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thless Warrior RAW novel - Chapter 171
땅밑왕은 이 제안에 크게 분노했다.
“애송이! 도무지 예의라곤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구나!”
“맘대로 생각해라. 이길 수만 있다면 그딴 거 신경 안 쓴지 오래됐으니까.”
단순히 게임을 하던 시절에도 해피엔딩에 대한 갈망 때문에 성격이 꽈배기처럼 꼬였던 나다. 그런데 모든 게 현실이란 선고가 떨어진 이후에는 어떻겠나?
적에겐 피도 눈물도 없어졌다.
“악을 써봐. 어차피 네놈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부르르.
얼마나 열 받았는지 수염이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빨리 선택하는 게 좋을 거다. 지금도 인내심이 화승줄처럼 타들어가고 있으니까.”
과연 땅밑왕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자존심 때문에 장렬히 폭사하고 혼이 이 테멘 앙 키에 갇히는 꼴을 택할까?
그건 그것대로 재밌을 거 같다. 그의 협조가 없으면 신격의 육체를 파내는 일에 수고가 더해지겠지만 못할 것도 없다.
“자, 어쩔 건가?”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크하하하하!”
그의 태도 변화에 웃음이 터졌다. 세상에 이렇게 웃긴 일은 처음이었다.
“크흐흐하하하하!”
너무 재밌어서 손바닥을 치며 웃었다. 여진이 가늘게 이어지는 갱도 안에서 내 기괴한 웃음과 건틀렛이 부딪치는 소음만이 들렸다.
역시, 권력이란.
이 정도로, 한 행성의 패자를 자처할 왕도 자존심을 꺾는구나. 그 정도로 초월자란 대단한 권력이었다.
우주의 역사, 우주의 투쟁에 참여할 기회를 얻는 것. 영원히 별의 길을 따라 흐르는 것. 비참하기 짝이 없는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
모두가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다.
“비웃으려면 맘대로 하십시오.”
“아니야. 낄낄낄. 네가 현명하다는 건 알겠다. 그 태도 변화에 비웃은 건 사실이지, 하지만 내게 덤볐다면 경멸했을 거다. 최악의 멍청이로.”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제게 보증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까.”
그는 놀랍게도 아까 얘기하기 전부터 내 본질을 알고 있었단다.
“뭐야? 이미 내가 신성에 다가가고 있는 존재인 걸 짐작하고 있었다고? 우물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건 어디에 기반하고 있는 통찰력이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흐음…, 어쩔 수 없지. 나라고 모든 힘을 파악할 순 없으니까.
“어쨌든 그런 당신이니 드래곤 신격의 육체를 빼앗으려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길잡이로 전락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나는 드래곤 따위로 변하고 싶지 않으니까.”
드래곤 신격의 육체를 얻으면 신의 품격을 갖게 되겠으나 본질이 드래곤에 가깝게 변한다. 인간의 몸과 드래곤의 몸이 융합하면 드래곤킨처럼 보일지도.
“물론 변신 주문이 있긴 하지만 오리지널은 소중한 거라고. 나는 변형을 원하지 않아. 네놈은 상관없는 건가? 드래곤처럼 변해도?”
“오히려 환영하고 싶군요. 인간에서 드래곤으로 변한다니, 전부터 동경하던 일입니다.”
감각 자체가 다르군. 나는 인간이고 싶고, 인간 기반의 신격이고 싶다. 그는 드래곤 기반의 신격이라도 괜찮다는 거군.
“나는 이미 신성에 다가가고 있기에 육체가 변형을 일으키고 있다. 신격의 위에 부합하게 진화 중이지. 그러니 새삼 죽은 몸은 필요 없다.”
“정말이십니까? 맹세할 수 있습니까?”
맹세라…. 위험하긴 한데 조건만 맞추면 못할 것도 없지. 조건만 맞으면 맹세란 더욱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주니까.
“가능하다. 맹세를 어기는 자는 이 테멘 앙 키에 영원히 귀속되는 조건으로 하지. 됐나?”
“그 정도라면….”
맹세란 무거운 것이기에 땅밑왕은 만족해한다.
“당신이 저와 협력할 뜻이 있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 대가로 요구하는 게 무엇입니까?”
“간단해. 넌 프로그래마 모르티스를 찾게 도와줘야 한다. 신격의 육체를 얻으면 막강한 힘을 얻겠지. 그 힘으로 날 도와. 그게 내 요구다.”
“프로그래마 모르티스?”
처음 듣는 것 같기에 설명해줬다. 그러자 그게 무덤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의 힘이란 사실에 크게 놀라워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어둠의 대군의 원한을 살 겁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신격의 위를 갖기 위한 모험에 어울리는 거 아닌가? 게다가 세계는 종말의 때다. 모 아니면 도라고. 지금처럼 모험을 하기 좋은 시절도 없지.”
“종말이라니?”
“이런 지하에 처박혀 있으니 아무 것도 모르겠지. 어차피 네놈은 신격을 얻지 않으면 미래는 없어. 이딴 차원은 언제 박살날지 모르니까.”
종말의 때에 관한 썰을 풀어주고 나서야 그는 결심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당신이 그 힘을 찾는 걸 돕겠습니다. 맹세의 조건을 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후 다음 조건들을 합의했다.
-갑(발러)은 을(땅밑왕)이 드래곤 신격의 ‘육체’를 갖게 돕는다.
-을은 힘을 얻은 후 갑이 프로그래마 모르티스를 찾는 걸 돕는다(그에 필요한 명령을 할 수 있다. 대신 조건에 맞지 않는 무리한 명령을 내릴 수 없으며, 명령은 총 세 개를 넘지 않는다).
-갑과 을은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
-신의와 성실로 계약을 수행하며 추가적인 사항은 협의할 수 있다.
-이 계약은 이 테만 앙 키를 탈출할 때까지 지속한다.
대강 이 정도였다. 땅밑왕은 갑, 을이란 말에 어리둥절해 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나는 프로그래마 모르티스를 갖고 나가고 싶을 뿐이야. 그 이상은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겠다. 그것만 해주면 신격의 ‘육체’는 네 것이야.”
“좋습니다.”
즉석해서 맹세와 계약이 이뤄졌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이제 할 건 해야지?”
“무슨?”
“뭘 어물쩍 넘어가려고?”
나는 아직 진흙이 묻어있는 발을 들이밀었다.
“크윽….”
땅밑왕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발끝으로 그의 정강이를 톡톡 쳤다.
“어서 꿇어. 지금까지 날 모욕한 새끼 중에 그냥 넘어간 놈이 없었다. 네놈도 자기 행성에서는 잘 나가던 놈이겠지. 하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감히 날 때리고도 그냥 지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면 곤란해.”
빨리 꿇으라고 손가락을 아래로 까딱까딱거렸다. 내가 진심이란 걸 안 그는 치욕을 억누르더니 결국 무릎을 꿇는다.
털썩.
마치 과하지욕의 한신 같은 꼴이다.
“사죄드리겠… 윽!”
막 발에 입을 대려던 그의 뒤통수를 밟아버렸다. 그리고 진흙탕 바닥에 찍어 눌러서 문질렀다.
“아까 받은 모욕은 이걸로 넘어가주지. 하지만 한 번만 더 내 성질을 건든다면 다시는 품위를 지킬 수 없게 해주마.”
“크으… 감사… 으윽!”
그는 어떻게든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발을 짓눌렀다. 패배자의 꼴은 이렇게 비참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권력을 갈구하는 거 아닌가.
***
“이쪽입니다.”
땅밑왕의 안내를 받아, 그만이 통과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갱도에 진입했다. 갱도는 아래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 밑에 드래곤 신격의 육체가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와 함께 내려가면서 누미디아의 사기꾼을 속으로 불렀다.
-수습할 방법이 있나? 내가 이걸 훔치게 도와준다고 했잖아?
-당연히 있지요. 대책 없는 사기꾼처럼 쓰레기인 것도 없어요. 후배, 신격이 뭐로 이뤄져 있는 줄 알지요?
-그래, 신체와 정수잖아.
신체(神體)는 신격의 육체다. 정수는 내부에 있는 신의 본질이자 힘이다. 하드웨어랑 소프트웨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편하다.
-흐흐, 아까 계약은 훌륭했답니다. 저 땅밑왕은 신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반밖에 얻을 수 없겠지만요. 그것도 오염된 것으로.
계약의 조항을 보면 분명히 나는 그가 드래곤 신격의 육체를 갖게 돕는다고 했다. 정수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처음부터 정수는 내가 먹어치울 셈이었다.
하드웨어인 신격의 육체는 필요 없다. 게다가 반쯤 썩어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니까.
-후배, 그런 썩은 육체를 얻으면 폭주해 버릴 수 있단 걸 알고 있지요?
-그래, 그러니까 주겠다는 거 아냐. 흐흐흐.
죽은 신격의 육체는 외부 환경에 쉽게 오염된다. 반면 안에 있는 정수는 순수성을 강하게 유지한다.
-당신이 그런 부분을 잘 알고 있으니 문제없답니다. 여기서 부터는 맡기세요.
갱도를 따라 깊게 내려간 우리는 마침내 드래곤 신격의 육체에 도착했다. 그곳은 수많은 드래곤의 뼈가 쌓여있는 무덤이었다. 그 가운데 꾸물거리는 어둠에 반쯤 집어삼켜진 드래곤 신격의 육체가 있었다.
“기괴하군….”
생전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신격이었던 것 같다. 금과 은을 녹인 것 같은 비늘로 덮인 거대한 드래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몸의 상당 부분이 괴종족처럼 기괴하게 변해 있었다.
촉수가 돋아나고 진물이 흐르며 게걸스러운 입이 주둥이를 내밀며 꿈틀거렸다. 드래곤 신격의 몸에서 마치 동충하초처럼 뻗어 나온 촉수는 주변의 지반으로 뚫고 들어가 있었다.
“저게 요동칠 때마다 땅이 흔들린 거군.”
“아마 이 장소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흐음… 이대로 두면 화신급의 괴물이 될 것 같은데.”
어쩌면 나는 지금 어둠의 대군이 탄생하는 광경을 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죽은 신격의 몸을 영양분 삼아 자라나는 어둠이라니… 그로테스크하군.
-저래 보여도 금방은 안 돼요. 저 어둠은 육체는 반 이상 집어삼켰지만 정수에는 아직 손을 대지 못하고 있어요. 위협적으로 보여도 지능이 낮고 자기가 뭘 해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저게 초월자로 재탄생하려면 수천 년은 필요하답니다.
선배의 명쾌한 해설이었다. 나는 이제 일의 진행은 그녀에게 맡겼다.
-좋아요! 시작하죠!
갑자기 갑옷이 환하게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 빛은 드래곤 신격의 육체 중 오염된 곳에 쏘아졌다. 날카로운 그 빛은 마치 절개하는 것처럼 그곳을 도려낸다.
고통을 느끼는 듯 촉수가 미친 듯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누미디아의 사기꾼은 단호했다. 빛으로 반항하는 촉수를 모조리 잘라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제 정화능력으로 오염된 신체에 구멍을 내는 거예요. 정상적인 신체라면 어림도 없겠지만요.
누미디아의 사기꾼이란 유감스러운 영혼이 깃들어 있지만, 갑옷 자체는 매우 성스러운 물건이었다. 그래서 오염으로 격이 떨어진 신체를 절개할 수 있었다.
치이이이잉!
사방으로 빛이 튀는 게 고열로 철판을 절단하는 모습 같다.
-슬슬 나올 거예요!
그녀가 외치자마자 절단면이 벌어지며 안에서 내장 같이 역겨운 게 와르르 쏟아졌다. 끈적이는 피를 사방에 뿌려진다.
철푸덕.
마치 암세포로 말기까지 간 끔찍한 장기에 기생충들이 잔뜩 붙어있는 것 같은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살덩이 한 가운데 빛나는 보석이 있었다.
-저게 정수인가!
신격의 힘의 근원인 정수는 역겨움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그 깨끗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지금 신체에 유착해 있는 어둠은 마치 태아나 마찬가지예요. 정수를 오염시킬 힘이 없었던 거예요. 다행이네요. 저 정수, 아주 깨끗해요. 역시 드래곤 신격은 생전에 선한 신격이었음이 틀림없어요.
우리가 감탄하고 있던 그 순간 갑자기 땅밑왕이 앞으로 맹렬히 튀어나갔다.
“오오오!”
정수를 노리고 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우리 둘은 태연했다.
-후배님, 저럴 줄 알았나요?
-뭐, 그렇지. 애초에 계약 사항에 정수에 관한 부분은 없으니까. 땅밑왕도 보자마자 알아챈 거 아니겠어? 저게 진짜라는 걸. 그 같이 과감한 사내라면 바로 움직여도 이상하지 않지.
하지만 주제 파악 못한 짓이다. 주제 파악 못하면 늘 패망 뿐이지.
“멈춰! 후회할 거라고!”
내 선한 만류에 그는 비웃음을 돌려줬다.
“맘대로 해보시지! 어차피 우리는 서로를 공격할 수 없다!”
“아, 그건 그렇지만….”
내가 공격한다는 게 아닌데….
퍼억!
짧고 강렬한 소리가 들리더니 땅밑왕이 촉수에 맞아 날아갔다.
“크악!”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정수를 감싸고 있던 촉수가 바로 반응한 것이다.
“저런…. 쯧쯧.”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지금 드래곤 신격의 신체와 정수를 감싸고 있는 어둠은 태아나 다름없지만 기본적인 사고는 있다. 정수가 자기에게 중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거다.
힘이 봉인된 땅밑왕의 신체능력으로는 그 촉수를 피해 정수를 빼앗기란 무리다.
“자기 능력을 알고 덤벼야지….”
신격의 힘이 눈앞에 있으니까 눈이 뒤집히는 건 알겠지만. 뭐, 과감하고 멋진 결단이긴 했다. 내 말대로 후회하게 됐지만.
“자, 그러면 주인공 나가신다.”
나는 느긋하게 앞으로 나섰다. 물론 소인배 기질이 어딜 가지 않아서 늘씬하게 뻗어있는 땅밑왕을 일부러 한 번 꾸욱 밟고 갔다. 이 정도는 공격 축에도 안 드니 괜찮겠지.
“꽥!”
비명이 재밌어서 가다 돌아와서 일부러 한 번 더 밟았다.
“꾸엑!”
결국 지켜보던 감방 선배가 혀를 찼다.
-후배도 어지간히 또라이네요. 또라이는 약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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