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66
부들부들 온몸이 떨렸다.
“그 고상한 복수의 연장선인가요?”
“가세요. 난 멀쩡합니다.”
“장례식 초대장도 만들어 돌리지 그러세요?”
그녀가 두 주먹을 움켜쥐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서글픈 얼굴이었다. 그는 그녀를 비정하게 밀어 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위르겐은 스볘타가 우는 것이 싫었다.
“당신 때문이 아닙니다, 스볘타. 울지 말고…….”
맹렬하게 위르겐을 쏘아보던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그의 뺨을 후려쳤다. 얼굴이 반쯤 돌아간 그의 입술 위로 벌건 핏방울이 맺혔다.
“왜 왔지?”
손등으로 피를 훔친 그가 지친 얼굴로 뇌까렸다. 원망이 짙은 목소리가 울적하게 흔들렸다.
“가랄 때 가.”
스볘타는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위르겐의 목덜미에 팔을 휘감아 그를 껴안았다. 그녀는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위르겐의 마른 몸의 뼈마디가 그대로 느껴져 감촉이 낯설었다. 그러나 그에게선 여전히 그의 체향이 풍겼고,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박동하는 심장 소리는 언제나 그러했듯 요란해서, 그녀는 흐느낌을 참아 낼 수 없었다.
웃어 보이고 싶었지만, 눈물만이 터져 나왔다.
아…… 그녀는 이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위르겐이 안쓰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건 우습고 한심한 감정이지만, 하지 않아도 될 동정이지만, 그가 미운 만큼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를 증오하는 만큼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팔을 내려 그의 가슴팍을 붙들어 잡은 그녀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흐느꼈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쌌다.
그녀는 망상 같은 게 아니었다. 분명히 그의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가슴이 저몄다.
스볘타가 곁에 없을 때와 같이 외로웠다.
“널 만나기 전까진 이렇게 외롭지 않았어.”
위르겐은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고독을 몰랐다. 사랑도, 증오도 몰랐다. 질투도 몰랐다. 이 체온을 다른 남자와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만으로도 명치를 맞은 사람처럼 괴로웠었다. 이 와중에도 그걸 떠올리며 속을 들끓였다.
위르겐은 고개를 힘없이 떨어트렸다.
“사랑해요.”
그를 안은 여자가 그렇게 말했다.
“사랑해요, 위르겐.”
위르겐은 돌이킬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돌이키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만나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위르겐은 수천 번을 떠올렸다. 빗속의 스볘타를, 정비소에서 다시 만난 날의 스볘타를, 억지로 청혼을 받아들일 때의 스볘타를.
한심하고 모자라서 사랑하는 여자를 괴롭게 만들었다. 어리석은 선택으로 나락까지 끌어내렸다. 하지만 시간을 돌린다 해도 변하는 건 없을 것이다.
아르춈을 사랑하는 스볘타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스볘타를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은 같은 선택을 반복할 것이다.
시간을 돌이킨다 한들 결국은…….
“너를 너무 사랑하게 됐어.”
처절한 고백이었다.
오랫동안 자신을 휘감았던 증오조차 사랑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우스웠다.
“내가 스볘타 너를, 너무 사랑하게 됐어.”
스볘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젠 널 영원히 보내 줄 수 없어.”
“위르겐.”
“나는 네 괴로움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너를 옭아맬 거다. 매달리며 구애할 거다. 네가… 네가 조금 전 그렇게 지껄였으니 나는 내가 그래도 된다고…… 그래도 된다고 믿을 테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미소는 맑았다.
“상관없어.”
“스볘타.”
“정말…… 상관없어. 우린 앞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거야.”
그의 뺨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내며 그녀가 단정 지었다.
***
새파란 새벽이었다.
위르겐은 스볘타를 품에 가둔 채 눈을 감았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감촉이 전부 환상 같았다.
날이 밝아도 그녀는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지난 몇 년간 그랬던 것처럼, 마을 사람들의 고장 난 기계를 고치러 다니기도 했고, 밀가루를 부어 파이를 굽기도 했다. 힐덴베흐크에서도 정비사 자격증을 따야 한다며 밤새 공부를 하기도 했다.
위르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매일 아침 면도를 했고, 반듯하게 다린 옷을 입고 출근을 했다. 건강은 오래지 않아 회복되었으며, 사업 또한 원활하게 돌아갔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몇 주 뒤, 엘킨스키에서 아이들이 열차를 타고 돌아왔다. 위르겐은 스볘타와 함께 아이들을 마중하러 역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아이들을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잔뜩 긴장했다. 말도 없이 집을 나왔으니 아이들이 겁을 먹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갈색 머리칼과 녹안을 가진 스볘타의 새언니 나탈리야가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걸어오고 있었다.
스볘타는 달뜨게 달려가 나탈리야를 와락 껴안았다.
“정말 고마워요, 나타샤.”
걱정과 달리 아이들은 그다지 겁을 먹거나 침울한 구석이 없었다. 나탈리야가 워낙 따듯한 여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볘타는 입을 맞춰 가며 아이들을 요란하게 반겼다.
“뭘요.”
“이쪽은 위르겐, 제 남편이에요.”
“안녕하세요?”
위르겐은 나탈리야의 인사를 정중히 받아 주었다.
“애들이 많이 속 썩였죠?”
스볘타는 이곳까지 아이들을 데려다준 나탈리야에게 고맙고 미안해서 죽을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임산부를 몇 날 며칠 열차를 타게 만들었으니 명백한 죄인이었다.
“정말 죄송해요.”
“아녜요. 레나랑 사샤 둘 다 너무 얌전하던걸요? 태어날 제 애도 귀여운 쌍둥이들처럼 얌전하고 순했으면 좋겠어요.”
“나타샤를 닮았으면 분명 그럴 거예요. 그나저나 오빠는 잘 지내나요?”
“그럼요. 요즘은 요람을 만드는데… 언제 한번 구경하러 오세요. 솜씨가 꽤 괜찮아요.”
“당연히 그래야죠. 첫 조카도 꼭 보러 갈게요. 분명 예쁜 아기일 거예요. 꼭 나타샤를 닮길 기도할게요. 혹시라도 오빠를 닮은 애들이 태어난다면 유감이고요.”
스볘타는 나탈리야와 두런두런 떠들며 기차역을 가로질러 걸었다. 그사이 위르겐은 아이들과 함께 그들을 뒤따랐다. 아이들은 말이 없었고,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버지인 그를 꺼려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 있었어?”
아이들을 달래는 법을 전혀 모르는 위르겐은 습관대로 무뚝뚝한 얼굴과 어조로 질문했다. 그러자 옐레나는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콧등을 붉혔다.
“왜 우리를 버렸어요?”
알렉산드르가 물었다. 당황한 그는 걸음을 멈추고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애들이 그랬어요. 엄마랑 아빠가 헤어진 건 아빠가 우릴 버려서랬어요.”
“사샤, 널 버린 게 아니라….”
“거짓말!!”
한 번도 다정하지 않았던 아버지를 아이들은 믿지 않았다.
“맞아요! 아빠가 우릴 버렸잖아요!! 그래서 엄마가 운 거잖아요. 아빠 정말 나빠요! 아빠 정말 정말 정말 나빠요!!”
옐레나가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울음을 터트렸다. 위르겐은 상처받은 얼굴을 한 딸아이의 머리를 다정스레 쓸었다.
“레나, 아빠는…….”
“아빠 미워.”
그의 손을 앙칼지게 뿌리친 옐레나는 제 엄마를 부르며 달려갔다. 알렉산드르 또한 옐레나를 따라 내달렸다.
위르겐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아이들과 스볘타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응시하였다. 밝게 웃고 떠드는 이들이 등 돌린 모습을.
가슴이 아팠다.
스볘타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몹쓸 짓을 했다.
위르겐의 머리 위로 가을볕이 길게 늘어졌다. 그는 파삭파삭 떨어지는 낙엽을 맞으며 걸음을 옮겼다.
스볘타에게 매달려 안긴 아이들은 칭얼대며 그간 있었던 일들을 떠들었다. 스볘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쏟아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청량한 웃음소리가 역사에 울려 퍼졌다.
***
스볘타는 마을에 하나뿐인 카페에서 우유를 탄 따뜻한 커피와 크림이 잔뜩 얹어진 케이크를 시켰다. 입 안으로 퍼지는 고소한 단맛이 대단히 좋았다.
“그럼 앞으로도 정비공으로 일할 생각이세요?”
나탈리야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네. 자격증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래도 전 정말 놀랐어요. 외국어를 너무 유창하게 하셔서요.”
“제법 오래 살았으니까요.”
힐덴베흐크에서 살게 되는 건 한 번도 예상한 적 없는 일이었다. 힐덴베흐크 출신의 남자와 결혼하는 건 더더욱 예상치 못했다. 그 상대가 위르겐이라는 게 제일 충격적인 부분이었지만.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 먹으며 그녀는 짧은 공상에 잠겼다. 원래대로라면 다정하고 성실한 남자를 만나 평범한 가정을 꾸리며 정비공으로 살아가는 게 계획이었다. 부모님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고 평온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싶었었다.
어딘가 틀어지고 비틀렸지만 그녀는 이제 더는 시간을 돌이키고 싶지 않았다. 옐레나도, 알렉산드르도 없이 살아가는 삶이 그려지지 않았다.
“이제 전 엘킨스키로 돌아가 봐야겠어요.”
“벌써요?”
“만삭이 되기 전에는 가 봐야죠. 잘못하면 기차에서 애를 낳을지도 몰라요.”
나탈리야의 말을 들은 스볘타는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스볘타 덕분에 힐덴베흐크 구경도 재밌게 했어요. 마을이 너무 예뻐요. 콜라도 맛있었고요. 힐덴베흐크에 와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엘브라덴을 들러 봤어야 하는데…. 그쪽은 정말 화려하거든요. 밤에도 전등을 켜 놔서 야경이 근사해요.”
“멋있을 텐데 저도 아쉬워요.”
“언젠가 꼭 초대할게요. 더 잘 대접했어야 하는데…….”
나탈리야가 떠나는 것이 많이 아쉬웠다.
“이것보다 더요? 충분한 대접이었어요, 스볘타.”
“오빠를 정말 잘 부탁해요, 나타샤. 오빠가… 오빠가 표현도 박하고 성질머리도 고약하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녜요.”
“알아요, 스볘타. 정말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고마워요.”
로만이 말했던 것처럼 나탈리야는 마음이 정말 고운 여자였다. 스볘타는 고생만 하던 오빠가 좋은 여자를 만나서 다행이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로만은 좋은 남자예요. 다정하고요.”
“오빠가요?”
예전부터 쌀쌀맞고 날카로운 성격으로 유명하던 로만을 떠올리며 스볘타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여자 앞에서 유해진 로만을 그려 보자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잘해 주는걸요.”
“다행인 일이긴 하지만… 상상이 잘…….”
스볘타의 적나라한 반응에 나탈리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스볘타 또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어쩐지 웃으면서도 침울한 마음이 들었다.
며칠 뒤 나탈리야는 엘킨스키로 떠났다. 스볘타는 그녀에게 편지 한 통을 쥐여 보냈다.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잘 지낸다고, 행복하다고 줄줄이 적은 편지였다. 이혼 소식을 듣고 길길이 날뛰던 로만의 모습이 생생해서 평소보다도 편지를 공들여 적었다.
나탈리야를 배웅하고 돌아온 스볘타는 책을 펼쳐 열심히 단어를 외웠다. 그래도 학술 용어답게 괴리감이 아주 크진 않았다.
“나탈리야 세묘노브나는 잘 배웅하셨습니까?”
등 뒤에서 위르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황급히 책을 덮었다. 그가 오는 줄도 모를 만큼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시험이 코앞이었고, 급한 마음에 집중력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왔어요?”
그가 쭈뼛대며 대뜸 탐스러운 장미 꽃다발을 건넸다.
“위르겐, 지금…….”
얼결에 꽃다발을 받은 그녀는 꽃 속에 코를 파묻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선물을 주는 일은 드물지 않았지만 이렇게 면전에서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잠든 사이에 두고 가거나, 하녀에게 맡기곤 했었기에 눈앞의 위르겐이 낯설게 느껴졌다.
“…고마워요.”
가시를 발라낸 장미꽃에선 좋은 향기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