙게 느껴져요.
음식을 더 부치라고 독촉하는 오빠들의 편지를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지만, 동시에 그들이 원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만일 우리가 함께했더라면 어쩌면 더 추잡하고, 더 역겨운 서로를 마주해야 했을지도 몰라요.
나는 봤거든요.’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