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63
“…….”
“애정을 담아 애들하고 놀아 주세요. 당신도 알잖아요. 어릴 때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당신이 아버님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무거운 몸을 일으킨 스볘타는 위르겐의 어깨를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그녀는 추위에 떠는 사람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당신은 제 남편이잖아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하지 않잖아요.”
틀린 단정이었다. 위르겐은 정말로 노력하고 있었다. 예뻐하며 어르고, 쓰다듬고, 안아 주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예민해서 미묘한 위화감도 잘 감지해 냈다. 어린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속일 수가 없었다.
그가 아이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위르겐 또한 핏덩이부터 길러 낸 아이들을 귀히 여겼다.
그러나 그는 아이들이 두려웠다. 결국은 제가 다 망쳐 버릴 것이 자명하여 아이들에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자식들을 볼 때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매 순간 깨달았다. 그가 지은 죄의 증거가 되어 주었고, 그녀를 붙잡는 수단이 되어 주었다.
위르겐은 조소를 머금었다. 스볘타가 자식들의 얘기를 꺼낸 뒤에야 자신이 망상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망상 속의 그녀는 한 번도 자식들의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기어이 해냈구나.
스볘타를 체념하게 만들어서 그녀가 용서를 입에 담게 했다. 그가 바라던 일들이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영원히 그녀를 잡아 가둘 수 있을 것이다. 일순 희열이 일었으나 그 뒤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이었다.
깊은 물속에 빠진 것처럼 숨통이 조여들었다.
“당신은 왜 그때 나한테 아이를 낳아 달라 한 거죠?”
스볘타는 뻣뻣한 얼굴로 물어 왔다. 위르겐은 얼마 못 가 답을 찾아냈지만, 입에 담지 않았다.
이제 와 당신과 단란한 가정을 이뤄 보고 싶었다는 말 따위를 내뱉는 건 치졸하고 추잡스러운 변명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껏 벌인 짓거리들이 전부 추잡스러웠다. 역겹게 썩어 든 가슴팍이 욱신거렸다.
“당신과 한번 하고 싶었습니다.”
스볘타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위르겐은 실소를 터트리며 스볘타의 눈을 피했다.
“몸정이라도 들었습니까? 이제 와서 나를 용서하겠다는 걸 보면.”
위르겐은 차마 스볘타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밀어 낸 뒤 뒷걸음질을 쳤다. 괴물을 마주한 사람처럼 두려움에 떨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크게 부릅뜬 스볘타의 눈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분노에 젖어 있지는 않았다. 위르겐이 스볘타를 망쳤기 때문이었다.
위르겐은 스볘타를 체념하게 만들었다. 분노할 여력조차 앗아 갔다. 복수를 명목으로 벌인 이기적인 짓이었다.
왜 모든 일이 이렇게 된 걸까? 다른 방법으로 널 가졌더라면 이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을까? 결국은 형제에 대한 신의도, 너도 지키지 못했는데 무엇을 위해 발버둥 친 걸까.
위르겐은 정말로 그녀를 죽여 없애고자 했다. 괴로움의 근원이 전부 스베틀라나니 그녀를 죽인다면 모든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스볘타가 용서를 입에 담다니. 차라리 꿈인 편이 나을 것이다.
위르겐은 그녀에게 용서를 받으면 모든 일들을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거란 헛된 기대를 하지 않았다. 스볘타는 그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고, 그렇기에 용서를 입에 담은 것이다.
“왜요? 나한테 실망했습니까?”
스볘타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위르겐은 그런 그녀를 차갑게 식은 낯으로 내려다보았다.
“나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던가?”
위르겐은 비틀리게 웃으며 그녀의 뺨을 훑었다.
“아니면 동정이라도 했습니까?”
“갑자기 왜…….”
“총으로 갈기려 든 주제에 이제 와서?”
뺨을 한 대 얻어맞을 작정이었는데 스볘타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위르겐은 셔츠를 벗어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 두었다.
그는 그녀를 잘 알았다. 오래 지켜봐 온 만큼 그 누구보다도 그 여자를 잘 알았다.
스볘타는 독했고, 독한 척에 능했지만 모질지는 못했다. 저토록 물러 터진 마음을 가지고 여태 버텨 온 게 대단하다 감탄할 수 있을 만큼.
그런 여자가 총구를 겨누며 저주했다. 살인을 결심할 때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 증오를 안고 그녀는 지옥 속에 살았을 것이다. 싫은 남자의 자식조차 사랑하는 여자에겐 버거운 일이었겠지. 위르겐은 그런 스볘타에게 환멸이 났지만, 동시에 그런 스볘타가 가여웠다.
“스볘타. 이제 떠나세요. 이제 정말 다 끝냅시다.”
핏발이 선 눈으로 스볘타를 바라보며 위르겐은 뇌까렸다.
“당신한테 질렸습니다.”
명치를 얻어맞은 것처럼 끔찍한 고통이 일었다.
위르겐은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광기에 절었던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위르겐은 스볘타에게 용서를 구하려 들었던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분노조차 앗아 가려 했다. 이미 여자의 모든 것을 앗아 간 주제에.
용서해 달라는 애원은 그녀를 위해서가 아닌 저를 위해서였다.
울부짖으며 도망가는 여자를 쫓아간 것 또한 위르겐 자신을 위해서였다. 위르겐은 한 번도 스볘타를 위한 적이 없었다.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십시오.”
스볘타가 든 총에 맞아 죽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모든 일은 바르게 돌아갔을 것이다.
“스볘타, 당신에겐 날 용서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이 감히 용서를 내게….”
위르겐은 할 수 있는 한 제일 매정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당신 아이들도 데려가세요. 그딴 건 내게…….”
“위르겐.”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미뤄 뒀다.
여덟 살짜리 어린애를 용서하고도 오래도록 미뤘다. 사랑을 자각하고도 미뤘다. 불행한 그녀를 바라보는 일이 괴롭게 되었을 때도 미뤄 왔다.
그런데 너무 사랑하게 되었다. 이젠 그 여자가 자신보다도 소중하게 되어 버렸다.
관심을 잡아 두기 위해 괴롭혔고, 불행할 것을 알면서도 잡아 뒀고,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을 알았음에도 애를 썼다. 욕정을 채우기 위해 겁탈했으며, 붙잡아 두기 위해 임신시켰다.
살아가고 싶었다. 살아가기 위해선 심장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도려낼 수 없었다.
그러나 위르겐은 더는 스볘타를 가둬 둘 수 없었다.
“용서받을 생각이 없는 건가요? 도대체 왜….”
“그간의 우정을 봐서 기차표는 제가 사겠습니다. 양육비도 넉넉히 챙겨 드리도록 하죠.”
“우정? 언제부터 위르겐 씨와 나 사이에 우정 같은 게 있었죠?”
이제 위르겐은 자신이 어떻게 되건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어차피 너는 불행하니 내 곁에 있어라. 네게도 내가 필요하다.
전부 비참한 자기합리화였다.
그녀에겐 그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필요했던 건 위르겐뿐이었다.
“엘킨스키로 돌아가세요.”
“이제 와서 엘킨스키로 돌아가라고요? 위르겐, 당신 정말…….”
“제가 당신 인생을 망쳤음을 잊었습니까? 그냥 떠나세요. 나도 이젠 그만두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이 나한테…….”
스볘타의 뺨을 타고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그녀에게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당신도 진심으로 나를 용서하지 않았잖아.”
손수건을 움켜쥔 스볘타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내저었다.
위르겐은 울고 있는 스볘타를 끌어안아 품 안에 가둬 두고 싶었다. 이 순간조차 스볘타는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시간을 더 끌었다간 영원히 그녀를 놓아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이 겁이 났다.
“떠나 주세요, 스볘타. 당신을 볼 때마다 내 형이 생각납니다. 실수였습니다. 욕정이었습니다. 욕정에 눈이 멀어 당신을 겁탈했습니다. 아버지의 말대로 당신과 이래서는 안 됐습니다.”
그 순간 위르겐은 멍청하게 기대했던 모든 나날들을 떠올렸다.
바라선 안 될 것들을 바라 오며 견뎌 오던 숱한 나날들이 흘러갔다. 그 희망 하나를 등불 삼아 암흑 속을 걸어왔다.
그런데도 그는 간절히 원했다.
이제 그녀가 정말 모든 것을 잊고 떠나가기를.
정말 자신을 깨끗하게 도려내 주기를.
12.
좋은 추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스볘타와 함께했던 숱한 날들 중 좋았던 시절은 낡고 더러운 수용소에서의 날들이 전부였다. 순수했고, 때 묻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나날들이었다. 이혼의 절차는 허무하도록 간단했다.
위르겐은 법정 앞에서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았다. 구두를 신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당당했다. 미련이 남지 않아 속도가 일정했고, 망설임이 없었다.
스볘타와 아이들을 떠나보낸 뒤에도 위르겐은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반복했다.
매일 출근했고, 바삐 일했고, 퇴근한 뒤엔 깨끗이 몸을 씻었다. 아침이면 신문을 펼쳐 읽었고, 저녁이면 가벼운 운동을 했다. 직원들과의 관계에서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술을 마시거나 마약에 빠져들지도 않았다.
전처럼 차를 이상한 곳으로 몰지 않았고, 죽으려 들지도 않았다.
위르겐은 완벽했다. 완벽한 사업가였고, 완벽한 귀족이었다.
그는 이제야 제가 살아왔어야 하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듯, 평범하고 무탈하게.
생각보다는 견딜 만했다. 허상을 쫓아 왔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웠다. 애초에 쥐지 못할 거였으니 처음부터 없었다고 생각하려 애썼다.
그러나 있는 것을 없다 여길 수는 없었다. 액자에 걸린 사진 속엔 스볘타와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을 껴안은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에겐 지어 준 적 없는 미소였다. 자식을 질투하는 추한 아비가 되고 싶지 않아 액자를 돌려 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망령처럼 그를 내내 뒤따랐다.
위르겐은 스볘타에게 양육비를 명목으로 많은 돈을 부쳤다. 매일 비서를 시켜 그녀가 돈을 쓰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한 푼도 빠져나가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위르겐은 아예 스볘타의 직장에 손을 대 그녀의 임금을 늘렸다. 아이들이 머무는 보육원에 뇌물을 먹였다. 언젠가 그리했던 것처럼 뒤에서 손을 댔다. 스볘타는 그런 행동을 징그럽고 질척하다 평하겠지만 어차피 이젠 그녀가 알게 될 일이 없었다.
그녀는 엘킨스키의 작은 정비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세롄그라드는 아니었지만, 그 근처의 작은 광업 도시에 자리를 잡았고, 어쩌면 아르춈을 만났을지도 몰랐다.
질투로 가슴이 들끓었지만 누구와 어떻게 시작하건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에게는 자격이 없었고, 스볘타에겐 제대로 된 사람이 필요했다.
속이 뒤틀려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아 수면제를 한 움큼 삼켰다. 다른 사내와 스볘타가 함께 몸을 섞을 것을 상상하자 숨통이 조여들었다.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제가 한 일들 중 스볘타를 놓아준 것이 제일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아….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눈을 감았다.
언뜻 완벽하게 행동하던 위르겐은 서서히 말라 갔다. 꾸준한 운동을 하고 억지로 음식을 집어넣는다 하여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생활을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속부터 썩어 가기 시작한 육체는 결국 망가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는 제대로 살아가기를 포기했다.
위르겐에겐 가족이 없었다. 그에겐 아무도 없었다. 병든 그를 챙겨 줄 사람은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기에 그렇게 되었다. 저택에서 일하던 사용인들이 의사를 불러 그를 돌보게 하였지만, 의사의 치료는 소용없었다. 육체가 아닌 마음이 병들었다. 치료할 방법은 없었고, 의사가 해 줄 수 있는 건 수면제나 영양제를 처방하는 게 전부였다.
그는 자신이 얼마 못 가 죽을 것을 예감했다.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쓸쓸하게 죽을 것이다.
제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집중할 수 없어 헛소리를 하는 일이 잦아졌고, 결국 운전을 하는 도중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 일이 일어난 뒤로 그는 더는 일을 하지 않았다.
위르겐은 매일 밤을 새워 그녀와 주고받은 편지를 반복해서 읽었다.
사랑한다고 쓰인 대목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비참하여 눈물이 흘렀다. 훔친 애정을 여태 버리지 못했다. 차라리 수용소의 세르게이가 되고 싶었다. 가족이 된다면 이 애정을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었다.
나도 너와 가족이 된다면.
아무리 지독해도 후회는 무용했다.
편지를 쥐어 들고 위르겐은 강가를 산책했다. 달빛이 드리워진 강은 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겨운 겨울이 지나갔다. 계절이 변해 강물은 얼어붙지 않았고, 사방에선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빼곡히 자라난 갈대가 흔들리며 바람 소리를 냈다. 그는 질척한 강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암흑 속에서도 그의 낯에 서린 절망은 가려지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다.
그녀를 보내는 순간 죽음을 각오했지만, 마지막으로 책임질 게 있었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책임이었다.
눈을 감자 스볘타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의 옆에 앉은 그녀는 조잘조잘 잘도 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