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65
“말을 잘 못 한다고 애들이 놀려요.”
여태 힐덴베흐크에서만 있어 온 아이들은 엘킨스키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했다. 놀림감이 되었을 아이들을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놀리면…… 그냥 무시해. 화가 난 티를 내면 더 괴롭힐 거야.”
“하지만…….”
“엄마가 미안해.”
걸음을 멈추며 사과했다.
그러자 알렉산드르와 옐레나가 그녀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왜 엄마가 사과해요?”
“미안해.”
잘 살아 보겠다고 결심을 했음에도 여전히 길이 보이질 않았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첫발부터 헛디뎠다. 아이들과 함께 아파트에 들어간 그녀는 수첩을 펼쳐 계획을 적어 내렸다.
“첫째. 주말에는 영화관을 간다.”
그녀가 없는 사이 엘킨스키에는 영화 산업이 번성했다. 값이 아주 쌌고, 종류가 다양했다. 즐거움을 위해 그 정도 사치는 허락해도 될 것 같았다.
“둘째…… 불평하지 않는다.”
불평하다 보면 끝이 없었다. 그녀처럼 불합리한 인생을 살아온 여자에겐 더더욱 그러했다. 푸념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셋째…….”
그렇게 열 가지를 적어 내린 스볘타는 책상 위에 엎드려 불편한 자세로 잠들었다.
세월은 야속할 만큼 바삐 흘렀다. 옐레나와 알렉산드르는 키가 반 뼘이나 자랐고, 그들이 본 영화는 스무 편이 넘었다.
스볘타는 정말로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었다. 위르겐이 매달 부치는 통장에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언젠가 아이들에게 물려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처음에는 고단했던 정비소 일에도 적응했고, 돈을 모아 그럭저럭 괜찮은 차도 한 대 샀다.
본래 자동차는 사치품이라 구하기도 힘들고 값이 터무니없이 비쌌지만, 직업이 직업인만큼 운 좋게 얻을 수 있었다.
꿈에 그리던 자가용이었다. 힐덴베흐크 차에 비하면 모양은 형편없었지만, 성능은 괜찮았다.
그녀의 다음 목표는 자동차를 손수 튜닝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마련한 자가용을 매일 닦고 광을 냈다.
잘 적응하지 못하던 아이들 또한 그럭저럭 잘 적응했다. 그새 친구를 많이 사귀더니 집까지 데려왔다. 스볘타는 기쁜 마음에 없는 요리 실력을 발휘해 쿠키를 구워다 줬는데, 순수한 아이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먹어 본 쿠키 중 제일 맛없는 쿠키라며 그녀의 요리에 혹평을 내렸다.
남은 가족들과도 연락을 하고 지냈다. 결혼했다는 로만을 찾아가 새언니의 얼굴도 보고 왔다.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오빠를 잘 부탁한다며 선물로 스카프를 건넸다. 그녀는 로만의 말대로 좋은 여자였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게오르기와도 한 번 만났는데 그 또한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원체 밝은 편이라 속을 알 순 없었지만 애인이 생겼다는 걸 보면 예전 버릇을 못 버린 것 같기도 했다. 성격이 아주 좋은 것도 아닌데 얼굴이 볼 만하니 그럭저럭 여자가 꼬이는 모양이었다. 게오르기를 만나는 여자들을 뜯어 말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지만, 꾹 참았다. 남매간의 얄팍한 의리였다.
스볘타는 일을 나가는 동시에 아이들을 챙겨야 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사이 그녀는 위르겐을 머릿속에서 치워 두었다. 숨 쉬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바쁜 것이 천운이었다. 여유로웠다면 내내 생각에 잠겨 지냈을 것이다.
완전히 그를 잊었다고 생각했다. 위르겐 또한 자신을 잊고 잘 살고 있으리라 믿었다. 아니, 믿지 못했어도 믿으려 노력했다.
그의 비서에게서 연락이 오기 전까진.
***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부자가 아니더라도 라디오와 전화기 한 대쯤은 집에 가져다 놓고 쓸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시골에선 라디오조차 보기 힘들었지만.
스볘타 또한 집에 라디오와 전화기를 두었다. 라디오를 틀어 노래를 듣는 일은 그녀의 낙이 되었다.
그녀에게 걸려 오는 전화는 대부분 보육원이나 정비소에서 걸려 오는 전화였다. 이따금 옐레나와 알렉산드르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오기도 했고, 이따금 친한 이웃에게서 전화가 오기도 했다.
밤에 전화가 울리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겼다. 어떤 예감이 들어 그녀는 머뭇거리며 전화를 받지 못했다. 받는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받아서는 안 된다.
스볘타는 팔짱을 끼고 버티며 불안한 얼굴로 거실을 서성였다.
그러나 결국은 홀린 사람처럼 전화를 받아 들고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여보세요?”
소란스럽다 느낄 만큼 가슴이 요동쳤다.
[안녕하세요, 부인.]힐덴베흐크의 말이었다. 목소리만으론 상대가 누구인지 유추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위르겐이 아님은 분명했다. 스볘타는 자신이 안도한 건지 실망한 건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가슴을 쓸어내렸다.
[누구시죠?] [하인리히 괸트겐입니다, 부인.] [아…….]스볘타 또한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오랜만이에요, 하인리히.]그는 위르겐의 비서 하인리히였다.
[전화를 드릴지 말지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위르겐 경께서도 부인께 소식이 닿는 걸 원치 않으셨고, 이미 두 분께서 갈라선 마당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예의가 아니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한테 무슨 일이 있나요?] [부인께서 돌아와 주셨으면 합니다.]하인리히의 부탁을 들은 그녀는 실소를 터트리며 어깨를 떨었다.
[죄송하지만 그럴 순 없어요. 위르겐도 원하지 않을 거예요.] [부인.] [못 들은 걸로 하겠어요.] [많이 아프십니다.]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스볘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요?]쌀쌀맞게 되물으며 수화기를 움켜쥐었다. 태연하게 굴려 애를 썼지만 가슴이 괴로울 만큼 저려 왔다.
[아시잖습니까?] [그래서 절 탓하실 생각이세요?] [그런 게 아닙니다. 저는 단지…….]끊어 내려 들어도 끊어지지 않는 위르겐은 정말이지 지독했다. 그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바칠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울음소리가 새지 않게 이를 악물며 숨을 참았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래도 경께선 오랫동안 부인을 돌봐 오지 않으셨습니까?] [하인리히 경은 그걸 돌봐 왔다고 표현하나요? 경이 아는 체할 문제가 아니에요.] [위르겐 경께선 오랫동안 부인을 지켜 왔습니다. 부인께선 추호도 모르시겠지만…….] [남자들끼리 편이라도 들어요?] [부인!]하인리히의 헛소리를 들을 바엔 아예 전화기를 내려놓을 생각이었지만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두 손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이만 용서해 주세요, 부인.]기가 차다.
스볘타는 창가에 앉아 병째 술을 홀짝이며 밤새껏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나 위르겐에 관한 생각을 비워 내진 못하였다.
***
[만나러 가겠어요.]스볘타는 간밤에 결국 위르겐을 찾아가겠노라 선언했다.
한 번 만나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얼굴 한 번 봤다고 여태 노력해 온 게 무너질 리 없었다. 밉긴 미웠어도 죽게 놔둘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인리히가 여행증을 발급받는 걸 도와줬다. 그 느린 공무원들 일 처리가 빨라진 걸 보면 뇌물을 듬뿍 먹인 모양이었다. 실소가 다 나왔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외롭고 불쌍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이혼한 아내한테 소식 전해 줄 비서 하나는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급한 대로 아이들을 이웃에게 맡겼고, 새언니에게 잠시만 집에 와서 아이들을 봐 달라 편지로 부탁했다. 급한 일이 생겼으니 양해를 부탁드린다고 정비소에 말해 두었다. 정비소 주인인 주콥스키는 그럴 바엔 일을 그만두라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밉고 싫어도 그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스볘타는 지체 없이 차를 몰아 기차역을 향했다.
많이 아프다면, 그럼 얼마 못 가 죽는 걸까? 그녀는 자신을 떠나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부모님, 오빠, 친척들, 친구들.
전쟁으로 이천만 명이 죽었고 숙청으로 천만 명이 죽었다. 요 몇십 년 사이 엘킨스키 연방에서만 삼천만 명이 죽었는데 위르겐이라고 안 죽는다는 법은 없었다. 한 번도 가정한 적은 없었지만, 위르겐 또한 죽을 수 있었다.
만일 도착하기도 전에 그가 죽는다면 어쩌지.
스볘타는 오랜만에 담배를 태워 피우며 짐 하나 없이 열차에 올라탔다.
가는 내내 책을 펼쳐 읽거나 퍼즐을 맞췄다.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침대칸에 눕자 기차가 덜컹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따금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지만 제대로 대답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설원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옷도 입지 못하고 부츠도 신지 못한 채 끝없이 펼쳐진 설원 위에서 미아가 된 것 같았다. 발이 시려도 신발을 신을 수 없었고, 길을 찾고 싶어도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춥고 고독하여 세상에 홀로 남은 기분이었다.
하인리히가 역사에 도착한 스볘타를 마중했다. 증기차가 내뱉는 뿌연 연기 틈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아낸 스볘타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부인!”
“하인리히, 정말 오랜만이에요.”
껴안고 입을 맞추며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었다.
“위르겐은…… 지금도 아픈가요?”
작은 목소리로 질문하다 스볘타는 기어이 울먹였다. 가슴속에서 울컥울컥 들끓었다.
“괜찮으십니다. 진정하세요, 부인. 바로 위르겐 경을 만나러 가실 겁니까?”
목을 옥죄는 양 갑갑했다.
생각할 여지조차 없었다. 스볘타는 하인리히의 차를 타고 위르겐의 저택을 향했다. 그의 방으로 걸어가는 내내 스볘타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수면제를 드시고 잠드셨습니다.”
그녀의 잇새로 한탄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그녀는 차마 문을 열지도 못한 채 문고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겁이 났다. 그를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을 만큼.
“가 보겠습니다, 부인.”
스볘타는 하인리히가 떠나고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문고리를 당길 수 있었다.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의 방은 여전히 그녀에게 익숙했다. 그러나 그의 방은 전과 같이 깔끔하지 않았다. 그녀는 부서진 술병이나 흐트러진 옷가지를 훑어보며 버겁게 걸음을 옮겼다.
위르겐은 잠들어 있었다. 스볘타는 눈을 감고 잠든 위르겐의 이마를 쓸어 그의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이마 위로 옅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사고가 났을 때 생긴 흉터였다.
인기척을 느낀 위르겐이 눈을 찌푸려 떠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볘타?”
초점 없는 그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그녀는 그의 이마에서 손을 떼어 낸 뒤 뒷걸음질을 치려 했다. 그러나 팔목이 붙잡혀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네가 왜 여기에…….”
억센 손길이었다. 붙잡힌 팔목이 부서질 것만 같아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도 그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비서 입단속 제대로 시키세요. 돌아와 달라고 나한테 애원을 하더군요.”
부쩍 야윈 그는 인상이 전보다도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온기라곤 조금도 남지 않은 낯이 부서질 것처럼 건조했다.
위르겐은 붙잡았던 그녀의 팔목을 놓아주며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스볘타는 뼈마디가 불거진 그의 손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바싹 마른 몸이 창백하고 탁한 빛을 띠었다.
“올 것 없었습니다.”
상체를 일으킨 위르겐이 감정 없이 중얼거렸다. 그는 망가진 라디오처럼 그것을 반복해서 읊조렸다.
“내가 왜 왔다고 생각하세요?”
“하인리히가 헛소리를 해 댄 모양인데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나가세요.”
위르겐은 망설임 없이 스볘타의 말을 받아치며 이를 갈았다.
“당장.”
스볘타가 버티고 서 있자 그는 몸을 일으켜 그녀를 난폭하게 밀쳐 냈다. 거친 손길에 밀려 그녀는 크게 휘청였다.
스볘타는 그의 전신을 조심스레 훑어보았다. 안색이 창백했다. 눈에 띄게 말랐다. 전보다도 움푹 들어간 눈가가 어두웠고, 입술은 허옇게 부르텄다. 그는 마치 유령처럼 보였다.
흐트러질 만큼 흐트러져 단추조차 제대로 여미지 않았다. 흘러내린 머리칼이 식은땀에 젖어 헝클어져 있었다.
그녀가 기억하던 그는 이렇지 않았었다. 악에 받쳐 광기에 절어 있을 때도 있었지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은 아니었었다.
“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