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54
“이런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나만 아니라 당신도 갉아먹히고 있잖아요.”
자해로 엉망이 된 가슴팍과 수면제에 절은 위르겐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그녀는 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술도, 담배도 사람을 진정으로 달래 줄 수 없다. 오히려 망치고 무너트릴 뿐이었다.
“그만둬요.”
스볘타의 말을 들은 그가 섧게 웃었다.
부서질 만큼 우악스레 저 여자의 몸을 파고들고 싶었다. 젖은 살점이 뭉개지도록 문대고 싶었다. 매일 밤 그는 스볘타의 다리를 부러트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두 번 다시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도록 완전히 망가트리고 싶었다.
“아르춈을 만났습니까?”
“그건…….”
불안하게 내리깐 스볘타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위르겐은 다시금 눈을 감고 힘을 주어 스볘타를 껴안았다.
***
스볘타가 기억하는 세르게이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그녀에게 좋은 가족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여전히 그녀는 세르게이가 그런 짓을 했을 거라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왜…….”
왜라니. 그 이유야말로 스볘타가 잘 아는 이유였다. 그들이 먼저였다.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 먼저 서로가 서로를 겨누지 않으면 안 될 생지옥을 만들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나를 도왔을까.
긴 밤을 지새우고 또 지새워도 답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에게 받은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차라리 그걸 빌미로 모든 것을 관두고 싶었다.
아직 몸이 전부 회복되지 않아 일을 시작할 순 없었다. 힘없이 떨리는 팔로 아이들을 껴안고 흔들어 재웠다. 필사적이었다.
시간은 흘렀고, 로만은 약혼녀가 있는 트로츠크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새로 칠한 오두막은 게오르기가 홀로 쓰게 되었다.
[걱정할 것 없어. 남편과는 전부 풀었어.]가벼운 다툼, 스볘타는 로만에게 그렇게 전했다. 어차피 이제 와서 달라질 것 없을 것 같아 그랬다. 떠나기 전 로만은 스볘타가 머무르는 저택에 찾아와 보기로 했다. 그녀는 차와 곁들일 만한 간식을 꺼내 차린 뒤 로만을 맞이했다.
“안녕, 스볘타.”
“안녕, 오빠.”
짧은 인사를 하는 순간조차 어색함이 감돌았다.
스볘타는 여름에 만들어 둔 딸기잼을 꺼내 홍차에 곁들였다. 잼은 지독하게 달았다. 스볘타와 달리 로만은 단 게 싫다며 설탕 한 스푼도 넣지 않은 차를 마셨다.
“그럼 아직도 네 자식들 이름을 짓지 않았다는 건가?”
“…….”
“라나. 혹시 애들이 미워?”
로만의 질문을 들은 스볘타는 왈칵 눈물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녀는 그 작고 연약한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도대체 뭘 망설이는 건데? 아직도 이름을 안 지어 주다니 제정신이야? 그럼 여태 출생 신고도 안 했다는 거야?”
“지을 수가 없었어.”
스볘타는 애들 이름 하나도 제대로 못 지어 내는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지만 지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부드럽고 순한 얼굴을 바라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졌지만 그뿐이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지으면 되잖아.”
“하지만…….”
“고리타분하게 굴지 마. 시대가 변했다. 네 남편이 때리면 이혼을 해도 돼. 너더러 이기적이라는 말을 했지만 실은 그게 내 진심이 아니라는 건 알잖아. 네가 내키는 대로 해.”
내키는 대로…….
얼마 만에 듣는지 모를 만큼 아득한 소리였다. 그 무엇 하나 내키는 대로 할 수 없었음을 지금에서야 알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럴 일 없어.”
“생기면 찾아와.”
여전히 울음을 못 그쳐 눈시울이 붉은 스볘타는 그저 한참이나 끅끅대며 울었다.
“오빠.”
“왜?”
“사랑해.”
그녀의 말을 들은 로만은 귀를 벌겋게 물들이며 진심을 담아 온몸으로 질색을 했다.
“이 미친…….”
스볘타가 장난기 묻은 얼굴로 실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로만은 여전히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이를 갈고 있었다.
“결혼식에 날 꼭 불러. 응? 어떻게든 갈게.”
“간다.”
미련도 없이 돌아서서 걷던 로만이 걸음을 멈추고 대뜸 소리쳤다.
“이번에는 편지 부쳐!!”
그녀는 다시 등 돌리고 떠나는 오빠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일종의 다짐이었다.
***
로만을 떠나보낸 스볘타는 실내화도 갈아 신지 않고 그대로 정원으로 뛰쳐나갔다. 어차피 잡지도 못할 텐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눈이 이미 발목까지 쌓여 있었는데도 여전히 폭설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녀는 늘 자신이 당번이 아니길 바랐었다. 어릴 때는 눈이 내리면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고, 이글루까지 짓곤 했었지만 다 자란 지금은 내리는 눈이 증오스러울 정도로 싫었다.
“나와 계시면 안 돼요. 아직 몸이 덜 회복되셨잖아요. 애 낳고 감기 걸리면 얼마나 서러운지 아세요?”
뒤늦게 쫓아와 그녀를 말리는 다샤는 위르겐이 가정부로 고용한 여자였다. 엘킨스키에서도 가정부를 고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안 스볘타는 그것이 당황스러웠다. 과연 가증스러운 정권이다.
“제가 나와 있으면 위르겐이 다샤한테 뭐라고 하나요?”
“네.”
“비밀로 하면 되죠.”
“저도 걱정되고요, 부인.”
다샤가 웃으며 스볘타를 잡아당겼다. 스볘타는 그녀가 잡아당기는 걸 따라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발을 끌었다.
“세상에… 실내화가 다 젖었잖아요. 어서 들어오세요. 발이 다 얼었겠어요. 따뜻한 물을 받아서 방으로 가져다드릴게요.”
“다샤. 혹시 위르겐이 언제 돌아오는지 아세요?”
“저녁 7시쯤 오신다고 하셨어요.”
“고마워요, 다샤.”
스볘타가 드물게도 방긋 웃자 다샤는 조금 놀랐다.
햇볕이 강한 편도 아니건만, 환히 웃는 스볘타는 유난히 빛이 났다. 티 없이 흰 살결에 발그레한 홍조가 끼치자, 그녀는 꼭 물의 요정처럼 보였다. 다샤는 새삼스레 그녀가 얼굴 하나는 참 예쁜 부인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일거리를 찾아 떠났다.
겨울의 창백한 볕 아래 선 스볘타는 푹 젖은 슬리퍼를 벗어 페치카 위에 널어놓은 뒤, 다샤가 받아 온 따뜻한 물에 발을 담갔다.
6시가 되었을 때 아이들에게 배불리 젖을 물린 스볘타는 보모에게 아기들을 맡긴 뒤 지친 몸을 이끌고 드레스 룸을 향했다. 그곳에는 위르겐이 마구잡이로 사 둔 두꺼운 겉옷이 걸려 있었다. 이런 걸 걸치고 그런 짓을 벌이려니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지만 다른 옷이 없어 달리 방도가 없었다.
“다샤. 오늘은 일찍 가셔도 돼요.”
“하지만….”
“드릴 뇌물이 없는 건 아쉽지만… 부탁할게요. 네?”
“네? 부탁이요?”
“물론 통장에 돈이 좀 있지만…… 아시잖아요. 루블화가 이번에 또 폭등한 거…. 그나마 통장 안에 모셔 둬서 다행이지…….”
“전 배급품도 좋습니다, 마님.”
다샤의 줏대 있는 대답을 들은 스볘타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공산주의의 치하 아래 사는 국민다웠다.
“밀가루 한 포대 어때요? 주방에서 가져가시면 돼요. 위르겐한테는 제가 빵을 굽다 망쳤다고 말할게요.”
“대신…….”
“대신 어떤 사고도 치지 않고, 다샤의 일자리도 보장해 주기로 약속하겠어요. 어때요?”
다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볘타는 곧장 그녀에게 뜯지도 않은 밀가루 한 포대를 건네주곤 마당으로 튀어 나갔다.
흩어진 눈을 두 손에 담아 꾹꾹 뭉치자 묘한 기대감까지 치솟았다. 이걸 어디에 던질까. 미처 피할 틈도 없게 연사를 해야지. 예전부터 새총 하나는 잘 썼고, 눈싸움 하나는 잘했으니 겁날 것도 없었다. 아무리 상대가 군인이라도 이 분야에선 스볘타 자신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짓궂고 유치한 장난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방법밖에는 떠오르질 않았다.
아무리 애써 봐도 위르겐이 용서가 되질 않는다.
그 순간 느꼈던 굴욕감과 공포는 연신 되살아났다. 원수의 여동생에게 느낀 분노라 할지라도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철제 대문이 열리는 순간 스볘타는 심호흡을 하며 쌓아 둔 눈 뭉치를 쥐어 들었다. 위르겐은 설원 위에 우뚝 서 있는 스볘타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고, 날씨는 추웠다. 이런 추운 날 바깥에 나와 있는 스볘타는 옅은 가로등 빛만을 받아 평소보다도 더 위태로워 보였다.
“지금 거기서 뭐…….”
그 순간 스볘타는 정확히 그의 안면을 눈 뭉치로 가격했다. 해가 진 바람에 사방이 캄캄했음에도 조준은 완벽했다.
“어…?”
그의 낯짝을 정확히 향하던 눈 뭉치가 그의 손에 붙잡혀 부서졌다.
위르겐은 물론이고 스볘타도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적어도 한 번은 제대로 맞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맞추지 못하자 이런 유치한 장난을 벌였다는 수치심이 뒤늦게 밀려왔다.
“스볘…….”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 스볘타는 이를 악물고 또 한 번 눈 뭉치를 던졌다. 이번의 그는 순순히 그녀에게 맞아 주었지만, 여전히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정말 조각상이라도 되는 양 그의 표정에는 흐트러짐 한 점 없었다. 그녀가 원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일부러 져 주지 마세요!!”
스볘타가 얼이 빠진 위르겐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지금 나랑 눈싸움을 하자는…….”
스볘타는 또 한 번 눈 뭉치를 던졌다. 스볘타가 던진 눈 뭉치는 그의 목덜미를 맞고 사방으로 튀었다.
위르겐은 어깨에 쌓인 눈을 무덤덤하게 털어 내며 스볘타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스볘타는 또 한 번 눈 뭉치를 던졌다. 결코 느린 속력은 아니었다. 위르겐이 가만히 서 있었음에도 눈 뭉치는 그를 비껴가 나뭇가지를 가격했다. 그러자 나무 위에 쌓여 있던 눈이 하얗게 흩어져 쏟아져 내렸다. 위르겐은 쏟아져 내린 눈을 건조하게 털어 낸 뒤 스볘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남들이 다 헐뜯었어도 스볘타는 자신의 가족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혈육이어서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사랑을 나누며 추억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위르겐이 그토록 증오하는 세르게이조차 사랑했다. 사랑했기에 가족들은 더없이 소중했다.
“당신에게도 당신 형이 소중했던 거죠?”
로만이 돌아서 떠날 때, 스볘타는 누군가가 로만을 죽이는 상상을 해 버렸다. 누군가 로만의 뒤통수에 총을 대 쏘았다면!!
“나라도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바닥에 쌓아 둔 눈 뭉치를 스볘타가 쥐어 들었다.
“나라도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고…….”
그러나 또 던지지는 못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 쥔 손가락 틈새로 눈 뭉치는 우수수 부서져 힘없이 떨어졌다.
액자 속에서 보았던 위르겐의 형제는 천진한 얼굴로 위르겐에게 장난을 치고 있었다. 형에게 볼을 꼬집힌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뒤틀린 꼴은 아니었다. 그는 평범하고 작은 어린애였다.
저만큼 뒤틀렸다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압력을 받아 왔을까.
스볘타는 실은, 아주 조금은 그를 이해하고 있었다. 미워하는 상대의 가장 소중한 것을 부숴 버리고 싶은 마음은 치졸했지만, 동시에 흔하고 가엾은 마음이었다. 그게 옳건 옳지 않건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날이 춥습니다.”
두꺼운 자신의 코트를 벗어 스볘타에게 걸쳐 주는 손길에 힘이 실려 있었다.
“들어가서 얘기하죠.”
스볘타는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스볘타는 여전히 무언가 자신이 잘못한 게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그를 믿고 싶었다. 사실 그녀는 줄곧, 사람을 믿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믿고자 했다.
난 잘못한 게 없어.
위르겐을 따라 저택으로 걸어가는 내내 그녀의 가슴은 달뜨게 경련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터질 것처럼 벅찬데, 세상은 여전히 고요했다. 어둠 속에 잠긴 공기는 바람도 없이 고요하게 눈을 흩뿌렸고, 추위는 말없이 덮쳤다. 그래서 그녀는 무겁게 껴입은 옷을 여며 보았다.
저택에 들어서 눈이 묻은 부츠를 실내화로 갈아 신고 코트를 벽장에 거는 내내 언젠가 생각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당신들이 먼저였어.’
총구를 겨누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만든 건 우리가 아니라 당신들이었잖아. 원망은 비릿했다. 곱씹고 곱씹으며 머릿속을 채워 갔다. 열등한 민족을 죽여 없애겠다는 그들의 말을 들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라디오를 내던지며 씩씩댔다.
1억이 넘는 우리 민족을 어떻게 전부 죽일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