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53
죽음을 말하는 스볘타의 얼굴은 그저 천진했다.
“라나. 로나는 그걸 바라지 않을 거란다.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만나게 될 거야. 우리 귀여운 라나는… 엄마 말씀을 잘 듣고… 건강하고 사랑스럽게 자라 주면 된단다. 그걸 로나도 원할 거란다.”
“하지만… 저는요…. 지금 로나가 보고 싶고… 친구들도 보고 싶어요.”
안톤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스볘타를 뻣뻣한 가죽 소파 위로 올려 주었다.
“아빠. 죽으면 다시는 못 보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죽으면 끝인 걸까요?”
“라나.”
“그래서 카챠 아주머니가 그렇게 울어 버린 거예요? 아빠. 나도 알아요. 나도 알아요. 죽으면 더는 못 본댔어요. 아빠는 거짓말쟁이야. 로나도 다시는 못 보는 거잖아. 친구들도 다시는 못 보는 거잖아!!”
쿠션 위에 얼굴을 박은 스볘타는 허리를 들썩이며 엉엉 울었다.
“아빠는 정말 나빠! 죽는 게 제일 무섭고 싫은 거잖아요. 그래서 군인 아저씨들도 매일 사람들한테 죽으라고 소리 지르는 거잖아요!!”
안톤은 하나뿐인 막내딸을 어떻게든 달래 보려 애를 썼다. 전쟁 통에 귀한 간식을 내주기도 했고, 어린 여자애들이 좋아한다는 동화도 들려주었다. 하지만 여덟 살이 겪기엔 지나친 참사를 겪은 어린애를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친구가 필요한 거니?”
안톤의 질문을 들은 스볘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빠들이 잘 안 놀아 줘?”
“그런 거 아니에요.”
“라나. 아버지가 뭘 해 주면 좋을까?”
그가 괴롭게 묻자 스볘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예쁜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스볘타는 하늘색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건물을 뛰쳐나갔다. 안톤은 어린 딸을 잡으려다 관뒀다. 어차피 스볘타가 그의 딸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스베틀라나!! 잠깐만…!”
뒤늦게 밀려드는 불안감에 그가 황급히 아이를 뒤쫓았다.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에게 해코지라도 당할까 겁이 났다.
그 와중 스볘타는 이미 달리고 달려 수용소의 귀퉁이까지 향한 뒤였다. 그 누구도 함부로 도망치지 못할 만큼 너르고 깊은 숲을 끼고 있는.
“안녕?”
뒤따라온 안톤은 뛰던 것을 멈추고 자신의 딸과 폰 베흐만의 아들을 훔쳐보았다. 스볘타가 마치 전쟁 전의 스볘타처럼 보였다. 웃음이 많고, 천진했던. 종일 울고 있는 딸을 보다 웃는 딸을 보자 코끝이 욱신거렸다.
다른 건 다 내버린 안톤에게도 막내딸만큼은 그토록 소중했다.
“뭐 하고 있어?”
안톤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딸아이의 놀이 상대가 남자건 여자건, 힐덴베흐크 놈이건 정치범의 자식이건 아무 상관 없었다. 그의 딸에겐 친구가 필요했다. 그것도 간절히.
안톤은 부하에게 딸의 호위를 맡긴 뒤 다시 한번 위르겐과 스볘타를 돌아보았다.
그날 이후 스볘타는 매일 위르겐을 찾아갔다.
“너랑 말이 통했으면 좋겠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위르겐은 무뚝뚝하게 그녀와 눈을 맞췄다.
“위르겐. 어디서 왔어? 엘킨스키 어디?”
“…….”
“나는 저기 저 멀리… 아주 멀리서 기차를 타고 왔어.”
스볘타는 어쩐지 위르겐이 북부 출신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넌… 음… 북부 출신이지?”
역시나 대답이 없었다. 목소리를 못 내는 건 아니니 아마도 엘킨스키어를 못 하는 모양이었다. 수용소에는 그런 사람이 많았다. 유목민들도 엘킨스키어를 못 했고, 외국인들도 엘킨스키어를 못 했다.
그래도 위르겐과 같이 놀 수는 있었다. 구슬을 꺼내 칠 수도 있었고, 아버지가 준 새총으로 새를 잡을 수도 있었다.
“그거 알아? 힐덴베흐크에선 우리 살갗을 산 채로 벗긴대.”
“…….”
“난 무서워.”
그렇게 신나서 놀다가도 수용소 귀퉁이를 벗어나면 잔혹한 광경들이 흩어졌다. 총살을 당하는 사람들, 매를 맞는 사람들,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
“위르겐. 난 너무 무서워.”
제일 무서운 건 아버지 안톤이었다. 집에서 느긋하게 신문을 보며 선물을 쥐여 주던 아버지가 너무나도 무서웠다.
전쟁이 시작된 뒤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따뜻하고 안락한 집에서 좋은 것만 보고 자라던 스볘타는 추악하고 역겨운 온갖 광경들을 마주해야 했다. 사람들을 향해 총질을 하라고 명령한 아버지는 그중에서도 제일 충격적이었다.
“도망가. 위르겐.”
스볘타가 위르겐을 껴안으며 울었다. 얼결에 안긴 위르겐은 그녀를 밀어 내지도 껴안지도 못한 채 어색하게 서 있었다.
스볘타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설마, 설마 그 위르겐이 힐덴베흐크 사람일 거라고는. 친구들을 죽이고 가족들을 내쫓기게 만든 힐덴베흐크 사람일 거라고는.
그래서 스볘타 또한 그 순간 이로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공포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제될 수 없는 감정이 한데 흐트러졌다. 겁에 질려 오빠를 소리쳐 부르면서도 위르겐을 증오하는 것을 관두지 않았다. 순진했던 바람에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료했다.
“힐덴베흐크 사람이야! 세료자, 죽여 버려!”
스볘타가 위르겐을 밀치며 소리를 질렀다. 군인들이 자주 그러했듯 ‘죽여 버려’라는 말과 함께.
“죽여 버려!”
그녀는 세료자 오빠가 정말 누군가를 죽일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죽여 버려’라는 말은 너무 흔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썼다. 수용소에 있는 간부들 전부 죽어, 죽여 버려, 따위의 말들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내뱉은 말은 씨앗이 되었다.
그녀에게 내밀린 소년은 그것을 아주 오래도록 간직했다.
***
위르겐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죽은 형제의 망령이 그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 형제는 내내 그를 핀잔했다. 죽기 직전의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위르겐조차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려 애를 썼다. 그러나 손으로 노도를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에게 있어 스볘타는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은 존재였다. 붙잡을 수도, 붙잡아서도 안 되지만 결국 쥐고 말았고 타들어 가고 말았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가 없었기에 잊을 수도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을 닮은 아기는 사랑할 수 있는 건지 묻고 싶었다. 절반은 그녀였어도 절반은 위르겐이었다. 계집애도 사내애도 부모를 적당히 닮았고,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스볘타의 여린 뺨을 쓰다듬어 보았다. 그의 옆에서 아기처럼 쌕쌕거리며 잠든 그녀는 지나치게 무방비했다.
거리낄 것 없이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녀의 가족이 인질이 되었듯, 이번에는 아이들을 인질로 삼을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빌어 봐, 스볘타.
이번에도 도망가려 애써 봐.
위르겐은 무감정한 협박을 마음속으로 내내 반복했다.
여린 목덜미를 뒤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움켜쥐기만 해도 부서질 것이 분명한데.
감정에 취해 허덕이는 것도 지쳤다. 그는 이토록 감정적인 자신이 한심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어느 쪽이건 끝내야지. 널 가지기로 했다면 가져야지. 간단한 결론이 났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괴로움이 끝날 것 같았다.
또 한 번 네 배를 부풀리는 건 어떨까? 아이를 빌미로 협박하면 너는 꼼짝도 하지 못할 텐데. 많으면 많을수록, 네게 채운 올가미가 견고해지는 건 아닐까. 아니면 그 전에 네가 질려서 나를 죽이게 될까?
그간 제대로 이룬 것 하나 없었지만 딱 한 가지, 제대로 이행한 것이 있었다.
그녀는 이제 그의 아내였다. 도망치려 애를 써도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이혼을 운운해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힘없는 여자 하날 붙잡아 두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위르겐은 자신의 방에서 나와 아기들이 잠든 방을 향했다. 시달릴 만큼 시달린 보모의 낯빛이 창백했다. 그는 보모를 밖으로 물린 뒤 요람 위에 누워 있는 이름 없는 아이들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애석하게도 아이들이 원망스러웠다. 아이들을 마주하는 게 고통스러웠다. 순진하고 맑은 눈은 그를 매번 책망했다. 또한 스볘타가 영영 억지로 탐해지던 순간을 상기하도록 만들 것이다.
나도 사실은 좋지만은 않았다고 말하면 믿어 줄까.
스볘타가 그것을 믿는다고 해도, 그런 게 그 여자에게 상관이나 있을 리가 없었다.
10.
위르겐은 사람을 시키는 대신 직접 방을 정리했다. 그게 그의 성정에 맞았다. 남이 자신의 물건을 건드리는 것은 끔찍했고, 제 물건들은 제가 원하는 위치에 있어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흐트러진 서류들을 정리하다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왜요?”
퉁명스럽게 돌아온 여자의 쌀쌀맞은 질문을 들은 그는 정리하던 것을 멈췄다.
“왜… 왜요?”
성큼성큼 다가가자 스볘타가 편하게 풀어 헤쳤던 옷을 황급히 여몄다. 이제 와 목덜미까지 잠옷 단추를 잠근다 한들 술렁인 그의 마음이 가라앉을 리는 없었다.
“새삼스럽게.”
“새삼스러운 거 아니라….”
그 와중에도 스볘타는 삐져나온 가슴팍을 숄로 감싸느라 여념이 없었다.
“편하게 있어요. 그런다고 내가…”
스볘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흥분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애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여자를 붙잡고 억지로 취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스볘타의 눈에는 그만한 ‘악한’일 것이 분명하다.
“어차피 벗은 몸을 다 아는데 가리는 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건 짓궂은 심통이었다. 괴롭히는 걸 그만두고 싶었지만, 이상할 만큼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좀 부푼 것 같긴 하지만.”
봉긋하게 솟은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자 스볘타의 손이 날카롭게 그를 쳐 냈다. 발갛게 상기된 스볘타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쏘아붙였다.
“당신을 아무리 이해하려고 애를 써도 이해할 수도 없고…… 아무리 노력해도 조금도 좋아지지 않아요.”
“…….”
“다 끝낼 기회가 있었는데….”
위르겐은 스볘타를 더 찔러 대는 대신 그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위르겐이 눈을 감으며 스볘타를 품에 가뒀다. 뜨겁고 말랑한 것이 품속에서 바르작거렸다. 그럴수록 그는 더 힘을 줬다. 마침내 스볘타는 체념하고 몸에서 힘을 풀었다. 무겁게 자신을 짓누르는 남자의 몸은 제 것과 달리 딱딱했다.
“기왕이면 당신을 내버리려 했습니다.”
“……네?”
위르겐은 밀려드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눈을 감았다. 술도, 약도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스볘타를 껴안자 텅 빈 곳이 채워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며칠을 잠들지 못했던가. 머리가 둔해져 셈이 더뎌졌고, 몸은 쇳덩이만치 무거웠다.
“위르겐…?”
스볘타가 눈을 감은 위르겐을 불러 보았다.
“이봐요… 위르겐.”
“피곤해요.”
“…….”
“어차피 밤인데.”
그 와중에도 위르겐이 힘을 풀지 않는 바람에 스볘타는 영락없이 갇힌 꼴이었다.
“답답해요. 풀어 주세요.”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위르겐은 그 자세 그대로 버텼다. 몇 번 밀어 내던 스볘타는 결국 지쳐 체념했다.
스볘타는 빤히 잠든 위르겐을 쳐다보았다.
눈을 감은 위르겐은 전에 없이 유순하게 보였다. 그간 그림자에 덮여 있던 속눈썹이 촘촘했고 길었다. 여태 서늘하다고만 생각한 얼굴이 지금은 언뜻 소년처럼 보였다. 스볘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뺨을 천천히 쓸었다. 뺨이 패여 있었다. 그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렇게나 건장하던 몸도 조금 말라 있었다.
“야위었군요.”
그녀의 손이 그의 입술 위에 닿았다. 길게 다물린 위르겐의 입술은 부르터서 까슬까슬했다. 그는 언뜻 멀쩡해 보였지만 속은 넝마였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스볘타는 묻지 않았다.
왜 부러 사고를 냈어요? 왜 수면제에 절어 지냈나요? 왜 그날 아르춈에게 나를 구해 달라 부탁했나요?
답을 알고 싶었지만, 답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 순간 잿빛 눈동자가 나른하게 뜨였다. 그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한참이나 그녀에게 머물렀다.
스볘타는 그저 위르겐이 다시 잠들기를 바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