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thless Warrior RAW novel - Chapter 126
황제와 나는 다시 손을 잡게 됐다. 물론 예전과는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 오른손은 악수를 하고 있다면 뒷짐을 쥔 왼손은 단검을 들고 웃는 격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가 필요했다.
-정말 대단하군, 변경백. 아무리 자네라도 이번에는 고전할 줄 알았어. 하지만 봄이 되자 마왕 파르자와 작센을 치워버리다니.
황제에게서 다소 애석해 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의 입장에선 지나칠 정도로 커버린 내가 적들과 치고받으면서 소모되길 바랐겠지.
-그저 때가 되자 비구름이 걷혔을 뿐입니다.
단순한 행운이라 했지만 황제는 믿지 않았다.
-그대는 난세가 만들어낸 괴물이다. 피와 죽음을 마시고 무럭무럭 자라나, 마치 포탄처럼 모든 걸 파괴하고 일직선으로 나아가는구나.
황제는 이제 나를 향한 불쾌함이나 두려움을 감추지 않았다.
-때로는 자욱한 포연이 깔려야 일이 해결되기도 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폐하. 폭풍우가 제국을 덮치고 있습니다. 이 봄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지요. 우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흐음….
황제는 고민하는 듯 낮은 신음을 흘리다 입을 열었다.
-역시 바이에른 선제후를 제국파면에 처해야겠네. 이대로는 절대 안 돼.
제국의 일곱 기둥 가운데 하나인 선제후가 마왕의 위를 받았다고 한다. 용납될 리가 없었다. 잘못하면 바이에른의 선제후직을 계승 중인 비텔스바흐 가문이 멸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파면 후에 제국의 공적으로 선포해야겠지. 그 후에 바이에른을 토벌하는 게 수순이겠으나 그렇게 한다면….
황제는 고민스러워했다. 나는 그가 뭘 우려하는지 알았다. 바이에른을 치는 건 좋다. 문제는 그 뒤에 올 거대한 힘의 공백이겠지.
바이에른이 사라지면 가장 크고 두꺼운 기둥뿌리가 뽑히는 격이다. 균형을 추구하는 황제의 입장에선 선뜻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고. 지혜로운 드래곤조차 진퇴양난이로구나.
-폐하, 신이 해결해 보이겠습니다. 부디 시간을 주십시오.
-흠… 이건 초유의 사태네. 자네가 해결해 준다면 더 바랄 것 없으나 넉넉히 시간을 줄 수 없어.
-맡겨주십시오. 나흘 안에 해결해 보이겠으니 만약 실패한다면 그때는 폐하의 뜻대로 하소서.
내가 이리 말할 수 있는 건, 형언할 수 없는 암흑의 화신이 강신한 뒤 얼마 안 되어 떠났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물질계에 나온 지 모르겠으나 애초에 그런 초월적인 존재는 인과의 제약이 많기 때문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뭔가를 하자마자 돌아간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마왕이 된 바이에른 선제후인데, 분명히 강력하긴 하겠지만 해볼만 했다.
-사흘 안에 하라. 나흘도 길다.
빡빡하게 굴기는….
어쩔 수 없지.
-그리하겠습니다.
-변경백이 그렇게 말한다니 알겠어. 하지만, 실패에는 대가가 따를 걸세. 짐이 사흘이나 지체하게 했으니 말이야.
역시 황제는 나를 꼬꾸라뜨리고 싶어 하는군. 황제가 살아있는 한 결코 선제후 자리에 오르지 못할 터. 게다가 그는 발버둥치는 죽음의 암중세력을 견제하는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오래가지 못할 사이였다.
-변경백.
-네, 폐하.
-이번 일이 잘 끝나면 내 그대를 제국의 수호자로 포상하고 싶네. 황명을 내릴 테니 빈으로 와주게.
하하핫. 어이가 없어 속으로 웃음이 터졌다. 죽이겠다는 거군. 이번 일처리가 끝나자마자 칼을 뽑을 생각이구나. 그래, 좋다. 그 잘난 머리를 굴려보라. 나는 이를 박박 갈면서도 감격한 듯 대답했다.
-황제 폐하 만세!
후일 반드시, 제국의 황궁에 네 드래곤 머리를 잘라 장식하리라.
***
-틸리 장군. 군대를 서서히 물리십시오. 황제의 명령에 의해 제국 곳곳에서 군세가 뷔르츠부르크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아군이 빠져도 그곳은 여전히 혼잡할 것입니다.
내 군기와 옷만 남겨두고, 병력은 라이테르로 뺄 작정이다. 뷔르츠부르크의 아수라장에 계속 놔둘 이유는 없었다.
-신이 군을 이끌고 뮌헨으로 가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그 말에 나는 멀리 보이는 뮌헨의 성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답했다.
-여긴 이미 인세의 규격을 넘어섰습니다. 단련된 병사조차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대군이라 해도 무용할 것입니다.
쿵! 쿵! 쿵!
멀리서도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나는 그쪽을 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장군께선 제가 돌아갈 때까지 군대를 잘 관리하고 있으십시오.
-도와드릴 수 없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연락을 끊고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틸리 장군이 아무리 대단해도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쿵. 쿵. 쿵.
뮌헨의 성벽 앞에는 거대한 어둠의 마수들이 순찰을 돌 듯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것조차 20미터였고 큰 건 50미터를 넘었다.
달타냥의 고향인 글로리에 루미에르를 초토화시킨 그 어둠의 마수들이다. 군대란 걸로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사흘 전에 이곳에 도착한 상태였다. 마왕 파르자가 미리 준비한 내 편지를 받고 쓰러진 게 어제였으니 일찌감치 빠져나온 셈이다.
하지만 뮌헨에 도착해서 보니 저 어둠의 마수 때문에 몰래 들어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강행돌파하기로 결정한 뒤 사흘 전에 마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문제는 뮌헨에 있는 수녀회 지부의 마법진이 막힌 상황이라 마리는 육로로 오고 있었다. 시간상 오늘 도착할 예정이었다.
“더 머뭇거릴 순 없지.”
한 가지 아쉬운 건 인자한 어머니를 부르지 못하는 점이었다. 최근 그녀는 뇌샤텔 호에 자리 잡은 마왕 아뮨데의 잔당과 전쟁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음….”
그나저나 거슬리는 걸. 나는 여전히 뮌헨의 성벽을 보며 말했다.
“이제 나오지 그러나?”
뒤쪽에서 움찔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호오… 알아챈 건가? 놀랍군!”
돌아보니 그림자에서 사람의 모습이 솟아오른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나타났다.
“빌헬름.”
바로 발푸르기스의 계부(季父-아버지의 막내아우)인 반역자 빌헬름이었다.
“내 등장이 역시 의아하다는 얼굴이군?”
“솔직히.”
“다 자네 덕이라네.”
“음?”
빌헬름은 자신의 장발을 뒤로 쓸어 넘기며 감사를 표해왔다.
“그 편지 덕에 마왕 파르자가 화병으로 쓰러졌거든. 그 덕에 여유가 생긴 거지.”
“감시라도 받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군?”
그러고 보니 이 양반, 지난번에 봤을 때 주변을 두리번거렸었지. 마치 뭐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네. 나는 마왕 파르자와 손을 잡고 있었지만 그의 감시를 받는 신세기도 했지.”
“아무래도 그쪽도 사정이 복잡한 듯하군.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언제나 단순한 법이지. 적이냐, 아니냐. 그것뿐이다.”
“명확해서 마음에 들군. 그렇다면 확실히 대답할 수 있네. 이번 사태만큼은 본인은 그대의 가장 좋은 친구라고 할 수 있지.”
빌헬름은 자신의 친형인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언에게 복수하고, 조카인 발푸르기스를 구출하기 원한다고 했다.
“그자가 큰형님을 죽였다. 그걸로도 부족해 마왕의 위를 받고 샤르티에까지 연금했으니 더는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신 역시 마왕의 힘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반역자 빌헬름에게서도 막강한 어둠의 기운이 느껴졌다. 분명히 발버둥치는 죽음의 후원을 받고 있겠지.
“그렇네. 우리 형제는 결국 서로 다를 것 없는 존재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의도의 확실함을 알지 않나.”
“적의 적은 친구니까.”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군이 될 수 있다는 건 알겠지만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럴 바에는 위험을 안고 갈 생각은 없었다.
“역시 거절하겠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이해하네. 하지만 나와 함께한다면 큰 이득이 있을 거야. 자네는 설마 저 마수들을 쓰러뜨리고 돌파할 작정이었나?”
“그렇다. 그걸 위해 동료를 기다리는 중이고.”
그 말에 빌헬름은 어이없어 한다.
“기운 찬 젊은이인 줄 알았는데 내 생각이상으로 무모하군.”
“적어도 무모한 일은 아니다.”
마리가 와서 무한 신성력을 쏟아내면 결코 무모하지 않다. 다만 침입을 들키는 게 껄끄러워서 그렇지.
“믿는 구석이 있나 보군.”
“맞다. 그러니 불확실한 자의 조력은 사양하도록 하지.”
하지만 빌헬름은 자신과 함께하는 게 이득일 거라고 강조했다.
“이보게, 젊은 영주여. 본인에게 들키지 않고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있다네.”
정말이라면 그를 동료로 받아들일 이유도 충분했다.
“무엇이지?”
“비밀 통로가 있다. 하하하, 그런 식상하다는 표정을 짓지 말게. 이 비밀 통로는 정말 특별하니까. 바로 바이에른의 혈족 중 가장 고귀한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일세.”
선제후의 직계들만 알고 있는 비밀이라는 거다. 전대 선제후의 막내아들이었던 빌헬름은 그 비밀을 알고 있었다. 정말 혹하는 제안이었다.
사실 이대로 정면 돌파하기에는 부담감이 컸는데 잘 됐다. 게다가 그가 바이에른 선제후를 생사대적으로 여기는 건 명확한 사실이고.
“우리는 서로를 위해 일할 수 있을 것 같군.”
“좋네.”
내가 결정을 내리자 빌헬름은 기뻐했다. 그는 대단한 강자임이 확실하니 분명이 도움이 되겠지.
“그나저나 누굴 기다리고 있는 건가? 어서 출발했으면 하네만.”
“조급한 건 이해하지만 참는 보람이 있을 거다. 발푸르가 수녀회의 전직 대수녀원장이 오니까.”
“뭐? 그 폭풍과 몰살의 마르가레타가?”
“알고 있었나?”
“당연하지 않나. 젊은 영주여. 제국12궁이라 불리는 12명의 절대강자 중 하나니 모를 리가 없지.”
나야 마리를 귀엽고 의지가 되는 누나 정도로 여기고 있어 잘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위명은 대단했다. 제국12궁 중에서도 수좌를 다툴 실력이라고 하니 말 다했지.
“마르가레타라…. 이제야 자네가 정면 돌파를 하겠다고 한 것도 이해가 되는군.”
그러다 잠시 뒤 그는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기왕이면 힘을 발휘할 때 자제해 달라고 해주게. 자칫하다가는 본인까지 신성력에 쓸려나갈까 걱정이군.”
음… 사실 그건 나도 걱정이었다.
***
저녁놀이 질 무렵 마리가 도착했다. 몸집이 작아 직접 말을 탈 수 없는 그녀는 한 수녀의 뒤에 타 있었다.
“발러!”
도착하자마자 폴짝 뛰어내리는 마리.
“마리!”
평소 같았으면 껴안고 얼굴이라도 부빌 텐데 상황이 상황이라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대신 그녀의 손을 꽉 쥐고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러자 마리는 날 톡톡 두들기며 고개를 젓는다.
“감사는 됐다. 우리 작은 천사가 실종됐다고 하는데 지옥 끝이라도 못 갈 게 없다.”
“그래도 정말 고맙습니다. 마리.”
“그것보다 저기 사악한 자는 누구지?”
빌헬름을 발견한 마리의 표정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그녀는 지금 허리에 과거 자신이 잡은 드래곤의 뼈로 만든 쌍검을 차고 있었다. 지금 이 칼을 뽑으면 난리가 날 터. 나는 재빨리 그녀를 말렸다.
“발푸르기스의 계부입니다.”
“뭐라?”
그 말에 마리는 어이없다는 듯 팔짱을 꼈다.
“아니, 어째 우리 작은 천사의 집안은 콩가루구나. 숙부나 계부나 하나같이 어둠이 드글드글 물들어 서는. 쯧!”
“지금 내 모습은 중요하지 않소. 폭풍과 몰살의 마르가레타. 샤르티에를 구하기 위해 모든 걸 다할 뿐이오. 큰형님과 형수님을 잃었소. 유일하게 남은 그 아이마저 잃을 순 없소이다.”
“흥! 뭐, 좋다.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게다. 이 검에 베이기 싫으면.”
잠시 충돌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대로 빌헬름의 인도를 받아서 선제후의 비밀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터 목소리를 낮추게. 궁전의 아래로 지나갈 테니. 이곳은 선제후의 대전으로 이어지네.”
축축하고 공기가 탁한 토굴을 따라 우리 셋은 조심스레 나아갔다. 한참을 그렇게 나아간 끝에 선제후의 대전에 도착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마리가 쌍검을 뽑아들었다.
“좀스럽게 구는 건 이제 끝이다. 적진의 한가운데 도착했으니 더는 쥐새끼 같은 행동은 사절인 거다. 악은 걸리는 족족 썰어버릴 뿐.”
참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도를 지나가자 바로 대전의 커다란 문이 나왔는데 마리는 바로 걷어차서 날려버렸다.
콰앙!
작은 발로 찼는데도 높이 5미터는 될 듯한 웅장한 철문이 종잇조각처럼 구겨져서 대전 안으로 날아갔다.
쿠아아아아!
철문이 대리석 바닥을 긁으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두컴컴한 대전으로 빛이 들어가며 일대를 비췄다.
“악한 이에게 불행을 전하는 발푸르가의 수녀가 왔다!”
쌍검을 든 마리는 자신만만하게 앞장섰다. 그녀에게서 절대적인 자신감과 분노가 느껴졌다. 마왕조차 두렵지 않다 그거였다. 실제로 날고 기는 마왕조차 마리한테는 한수 접어준다. 그 무서운 불의 마왕 쟈케르조차 성격을 죽일 정도였으니까.
“아니!”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 대전 안에서 풍겨오는 기운에 일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크크크큭….”
권좌에는 바이에른 선제후가 앉아 있었다.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대전의 기둥 중 하나에 발푸르기스가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발푸르…!”
순간 소리치고 대전 안에 뛰어들려고 한 나는 말문이 절로 막히고 말았다. 아니, 입에서 소리가 제대로 질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으읏!”
바이에른 선제후를 보고 온몸이 딱 굳어 신음 같은 소리만이 흘러나왔을 뿐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형에 대한 끝없는 원한을 불태우던 빌헬름조차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크크큭. 왜 그러나? 손님을 기다리는 주인의 심경을 헤아린다면, 어서 들어오지 않고.”
“아아….”
쉽게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바이에른 선제후는 마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마왕이 아니라, 그 이상의, 비교도 할 수 없는 격상의 존재였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암흑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언이라는 정체성은 대부분 유지한 채 형언할 수 없는 암흑의 화신의 힘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말도 안 된다. 인과의 법칙에 어긋나 이건. 신격들께서 가만있지 않으실 거다!”
마리의 비난에 바이에른 선제후는 느긋하게 옥좌의 팔걸이에 두 팔을 올리고 등을 뒤에 기댔다.
“일반론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말일세. 발푸르가의 수녀여. 세상 모든 일에는 돌파구나 해결책이 있다네. 안타까운 일이네만, 자네의 자애로운 여신격께서는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 거야. 그녀뿐 아니라 정의의 신격 루우벤이라고 해도 도리가 없어 머리를 쥐어뜯고 있겠지. 크흐흐흐!”
뭔가 인과율의 틈을 파고든 법을 찾아낸 건가. 나는 애써 기운을 끌어 모아 물었다. 이 격이 높은 어둠의 존재에게는 대화조차 심력을 있는데로 집중해야했다.
“분명 형언할 수 없는 암흑의 화신은 떠났다고 했는데?”
“하하하, 사위나 다름없는 발러슈테드도 왔군. 그 정보는 그다지 틀린 게 아니야. 밖에서 보면 분명 그분의 화신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바로, 과인의 몸에 깃들어 관측되지 않았으니 말이야.”
“크윽!”
주륵.
입에서 순간 피가 터져 나왔다. 단지 대화를 하고 있을 뿐이데도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게 어둠의 대군의 화신인가. 발푸르기스를 보니 정신이 반쯤 날아간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나는 피가 베어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다. 어둠의 대군의 화신은, 이 세계의 끝판왕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과거 인류용사로 해피엔딩에 거의 도달했다고 여겼을 때, 이 형언할 수 없는 어둠의 화신에게 동료가 몰살당했다. 그리고 나는 철저히 능욕당한 끝에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고 쓰러졌다. 내겐 일종의 경계를 규정하는 자였다.
아무리 네가 노력해도 여기까지 강해질 수 없다.
아무리 인간의 어둠이 깊어도 이 힘을 당해낼 수 없다.
아무리 행복한 결말을 원해도 나를 넘을 수는 없다.
내게 있어 무수한 절망을 속삭이는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 그 최악을 눈앞에 맞닥뜨린 것이다. 절대 지금 시점에 만나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전멸….”
입 밖에 그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류블라냐를 빼들려고 해도,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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