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57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어.”
“왜?”
“그 순간에도 위르겐 당신은 나를 증오하고 있었으니까.”
각이 잡힌 흠 없는 코트나, 붉은 군대를 연상하게 만드는 말투도 꺼려졌다.
“스볘타.”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꺼리게 만든 건, 그의 눈동자에 담겨 있던 나지막한 증오였다.
“이젠 널 괴롭게 만들지 않을게.”
다시 한번 자신을 옥죄는 팔뚝에 힘이 실렸다.
“이것 하난 약속하지.”
스볘타에게는 너무나도 바보 같은 약속이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위르겐은 악몽이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재해였다. 그와 있는 모든 순간이 이젠 괴로웠다.
그러나 까닭도 모른 채 그를 뿌리치지 못했다.
현실적인 문제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라는 울타리 없이 자라나는 아이들이 얼마나 버겁게 살아가는지 알았다. 아이들에게는 아버지가 필요했다. 그녀에게는 남편이 필요했다.
그녀가 아는 현실은 잔인했다. 남편 없이 애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고달플지, 또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큰 결핍이 될지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였다. 외면할 수 없을 만큼이나.
그것도 아니면 어차피 뿌리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아서 그런지도 몰랐다. 도망치려 애를 썼다. 그런데도 잡혔다. 그의 아이를 낳았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위르겐을 찾아낼 때마다 어딘가가 욱신거렸다.
“이럴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나를 사랑했어야지.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삼키며 스볘타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위르겐의 약속만큼이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
지치지 않고 찾아오던 위르겐은 그날도 스볘타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르춈과 스볘타의 관계가 완전히 끝난 날이었다. 위르겐은 분홍색 국물을 떠먹는 스볘타를 그날 들어 집요하게 응시하였다. 스볘타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어쩌면 그날, 위르겐이 그런 식으로 청혼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를 받아 줬을지도 모른다.
“약혼녀 있는 남자를 붙들고 있는 것보단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겁니다.”
위르겐은 지독하게 오만했다. 청혼을 하는 와중에도 사랑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가 건조했다. 무엇이든 제 뜻대로 하겠다는 양 눈빛이 고집스러웠다.
그걸 감안해도 스볘타는 이상할 만큼 그가 미웠다.
“스베틀라나 안토노브나, 나와 결혼해서 해외로 떠납시다.”
스볘타는 그가 건네는 화려한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짧은 결론이었지만 한 치도 의심할 수 없었다. 입을 맞추려 들었을 때의 위르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음 날이면 실수였다고 말할 것이다. 징글맞은 표정으로 모든 일은 충동적이었고, 진심이 아니었다고 지껄일 것이다.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못 한 채 좋아하는 남자를 놓치는 스스로가 비참했다. 위르겐은 그런 그녀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깔보듯 내리뜬 눈에는 사람의 온기가 없었다. 감정이 지워져 있었다. 그의 낯짝을 후려치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그가 건넨 반지를 내던지지 않은 건 치가 떨릴 만큼 참는 것이 익숙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위르겐의 말마따나 약혼자 있는 아르춈을 붙들고 버티는 것보단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편이 백만 배는 나았다. 만일 위르겐이 애정을 담아 청혼했다면 스볘타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부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
날이 밝았지만, 스볘타의 발목은 여전히 부어 있었다.
무기력해질 만큼 막막했다. 뜨겁게 열이 오른 발목을 주무르던 스볘타는 억지로 일어서서 걸어 보다 얼마 못 가 비명을 지르며 형편없이 고꾸라졌다. 그 바람에 손바닥까지 죄다 까졌다.
왜 애를 쓸수록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샤가 신고했을 거예요.”
눈 쌓인 바닥에 주저앉은 스볘타가 처량하게 중얼거렸다.
“곧 우릴 찾으러 올 거예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밤새 사람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틀림없이 신고를 해 두었을 것이다. 벌써 경관이 수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곧 찾아낼지도 모른다. 말을 타고 온다면 얻어 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다친 다리도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곧…….”
“우리가 찾는 게 빠를 겁니다.”
그가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스볘타는 고개를 돌려 그의 손끝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아…….”
위르겐이 꺾어 둔 나뭇가지가 보였다. 날이 밝자 허탈할 만큼 쉽게 찾아졌다.
“그럼…… 위르겐 씨가 집으로 돌아가서… 경관을 여기로 불러 주세요.”
죽어도 당신 도움은 받기 싫다는 단호한 선언이었다.
“내 어깨에 팔 두르세요.”
그가 쭈그려 앉아 어깨를 기울였다. 스볘타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내저었다.
“어서.”
한숨처럼 튀어나온 그의 재촉을 듣고도 팔을 두르지 않았다. 짐처럼 위르겐에게 실려 다니기는 게 끔찍했다. 그에게 의지할 바엔 영혼을 쥐고 악마를 찾아가고 싶었다.
“그럼 여기서 얼어 죽든지.”
막상 매정하게 돌아서는 뒷모습을 바라보자 그녀는 겁이 났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외면할까. 적어도 신고는 해 주겠지, 경관은 불러 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자작나무 숲 한복판에 홀로 있으려니 문득 두려웠다.
길게 드리워진 나무 그림자가 유달리 음산했다. 사람이 없어 숲을 찾아왔지만 막상 닥친 추위와 외로움이 주는 공포는 상당했다. 지독하게 고요해서 이대로 영원히 홀로 남을 것만 같았다.
집으로 돌아갈 길이 빤히 보이는데 앉아 있는 것은 고역이었다.
스볘타는 부어서 두꺼워진 발목을 노려보며 이를 갈다 고개를 무릎 속에 묻었다. 어느 순간부턴 위르겐 특유의 고른 발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아는 척을 하지 않고 끝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직도 도움을 받을 생각이 없습니까?”
다시 돌아온 위르겐이 스볘타를 툭툭 치며 퍽 다정스레 물어 왔다. 스볘타는 묻었던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팔 두르세요.”
스볘타는 자존심이 상해서 치를 떨면서도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키가 맞지 않아 제대로 된 부축이 아니었다. 몸을 한참이나 굽혀 간신히 스볘타를 끌고 가던 위르겐은 결국 참다못해 스볘타를 들어 안았다.
스볘타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하필이면 발목이 꺾였다. 운이 나빴다. 그녀가 운이 나빴던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서러웠다.
30분쯤 흐르자 스볘타를 안고 걷는 위르겐의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아무리 건장한 남자라 해도 여자를 들쳐 안고 눈길을 걷는 일은 쉽지 않았다. 위르겐은 헐떡이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쉬면서 가요. 어차피 급할 것 없잖아요. 저도 멀미가 나고요.”
보다 못한 스볘타가 그를 세워 쉬게 했다.
그들은 하늘에 닿을 것처럼 길게 자라난 자작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위르겐은 헐떡이며 거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힘들어요?”
위르겐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늘진 그의 옆얼굴은 유달리 선이 단정했다. 스볘타는 그의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식은땀을 손가락 끝으로 닦아 냈다. 그러자 위르겐은 그녀가 제게 손대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담배나 뜨거운 차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팔팔 끓는 물에 찻잎을 우려 마시고 싶었다. 그것도 아니면 차라리 독한 술이라도 있었다면. 술이라도 홀짝여서 몸에 온기가 돈다면…….
“왜 제게 사과하지 않으세요?”
“사과?”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들은 양 그가 되물었다.
“제겐 잘못이 없다고 했잖아요. 그럼… 사과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빽빽하게 나무가 자라나 끝이 보이지 않는 숲에 시선을 둔 그녀가 중얼거렸다.
“잘못했다고 빌어 주길 기다립니까?”
그가 되묻는 말을 듣자 픽 웃음이 터졌다.
“아니요.”
“그럼?”
“제 곁에서 위르겐 씨가…… 영원히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고요한 숲속에서 그녀의 울림은 또렷하게 번졌다. 메아리처럼 연신.
짧은 휴식을 끝으로 위르겐은 다시 스볘타를 안고 걷기 시작했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려면 너무 오래 끌지 말아야 했다.
“아이들 이름을 생각해 뒀어요.”
상의가 아닌 통보였다. 스볘타는 위르겐과 상의해 가며 제 아이들의 이름을 지어 줄 생각이 없었다. 통보면 충분했다. 어차피 그는 아이들에게 관심조차 없었다. 이름이 힐덴베흐크 이름이건 엘킨스키 이름이건…….
“옐레나. 알렉산드르.”
예상했던 대로 위르겐에게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없었다. 무신경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를 추켜올렸다.
“애들은 내가 키울 거예요.”
고집스럽게 읊조렸다.
“연방에선 보육원에 애를 맡기도록 강제하고 있어요.”
“그렇습니까?”
“애 낳은 여자도 일을 해야 해요. 연방법이 그렇게 명시하고 있고,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보육원에서 자라나요. 옐레나와 알렉산드르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이번에도 통보였다.
그녀의 예상과 달리 위르겐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걸음걸이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칼로 긁어 만들어 낸 표식을 따라 덤덤하게 걸음을 옮겼다.
“지금은 제가 외국인 신분이라지만 위르겐 씨와 이혼한다면 다시 엘킨스키 국적으로 돌아올 거예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무감정하고 딱딱한 대답이었다.
“그게 당신 마음대로… 될 것 같아요……?”
“당신 오빠들을 수용소에 처박는 짓을 내가 못 할 것 같습니까?”
“위르겐, 전 대가를 치렀어요.”
그가 원한대로 몸을 섞었고, 결혼을 했고, 억지로 아이를 낳았다. 죽어 주기로 했지만 죽이지 않겠다고 말을 바꾼 건 위르겐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공정한’ 거래였다면 이미 모든 일은 끝이 났다.
“당신과 내가 한 건 거래가 아닙니다.”
“위르겐.”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세요.”
묘한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우린 이혼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소 고압적인 방법을 택했다. 지켜 주겠다거나, 다시는 당신을 괴롭게 만들지 않겠다는 유혹을 하는 대신 여느 때와 같은 방법을 택했다.
“견디다 보면 익숙해질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런 건 노력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에요.”
“나 또한, 당신을 도왔는데.”
스볘타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대가로 여기든지.”
11.
희뿌연 김이 번졌다.
스볘타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은 뒤 몸을 담그고 들어갔다. 그녀는 물속에 몸을 담근 채 내내 허기진 배를 허겁지겁 채웠다. 다샤가 진한 치즈를 욕실로 가져다주어 가능한 일이었다. 배를 채우자 졸음이 밀려와 몸이 축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근육통으로 전신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그럼에도 스볘타는 가능한 빨리 목욕을 마친 뒤 잠옷을 입고 아이들을 찾아갔다.
“부인.”
아이들을 돌보던 유모가 반색을 했다.
“괜찮으세요? 간밤에 돌아오지 않으셔서 많이 걱정했어요.”
“괜찮아요.”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유모의 말대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만일 숲속에서 동사하거나 아사했다면 아이들은 고아원에 처박혀 자라났을 것이다. 언제나 남을 위해 살아왔던 스볘타는 그것으로 또 다른 핑곗거리를 만들었다.
스볘타는 옅게 웃어 보인 뒤 유모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아이들은 천사처럼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오동통한 볼에 띤 홍조와 아기 특유의 숨소리가 사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