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59
힐덴베흐크 사교계의 관례와 달리 위르겐은 꽤 오랫동안 장교 생활을 했지만, 스볘타의 요구로 얼마 못 가 제대를 했다. 그 뒤의 그는 원래부터 관심이 있었다던 선박 사업에 힘을 썼다. 그 탓에 그는 군인일 때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바빴다. 그리고 바쁘다는 이유로 그녀를 피할 때도 많았다.
이번에도 어쩌면 그 연장선인지도 몰랐다.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마님, 나가시게요?”
몇 해간 즐길 수 없었던 라제스트보를 생각하면 조금 한스러웠다. 물론 정부 차원에서 금지시키지 않았더라도 그녀는 라제스트보를 제대로 즐기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스볘타는 유달리 성탄절 준비에 열을 내는 편이었다.
“포인세티아 화관을 더 사 올까 해서요.”
“아…! 제가 사다 드릴게요.”
“아뇨. 아뇨. 성탄절 전날에 휴가 못 주는 것도 미안한데 심부름을 시킬 순 없죠. 그냥 오늘은 혼자…….”
“아녜요, 마님. 그냥 제가 사 올게요. 실은 버터가 떨어져서 나가 봐야 했던 참이거든요. 몇 개를 사 오면 될까요?”
“세 개면… 될 것 같은데…….”
스볘타는 머쓱한 얼굴로 목덜미를 쓸었다. 성탄절 전날까지 바우어에게 일을 시키고 있는 게 미안했다. 위르겐만 아니었어도 진작 휴가를 줬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이브답게 일거리가 없었다. 이 시기에 힐덴베흐크에서 일하는 사람은 의사와 이 집 사용인들뿐이다.
여유를 기회 삼아 미뤄 두었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자 졸음이 꾸벅꾸벅 밀려왔다. 워낙 지루한 철학책이었기에 잡념도 걱정도 전부 졸음에 묻혀 갔다. 그러나 푹 잘 순 없었다. 스볘타는 새벽이 오길 기다리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열심히 꾸며 둔 트리 밑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두 손에는 커다란 선물 상자가 들려 있었다.
기차와 비행기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비행기를 선택했다. 평소에는 잘 먹이지 않던 초콜릿과 우유 캐러멜, 그리고 예쁘게 모양을 낸 쿠키 또한 넣어 두었다. 요즘 들어 예쁜 걸 찾는 옐레나를 위해 커다란 비단 리본도 넣었고, 알렉산드르를 위해 태엽 인형 또한 넣어 두었다.
산타 행세를 제대로 한 그녀는 종일 놀다 곤히 잠든 아이들의 방에 가 아이들의 뺨에 입을 맞췄다. 더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짐이라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고, 원망했을 때도 있었지만 결국은 그랬다. 지쳤을 때 포기하지 않고 힘을 낸 것도, 기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아이들 덕분이었다.
처음으로 걸을 때, 엄마라는 말을 할 때, 웃을 때 더없이도 뭉클했다. 아이들 덕에 그녀는 실로 오랜만에 행복을 느꼈다.
방을 나서자 방문 앞에 서 있던 유모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행복한 성탄절 되세요. 그녀 또한 같은 인사를 유모에게 건넸다.
그래, 그러니까 그건 아주 작은 충동이었다. ‘가족’이라는 테두리와 함께 불거진 충동. 다시 안온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꿈은 어설프게나마 이루어졌지만, 결코 완전해질 수는 없었다.
그녀의 또 다른 가족이 그 까닭이었다.
위르겐은 지금 떠나고 없었고, 아이들은 곤히 잠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안락의자에 앉아 세르게이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꺼내 들었다. 몇 해간 숨겨 뒀을 뿐 다시 읽지는 않았다. 차라리 아예 잊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하며 때론 기일조차 챙기지 않았다.
위르겐이 그녀의 집을 처분할 때, 세르게이와 주고받은 편지들은 전부 불탔으나 마지막 편지만큼은 간직할 수 있었다. 죽음을 알리는 전보와 함께 보내졌으니까.
세르게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스볘타는 단 한 번도 악인이 가족일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배우질 못했다. 성당의 신부님은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라 가르쳤고, 악인을 용서하라 가르쳤다.
하지만 오빠가 죄인이라면? 아버지가 죄인이라면?
이미 아버지와 세르게이가 수용소에서 값을 다 치렀다고 한들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그들을 사랑해야 할지 손가락질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세상 사람들 전부 아버지를 욕할 때 스볘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아빠인데, 나한텐 세상에 둘도 없이 소중한 아버지인데….
[스볘타.]편지의 내용은 늘 비슷했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수용소의 삶이 그를 단순하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암울하고 끔찍한 내용들이 대다수였다. 세르게이는 한순간도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았다.
[무척 외롭고 고단한 시간이었단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그간 살고 싶지 않았어.그런데 육체의 고단함이 삶에 대한 투지를 불러일으키더구나.
하지만 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
오히려 홀가분하고, 주님을 만날 생각에 기쁘기까지 하구나.]
하지만 마지막으로 그가 쓴 편지에는 기쁘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스베틀라나.수용소에서의 시간은 내겐 무척 외롭고 고단한 시간이었단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그간 살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우습게도 육체의 고단함이 삶에 대한 투지를 불러일으키더구나.
하지만 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
오히려 홀가분하고, 주님을 만날 생각에 기쁘기까지 하구나.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너를 축복했고, 사랑하게 되었지.
네가 혈육이라서가 아니었어.
넌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단다.
나와 형제들이 지은 죄를 네가 짊어지게 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아.
부당하게 짊어진 권리를 진작 내려놓았다면, 그래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왕실이 전쟁에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나는 이렇게 추악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여태 난 억울하다고만 생각해 왔다.
무고한 네가 오랜 세월 고통받았다는 사실은 망각해 왔어.
라나, 네가 날 원망한다면 난 기꺼이 네 앞에 무릎을 꿇을 거란다.
널 원망하지 않아.
그저 죄스럽구나.
언젠가 마주할 일이 생긴다면, 그땐 흩어진 가족들과 환히 웃으며 만나자.]
손수건을 쥐어 들고 흐느끼던 그녀는 언제나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사랑한다, 스볘타.]스볘타는 손수건을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마지막 문장을 중얼거렸다. 하늘색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사랑한다, 스볘타.”
모든 문장이 번져 있었다. 특히나 마지막 문장은 많이 번져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글씨를 읽는 데 무리가 없을 만큼 희미한 번짐이었지만 분명히 보였다. 보일 수밖에 없는 번짐이었다. 오빠의 죽음을 알고 제정신이 아닐 때는 몰랐었다. 하지만 그간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왜 여태 몰랐지……?
손가락을 들어 이미 마른 잉크를 길게 쓸어 보았다. 당연하지만 번짐이 짙어지는 일은 없었다. 이미 바싹 마른 잉크였으니까.
전부 쓰레기 소각장에서 타 버렸겠으나 지금껏 받아 온 편지는 이렇게 번져 있지 않았었다. 이만한 번짐을 지금껏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세르게이가 쓴 편지가 번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몇 해 전 게오르기와 로만과 식사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세르게이는 왼손잡이였고, 그것을 교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왼손잡이인 사람들은 늘 흔적을 남겼다.
잉크가 아무리 많이 발달했다고 해도 왼손잡이 특유의 번짐을 막기는 어려웠다. 왼손을 쓰는 사람들은 전부 이런 흔적을 남겼다.
그러니까…
그럼 여태 왜…….
***
저택으로 돌아온 위르겐은 분위기가 어수선하다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성탄절 특유의 들뜸은 아니었다. 달려오는 아이들을 안아 든 위르겐은 느긋하게 주위를 살폈다. 반짝거리는 것들로 장식된 저택이 부산했다. 사용인들은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전부 예배를 보러 성당으로 떠났고, 남은 건 아이들의 유모인 슈니츠 부인이 전부였다.
“아빠!”
알렉산드르와 옐레나가 그에게 치댔다.
“엄마는 왜 방에서 안 나와요?”
알렉산드르와 옐레나는 그게 궁금한 모양이었다.
“선물은?”
“산타 할아버지가 두고 가셨어요.”
금세 들뜬 옐레나가 방긋방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초콜릿하고, 리본하고, 비행기하고…….”
“우유 캐러멜도요!”
“맞아요. 우유 캐러멜.”
신이 난 옐레나가 위르겐에게 선물받은 우유 캐러맬을 건넸다. 위르겐은 옐레나가 건넨 캐러맬을 받아서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성당에는 언제 가요?”
선물받은 리본을 반으로 묶은 머리에 곱게 찬 옐레나가 조곤조곤 물어 왔다.
“그동안 성가대 연습을 열심히 했는데…… 엄마는 언제 오세요?”
“엄마는.”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을 만큼 목이 막혔다.
“성당은 슈니츠 부인과 가렴.”
아이들을 쓰다듬으며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슈니츠 부인이 그를 향해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알렉산드르가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위르겐은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둥글고 순한 회색 눈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때마다 위르겐은 아들에게서 자신을 읽어 냈다. 유년기의 자신이 훤히 보였다.
멍청하고 나약해선 받을 수 없는 애정을 갈구했던.
장갑을 낀 손이 알렉산드르의 작은 손을 가차 없이 털어 냈다. 그의 손길에선 일말의 혐오가 묻어났다. 그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위르겐은 계단을 올라 꽉 잠가 둔 스볘타의 방 문을 열쇠로 땄다. 방 안에 있을 스볘타가 바랐을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이불 속에 웅크리고 들어간 스볘타에게선 답이 없었다.
“스베틀라나.”
위르겐은 이불을 거두는 대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의 시선은 탁자 위에 놓인 빛바랜 편지에 닿았다.
“스볘타.”
위르겐 또한 읽어 본 적 있는 편지였다. 세르게이 안토노비치가 죽기 직전 남긴 편지였다. 스볘타가 유일하게 읽었을 진짜 세르게이의 편지였다. 가슴이 내려앉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덤덤했다. 언젠가 겪을 일을 이제야 겪는 거다. 예견했고, 예정된 것이었다.
짧은 탄식이 전부였다.
이젠 너도 알겠구나. 내가 네 오라비에게 무슨 짓을 벌였는지.
위르겐은 스볘타를 감싼 이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는 그녀가 덮은 이불을 쓸며 그 속에서 훌쩍이는 그녀를 위로하려 애를 썼다.
위르겐은 스볘타가 불행한 게 정말 싫었다.
그 불행이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위르겐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다. 그녀의 불행은 전부 그의 탓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역한 것이 스볘타의 불행인데, 그게 전부 제 탓이라니. 그런데도 그는 스볘타의 다리를 부러트려 붙잡아 둔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스볘타는 그가 유일하게 품었던 욕망이었다. 사랑 따위의 고결한 단어를 붙일 수 없을 만큼 질 떨어지는 더러운 욕정이었다. 그의 유일한 행복이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물기에 젖은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를 원망했다. 이번에도 위르겐은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할 수 없었다.
“애들을 위해서건 나를 위해서건…… 당신을 용서하려 애를 썼어.”
비참할 만큼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그런데 그럴 수 없을 만큼, 당신은 정말 끔찍한 사람이야.”
비틀대며 침대에서 일어선 그녀가 흐느끼며 작게 외쳤다.
위르겐은 서랍장을 향해 비척이며 걸어가는 스볘타를 가만히 응시하였다. 스볘타는 열쇠를 찾아 들고 잠겨 있던 서랍장을 열었다. 서랍장 속에는 은빛 리볼버가 담겨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권총을 쥐어 든 그녀는 짐승처럼 흐느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끅끅 울었다.
“정말이야…… 정말이야, 위르겐… 나는 정말로… 정말 널 용서하려고 했단 말이야…….”
어깨를 들썩이며 울던 그녀가 몸을 돌려 그를 향해 장전한 총을 겨눴다.
“당신을 사랑하려고 했어.”
오래된 추억을 꺼내 얘기하는 노인처럼 스볘타의 눈빛이 흐릿했다. 위르겐은 피하지 않고 잠자코 섰다. 총을 뺏으려 들지도 않았다. 한 발짝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는 겁내지 않았다. 눈을 감지도 않았다. 모든 광경을 지켜보려 애를 썼다.
“전부… 전부 당신이 망쳤어. 나는 행복할 수 있었어. 행복할 수 있었어. 당신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행복했을 거야. 그날 도망쳤어야 했어. 당신을 만나는 순간 있는 힘껏 내달렸어야 했어. 불안했는데…… 정말로 불안했는데… 내가 어리석었어. 너무 어려서…… 내가… 실수했어. 실수했어!!”
고함을 내지르던 그녀는 총을 떨어트리며 주저앉았다.
“날 더럽다고 모욕했어.”
“그래.”
“날 강간했어.”
“그래.”
“당신이 날 강간했어. 임신시켰어. 내가 도망칠 수 없도록 묶어 뒀어. 그러고도 사과하지 않았어. 그런데… 그런데 당신은 내… 내 오빠까지…….”
절규하듯 내뱉던 말을 멈춘 스볘타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