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thless Warrior RAW novel - Chapter 21
대수녀원장의 침실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운 우리는, 수녀회의 비밀스러운 지하 봉인지로 향했다. 마르가레타가 가장 앞서 우리를 이끌었다.
“마리. 어디로 가는 겁니까?”
상당히 깊게 밑으로 내려왔다 싶은데 아직 더 남은 것 같다.
“봉인이란 원래 깊이 있는 법이야.”
갑자기 지하로 내려오게 된 건 마르가레타의 강권이었다. 그녀가 자신과 수녀회를 도와준 것에 보답해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가보면 안다.”
이번에 발푸르가 수녀회에 와서 얻은 게 많았다. 사령계열 최상위직으로 전직하고, 제국 서남부 최강자인 마르가레타 영입 퀘스트까지 획득했다. 거기에 발푸르가 수녀회의 전폭적인 지원 약속과 발푸르기스, 안젤라의 신뢰와 호감도는 덤이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 더 바랄 게 없는 상황. 겸양을 보였지만 마르가레타는 단호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보상은 물질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뭐, 쓸만한 걸 준다면야 좋긴 하다만.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이 수녀회에 있는 물건들이 하나 같이 신성계열의 비보였기 때문. 성검이나 성갑, 성의, 성관 등 하나 같이 성, 성, 성, 성이 붙어 있는 성스러운 거란 점.
사령술에 발을 들인 내가 쓰기에는 하나 같이 애매한 것들이었다. 못 쓸 거야 없겠지만, 디버프를 받으면서 쓸 수야 없으니까. 그래서 결국 이 지하의 봉인까지 오게 된 거다. 앞서가던 마르가레타는 아픈 것도 잊었는지 쾌활하게 웃는다.
“흐하하! 본인이 생각해도 참 명안이로다. 어둠에 물든 자에겐 본회에서 오래 전에 봉인한 사이한 물건을 주면 되는 것을! 보상도 하고 쓰레기도 처리하고….”
“네?”
뭔가 흘려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을 들은 거 같은데….
“저주를 받은 이에게 저주받은 물건을 더하다니요. 이러다 제가 악에 먹히면 어쩔 겁니까?”
좀 따져보니까 앞서가던 마르가레타가 멈춰서더니 별 볼일 없는, 한껏 내밀어도 아무 소용없는 가슴을 당당하게 펴면서 말한다.
“발러 네가 그 정도 약해 빠진 녀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놈이라면 페자무트의 후장을 뚫어주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얌전히 고향으로 돌아가라. 본인이 저주를 풀 방법을 찾은 뒤 연락할 테니.”
“저기, 수녀의 입으로 후장을 뚫는다고 하지 말아주십시오.”
“괜찮다. 혼나봐야 환속 밖에 더하겠느냐. 환속하면 시집도 갈 수 있으니 나쁠 것 없구나!”
아니, 그러면 당신 수녀 인생이 끝장난다고.
“모처럼 괜찮아 보이는 사내도 만났고.”
마르가레타가 날 보더니 눈웃음을 친다. 하지만 저건 누가 봐도 장난질이었다. 눈웃음을 치면서도 힐끔힐끔 발푸르기스를 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순진한 아가씨가 낚여들었다.
“마리 자매님. 길이나 안내하시지요.”
발푸르기스는 어쩐지 목소리가 곤두서있었다. 그러자 마르가레타가 과장된 얼굴로 기가 막힌다는 시늉을 한다.
“어머나! 대수녀원장님이라고 그렇게 따르더니, 지가 맘에 든 남자한테 눈웃음 좀 쳤다고 마리 자매님이니! 세상에! 딸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더니!”
그 말에 발푸르기스는 발끈했다.
“누, 누, 누가 맘에 들었다고 했나요! 발러님은 손님이시니 무례한 일은 삼가세요! 아니, 그 전에 수녀회의 어른이란 자각을 갖고 체통을 지키시는 겁니다!”
“뭐, 우리 작은 천사가 침 발라둔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본인이 기정사실로 만들면….”
“제, 제발! 손가락으로 구멍을 만든 뒤에 검지로 찌르지 마시라고요!”
고요하고 엄숙한 지하에서 갑자기 시장바닥 같이 변했다. 지하에 모셔져 있는 성인과 천사상이 우리를 내려다보며 황당해 할 거 같았다.
마법 등불에 비춘 마르가레타와 발푸르기스의 그림자가 그림자 연극처럼 신명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발러님. 제가 안내하지요. 저 둘은 무시하세요. 원래 바보 이인조입니다.”
“…….”
제국 서남부를 지키는 태산북두와 존귀하신 바이에른의 후계자. 거물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소녀는 여기서 바보 이인조로 통하고 있었구나. 진실이란 어찌 이리 항상 영웅적 품위와는 거리가 먼 것인가.
“자, 이쪽으로.”
역시 믿을 건 안젤라 할머니뿐이야. 나는 바보 이인조를 버리고 그녀와 함께 이동했다. 5분 정도 더 내려가니 과연 누가 봐도 봉인으로 보이는 엄중한 문이 나타났다.
“여기입니다.”
안젤라가 봉인의 문 앞에 손바닥을 대자 빛이 살짝 점멸한다. 그리고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와!”
안에는 온갖 기괴한 물건들이 잔뜩 있었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사이하고 불길한 것들. 발푸르가 수녀회에서 그간 수거한 온갖 것들이 봉인지 안에 가득했다.
“별 게 다 있네요.”
내가 비범해 보이는 검 하나를 살펴보자 안젤라 대신 마르가레타가 대답해 온다.
“그 칼은 내버려 두라. 쓸모없는 물건이다. 날카로워도, 소유자를 점점 미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말다툼은 다 한 겁니까?”
“푸하! 누가 다퉜다고 그러나? 작은 천사와 나는 물과 물고기처럼 사이좋은 것을!”
과연 맞냐고 발푸르기스를 향해 눈으로 묻자 그녀는 삐친 듯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러자 마르가레타가 울컥한다.
“저, 저 못된 것! 내가 지를 어떻게 키웠는데!”
또 싸움이 벌어지려 하자 결국 안젤라가 둘을 쫓아내겠다고 하고나서야 조용해졌다.
“크흠!”
괜히 헛기침을 한 마르가레타는 주변을 돌아보며 설명한다.
“여기에는 온갖 위험한 물건이 가득하지. 발러, 네가 원한다면 모두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저주와 악의만 가득한 쓸모없는 것들이다.”
그러면서 마르가레타는 내 손목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드물게 괜찮은 물건도 있지. 어디까지나 그대가 그 물건에 담긴 어둠을 이겨내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자, 저것이다.”
마르가레타가 가리킨 건 한 벌의 아름다운 갑주였다. 검은 색으로 산화 처리한 물건으로 극히 정교한 형태였다. 수많은 철판을 조립해 착용자의 운동성을 극대화한 명품이었다. 그 검은 빛깔이 참으로 영롱한 게 단순한 철판이 아니라 밤하늘을 잘라 갑주를 만든 것 같았다.
“드워프군요.”
“알아보는구나. 역시 드워프가 아니면 이런 솜씨는 무리지.”
“이것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런 귀물이라면 필시 이름이 있을 터.”
“저주받은 태생이라고 불리더라. 마지막으로 입고 죽은 자가 알려줬지.”
“…….”
“참고로 자기가 17번째 주인이라 하더라고! 지금까지 입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고 했다. 어때? 근사하지 않나?”
어디가 근사한 건데. 하지만 마르가레타가 아무 생각 없이 내게 이 귀물을 권하지 않았을 거다. 아마 내게 안착한 어둠의 힘을 고려하면 괜찮겠다고 생각한 거겠지.
“걱정할 것 없다. 이 갑주가 아무리 대단해도 네 몸에 있는 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니까. 나쁜 힘은 나쁜 힘으로 억제하는 거다.”
현재 내 몸에 있는 죽은 화신의 저주가 너무 커서, 이 갑주에 있는 저주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좋아, 그렇다면 받아주지.
나는 손을 뻗어 아이템의 능력을 확인했다. 그리고 꽤 놀랐다. 뭐야? 이거 S등급 마법 물품이잖아! 초반부터 S등급 마법 물품을 얻다니, 이거 용사라도 이러지 않는데.
<저주받은 태생>
S등급 마법 물품.
완벽하게 구성된 이 한 벌의 갑옷은 자기보다 약한 자를 죽음에 빠뜨린다고 한다.
이 갑옷을 만든 드워프 장인은 갑주의 마법을 강화하기 위해 친구를 제단에 바쳤다고 한다. 그 뒤로 이 갑주는 저주받았다.
방어력+789
생명력+654
어둠+122
힘+32
저주 면역-‘저주받은 태생’의 힘보다 낮은 수준의 저주를 무효화한다.
그림자 폭발-사용자를 중심으로 지름 5미터의 범위 안에 강력한 충격파를 발생시킨다.
으아아, 스펙 엄청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까 원래는 건강이나 카리스마를 떨어뜨리는 효능이 있었다. 그리고 확률적으로 적에게 얻어맞는 피해를 3배로 증가시키는 저주까지 붙었다.
이러니 소유자가 죽어나자빠지곤 했던 모양. 하지만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자’다. 이따위 갑주의 저주 따위는 씨알도 안 먹히는 최상위직인 거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다. 앞으로도 그대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찾으면 알려주겠다.”
마르가레타는 내가 맘에 들어하자 잘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뭔가 저주 받은 물건을 권하는 성직자란 그림이 묘하긴 하지만, 그만큼 그녀의 성품이 합리적이란 거겠지. 앞으로 마왕을 상대하는데 좋은 동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러. 수녀원에 한동안 머물지 그러느냐? 본인이 은혜를 갚고자 손수 요리도 해주마.”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급히 가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차후에 다시 들리겠습니다.”
“그런가. 어쩔 수 없지.”
마르가레타는 이대로 보내는 게 제대로 보답을 다 못한다고 여겼는지 무척 아쉬워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제 필립을 잡으러 가야 하니까.
필립은 안전가옥에서 사흘간 머문다. 시간이 늦지 않게 가서 해치워야 했다.
***
아침해가 뜨기 전. 아직 푸르스름한 하늘이 남아있을 때 발푸르가 수녀회를 떠나게 됐다.
“이랴.”
필리는 이슬에 젖은 초지를 느긋하게 걸어간다. 녀석은 발에 적시는 촉촉함이 좋은지 흙길을 내버려두고 풀밭 위로 나아간다. 옆에선 발푸르기스가 유니콘을 타고 배웅을 나왔다.
어째서인지 침울한 기색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나도 이 귀여운 소녀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웠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정말 짧다.
4월 12일에 만나 4월 14일에 헤어진다. 불과 이틀 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너무 많은 게 우리 사이에 생겨났다.
“배웅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서 인사하면 적당하겠군요.”
발푸르기스는 수녀회에서 잠시 머물다가 바이에른으로 돌아갈 거라고 한다.
“발러, 수녀회에서 기다릴 테니 용건을 보고 오면 같이 바이에른에 가지 않겠느냐? 그대에게 보답을 하고 싶구나.”
나도 그녀와 같이 있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전쟁이 터지기 전에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았다. 발푸르기스와는 한동안 만나지 못하겠지.
“미안합니다. 저도 할 일이 있어서요.”
발푸르기스는 아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뜻을 품은 사내의 길을 막으면 안 되지. 그대가 사명을 갖고 있다는 걸 짐작한다. 부디 무운이 함께하길 바란다.”
이해해줘서 고마웠다.
“그럼, 또 다시 만나죠. 무운이 함께하시길.”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 말머리를 돌리려는데 발푸르기스가 부른다.
“잠시만!”
마상에서 그녀가 손을 뻗어 내 말고삐를 잡는다.
“잊으신 게 있습니까?”
“아니다. 하지만 발러 그대에게 솔직해져야 할 것이 있긴 하지.”
“네?”
발푸르기스가 날 속이거나 한 건 없을 텐데. 무슨 소리지? 의아해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발푸르기스가 갑자기 자기 투구의 연결 부위를 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 아니! 경!”
깜짝 놀랐다.
진짜로 깜짝 놀랐다.
발푸르기스는 투구를 벗느니 죽겠다는 여자다. 그녀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면서도 저 투구 아래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아무리 전우애를 쌓아도 보여주려고 한 적조차 없다.
그런데 지금 벗으려고 하고 있어? 단순히 날 향한 호의 때문만은 아닌 게 확실했다. 호의나 호감은 이전에 더 깊게 쌓은 적도 많았으니까.
“…왜?”
많은 게 담긴 내 물음에, 대답 대신 철컥, 하는 투구의 연결이 풀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리고.
아침해를 받는 폭포처럼, 반짝이는 금빛 머리칼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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