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64
지금의 그는 엘킨스키어를 할 수 있기에 그녀의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말이 통하지 않는 여자애와 어울리던 순간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영원히 돌아갈 수 없으리라 여겼는데 이토록 생생하다.
위르겐은 웃으면서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겼다.
“네가 한 건 사랑이 아니야.”
“알아.”
사랑이라는 건 그렇게 역겨운 게 아니야, 위르겐.
동화책을 읽듯 스볘타의 목소리는 나긋했다. 위르겐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스볘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행복한 그녀를 마주하고 싶었다. 그녀의 행복을 책임지고 싶었다.
“네가…… 이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사죄이자 사랑의 표현이었다.
위르겐의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녀가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미소를 머금었던 그는 눈을 뜨고 쓸쓸하고 공허한 강가를 내다보았다.
***
엘킨스키행 기차를 탄 스볘타는 아이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차를 타고도 얌전할 만큼 말을 잘 듣는 아이들은 아니었다. 체스 판을 쥐여 준 뒤에야 알렉산드르와 옐레나는 멀미가 난다며 칭얼대는 것을 멈췄다. 아직 체스를 둘 줄도 모르면서 아이들은 체스 말을 쥐고 잘도 놀았다.
기차의 창을 바라보았다. 정말 모든 일이 끝났음에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가 없었던 나날들은 이제 잘 떠오르지 않았다.
바쁘고 고단하고 엉망진창인 세월을 살아왔다. 평온했던 건 유년기의 짧은 시절이 전부였다. 그조차 어렴풋해 꿈처럼 느껴졌다.
어릴 적의 그녀는 동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아름다운 성에서 살았고, 기름진 음식들만 먹었고, 비단으로 지은 옷들만 입었었다. 그 짧은 시절조차 헛된 평온이었다. 농노 해방령이 내려진 뒤에도 그녀의 아버지는 소작농들을 농노처럼 대해 득을 취했고, 그녀의 행복은 전부 남을 양분 삼아 이뤄 낸 것이었다.
얼마 못 가 전쟁이 터졌고, 친구들과 이웃들을 잃었고, 내쫓기는 신세가 되어 동부로 내몰렸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무능한 왕실에 지친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켰다. 주변국에 비하면 턱없이 늦게 왕실과 귀족들을 끌어내렸지만, 그 여파는 대단했다. 붉은 물결은 세상을 잡아먹을 것처럼 퍼져 나갔다.
그사이에 내전이 터졌다. 스볘타는 쫓기고 또 쫓겼다. 도망치려 했지만 분노한 민중들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사이에 당했던 일들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처형당한 뒤의 생활은 엉망이었다. 어머니는 반쯤 정신을 놓았고, 능력이 없어 제대로 된 일거리를 구할 수 없었다. 공장에선 어리다며 그녀를 받아 주지 않았고, 삯바느질로 번 돈으로는 빵 한 쪽도 사기 어려웠다. 굶는 일이 잦았다. 심지어는 홍등가에 팔려 가기까지 했었다.
그 뒤에 잠시 만났던 아르춈과는 어땠더라. 그의 연인 행세를 해 가며 잠시 즐거웠지만 그것도 전부 허상이었다. 위르겐과 지냈던 나날들이 특별히 괴롭지 않을 만큼 인생 전체가 엉망이었다.
하물며 그를 용서하고 제대로 살아 보려 했을 때 이렇게 쫓겨나게 되었다. 그는 그만하자는 말을 내뱉은 뒤론 아예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얼마 못 가 이혼 서류를 보내왔다. 처음에는 위르겐 특유의 변덕이라 여겼지만, 인장이 찍힌 서류와 마주했을 땐 더는 그렇게 여길 수 없었다.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 어차피 위르겐과의 관계가 정상이 아님을 알지 않았나? 그가 미워 총까지 겨누지 않았었나.
그녀는 도장을 찍고 서류에 서명을 했다. 그렇게 끝이었다. 간단했다. 짐을 챙겨 다급히 도망칠 필요도 없었고, 그를 죽일 필요도 없었다. 너무도 쉽게 모든 일이 끝이 났다. 한순간의 망상이나 꿈처럼 허망했다.
“엄마 울어요?”
옐레나가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울지 마세요.”
스볘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레나, 사샤…….”
아이들의 따뜻한 손을 붙잡은 스볘타는 흐느끼며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 힘들어…….”
너무 지쳐 이렇게 몸서리친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 스볘타는 너무 지쳐 오래된 성당의 고해소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신을 믿지 못하게 되어 오랫동안 고해 성사를 하지 않았지만 신부님이라도 붙잡고 이 분노를 털어 내고 싶었다.
“고해 성사를 하고 싶습니다, 신부님.”
죄를 고하는 것은 신자의 의무였다. 가벼운 죄를 고하기도 했고, 무거운 죄를 고하기도 했다. 불륜이나 매춘, 도둑질 따위……. 그리고 증오.
“저는 남편을 증오하고 있습니다.”
깊이가 깊어 나을 방법이 없는 상처는 잊을 만하면 아려 와 그녀를 후벼 팠다.
“신부님, 저는 남편에게 겁탈을 당했습니다. 남편에게 이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습니다. 매춘이나 다름없는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까? 제가… 어떻게 그 사람을 용서하고……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죠? 저는 어떡해야 하는 거죠?”
스볘타는 신부의 대답을 듣기 전에 도망치듯 고해소를 빠져나와 강당을 향했다. 신부는 아무것도 모른다. 신부는 그저 신의 종자일 뿐이다. 그에게는 어떠한 힘도 없다. 이 고통을 이겨 낼 방법을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견딜 수 없이 흘러나온 비통한 울음소리가 쩌렁쩌렁 강당을 울렸다.
그녀는 긴 의자가 놓인 홀을 가로질러 내달린 뒤, 성상 앞에서 힘없이 허물어졌다.
“구원해 주세요!!”
칼에 꿰뚫린 양 내지르는 그녀의 고함이 침울했다. 징그럽고 기괴할 만큼 우울하고 처절했다.
“저를 구원해 주세요. 제가 무얼 그리 잘못했다고…… 저를… 저를 이 지경으로 내모시는 겁니까? 주님, 주님. 제발 저를… 구원해 주세요.”
신에게선 대답이 없었지만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신을 향해 애원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고 울부짖으며 정신없이 성호를 그었고, 눈물을 떨어트리며 성모 마리아의 발에 입을 맞췄다.
눅진한 몸이 파들파들 경련했다.
애원은 원망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신께선 무얼 하고 계십니까!?”
그 누구도 쉽게 원망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신을 원망했다. 신을 저주하고 원망하고 증오하며 성상 앞에 엎드려 탈진할 지경까지 울부짖었다.
전쟁이 멎었는데, 이젠 따듯한 집과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있는데, 이제 위르겐은 더는 협박하고 들지 않는데.
가슴속의 증오가 그녀를 지옥으로 이끌었다.
***
엘킨스키에 도착한 스볘타는 적당한 집을 얻었고 직장 또한 구했다.
오랜만에 도착한 고향은 여전했다. 멋없이 잿빛으로 지어진 건물들도 여전했고, 길가에서 풍기는 흥건한 담배 냄새도 여전했고, 정 안 가는 날씨도 여전했다. 부러 멋없이 만든 꾸밈없고 반듯한 차들은 한눈에도 투박했다.
“엄마, 아빠는요?”
아빠를 찾는 아이들에게 해 줄 말이 없었다. 너희 아버지는 너희에게 관심조차 없다고 냉정하게 말할 자신도 없었고, 거짓말을 꾸며 낼 자신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어중간히 웃어 보였다. 아이들이 보기에도 어색한 웃음이었다.
“내일부터는 너희는 보육원에 가야 해. 사샤랑 레나는 용감하니까 그럴 수 있지?”
“왜요? 보육원이 뭐예요?”
마음에 여유가 없어 아이들에게 고운 말로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이들의 성가신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몇 번 더 물어 오던 아이들은 스볘타의 눈치를 보며 터벅터벅 방으로 돌아갔다.
스볘타는 귀리를 끓여 까샤를 만들었다. 맛은 없었어도 저녁을 해결하기엔 무리가 없었다. 저녁을 챙겨 먹이고 아이들을 잠재운 그녀는 제 방에 문을 잠그고 들어갔다.
위르겐이 보내 준 돈이면 더 좋은 집을 살 수도 있었고, 아이들을 보육원에 보내는 대신 사람을 쓸 수도 있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그가 보내 주는 것들도 받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왜 그럴 수가 없어……?”
위르겐은 이 방에 없는데 그녀는 그가 있는 것처럼 질문을 꺼냈다.
“벗어날 수가 없어…….”
잔인한 속박이었다.
그녀는 많은 일을 이겨 내고 살아갈 만큼 강했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지쳐 무언가를 할 의지조차 없었다.
“나도 당신을 사랑했던 것 같아.”
사방이 지독하게 고요해서 눈물이 나올 만큼 고독했다.
위르겐이 스볘타를 잘 아는 것만큼이나 스볘타 또한 위르겐을 잘 알았다. 함께한 세월이 길어질수록 그가 보였다. 그는 냉정한 사람이 아니었고, 이성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용감한 사람도 강한 사람도 아니었다. 망가지고 뒤틀린 사람이었다. 비바람을 맞아 녹슬어 버린 사람이었다.
보내 준 것이다.
더는 얽어 둘 수 없어서 자신을 보내 준 것이다. 그걸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위르겐이 떠나기를 원했다. 떠나서 전부 잊어 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스볘타는 그를 떠났다.
떠나온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를 사랑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를, 그녀가 사랑했다. 증오가 짙어 전부 가려졌지만 실은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 긴 시간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넋을 놓고 날이 밝을 때까지 울었다. 흐느낌이 새지 않을 만큼 고요히 울었다. 당장이라도 그가 다가와 어깨를 감싸 줄 것 같았다. 부당한 기대였다.
날이 밝았을 때 그녀는 찬물로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가기 싫다고 울고 불며 떼를 쓰는 아이들을 보육원에 보내고, 자전거를 타고 정비소로 출근을 했다. 풀 냄새가 섞여 든 바람이 따뜻했다. 작은 주택들의 화단에는 탐스러운 꽃들이 만개해 있었고 새 지저귀는 소리가 끊이질 않고 들려왔다. 벌과 나비가 바삐 날아다녔고, 맑은 볕이 내리쬐었으며 광장에선 겨울 내내 얼어붙었었던 분수가 솟구쳤다.
물줄기가 솟구치는 분수는 보석처럼 반짝였다. 방울방울 흩어지는 무수한 양의 수정들…….
녹음이 진 세상을 바라보던 스볘타는 브레이크를 당겨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아아. 봄이 왔구나.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광장 한복판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자전거를 버리고 분수대로 뛰어가 솟아나는 물줄기에 팔을 뻗었다. 분수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은 혁명가는 위풍당당 말을 타고 있었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똑똑히 마주하며 똑똑히 미소 지었다.
차가운 물줄기가 그녀의 겨울 코트를 시원하게 적셨다.
스볘타는 하늘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에게 물었었다.
왜 마지막 편지는 진짜 오빠의 편지를 건네줬냐고.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알았다.
그건 그의 양심이었을 것이다. 참 대단한 배려라 눈물이 다 났다.
“빌어먹을 개새끼…….”
욕지거리를 하고 내다본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잿빛으로 범벅이 된 고향조차 이토록 찬란했다. 그녀는 넘어진 자전거를 세워 다시 올라타 어색할 만큼 활기차게 페달을 밟았다.
얼마 만에 다시 정비소에서 일하게 된 건가.
아르춈의 시야니예 정비소에서 일하던 때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스미르노프도 이바노프도 전부 아득하고 멀었다. 고마운 은인이고 애틋한 동료라고 여겼지만 금세 잊고야 말았다. 원래 그런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무엇이든 잊혀진다. 숱한 기억들에 묻혀 없었던 것처럼 희미해질 것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위르겐과의 일도 고약한 악몽으로 치부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웃으며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왜 그렇게 젖어서 오십니까?”
정비소에 도착해 마주한 남자 정비공 하나가 질겁하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4월이 왔다지만 여전히 날은 추웠다. 젖은 채로 다녀도 괜찮은 날씨는 아니었다.
스볘타는 상대의 놀란 반응을 무시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스베틀라나 안토노브나입니다.”
“성은요?”
“시클렌코바.”
그녀는 위르겐의 성이 아닌, 아버지의 성을 정비공에게 알려 주었다.
위르겐은 없었다. 이제 그녀의 인생에 위르겐은 없었다. 걱정하지도 않을 것이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결심이 섰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인생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잘 살 것이다.
당신은 어디선가 나를 지켜볼 테니 보란 듯이 잘 살 것이다.
“잘해 봅시다, 스베틀라나 안토노브나.”
“그냥 스볘타라고 불러 주세요, 주콥스키 씨.”
“보바라고 불러요, 스볘타.”
힐덴베흐크에서 틈틈이 공부를 해 둔 덕에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그사이에 자동차의 구조가 조금 바뀌었지만 큰 무리는 없었다. 간만에 제대로 된 일을 하니 고단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6시가 되었을 때 퇴근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찾아 아파트를 향했다. 자전거를 끌고 걷는 그녀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엄마. 우린 이제 집에 안 돌아가요?”
옐레나가 침울하게 물어 왔다. 근사한 저택에서 지내다 방 두 칸짜리 아파트에서 지내는 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이곳에는 넓은 정원도 없었고, 귀여운 강아지 루빈 또한 없었다.
낯선 곳에서 적응을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스볘타는 잘 알았다. 아이들이 마냥 가여웠다.
“집이 그립니?”
“네.”
알렉산드르와 옐레나가 동시에 대답했다. 스볘타는 갈피를 잃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의 단단한 결심조차 그 순간에는 무용했다. 엘킨스키보다는 힐덴베흐크가 나을 것이다. 자신보다는 위르겐이 나을 것이다.
아이들을 데려오지 말았어야 한다는 후회가 들어 괴로웠다. 적어도 통장에서 위르겐이 보내 준 돈을 빼내 쓰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혼란스러웠다.
“보육원은 어땠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