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dmancer of the Scorched Desert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연속적인 색의 띠가 나타난다.
스펙트럼 프리즌(spectrum prison)은 이와 같은 원리를 이용해 만들어 낸 던전이다.
프리즘으로 나뉜 빛으로 각 구획을 나누고, 각기 다른 함정을 발동시킨다.
그중에서도 가시광선인 일곱 개 빛으로 만든 감옥.
그래서 이름도 스펙트럼 프리즌, 혹은 레인보우 프리즌이라고 부른다.
각 빛은 독특한 파장과 성질, 염원을 가진다.
스펙트럼 프리즌은 이를 이용한 던전이었다.
빨주노초파남보의 각 구역은 철저히 단절되고, 현실이 아닌 빛으로 이뤄진 공간이 침입자를 맞이한다.
현상 세계를 초월한 공간. 그래서 이곳을 초상 공간이라고 불렀다.
가장 외곽의 붉은 초상 공간은 인간의 공포심과 불안감을 끊임없이 자극하며 속삭여 자멸하게 만든다.
지금 제온이 갇힌 공간이 바로 붉은 초상 공간이었다.
보이는 모든 것은 온통 붉은색의 비현실적인 풍경뿐이었다.
경계도, 구별도 없는 온통 붉은 초상 공간.
마치 무중력 상태의 붉은 우주에 혼자 덩그러니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식의 함정은 또 처음이네.”
제온이 내부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붉은 공간의 느낌은 기괴했다.
“던전을 재현한 건가? 그러려면 던전의 핵이 고스란히 유지되고, 안정적으로 마나를 공급해 줘야 할 텐데.”
이제까지 수많은 던전을 공략한 제온이었다.
그중에는 인간의 상식을 철저히 부정하는 던전도 있었다.
지금 제온이 갇힌 스펙트럼 프리즌처럼 말이다. 그래서 제온은 처음 겪는 상황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모래는?”
제온은 자신의 가장 큰 무기인 모래를 찾았다.
하지만 붉은 공간에는 모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외부와 완벽하게 단절된 것이 확실하군.”
조그만 통로나 구멍만 있었더라도 모래가 느껴졌을 것이다.
이로써 이곳이 완벽하게 유리된 공간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제온은 붉은 초상 공간을 걸었다.
마치 무중력인 것처럼 자신의 몸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균형을 조금만 잃어도 몸이 마구 헛돌았다.
아마 우주에서 유영한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속도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갑자기 화가 났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심화가 들끓어 올랐다.
걸어도 걸어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그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내가 뭐하러 이렇게 힘들게 걷지? 차라리 부숴 버리면 될 것을…….”
제온은 아공간을 열었다. 그러자 산더미처럼 쌓인 모래가 흘러나왔다.
츠으으으!
어느새 그의 발아래 모래가 바다를 이뤘다.
“샌드 블라스터!”
제온이 손을 휘두르자 수십 줄기의 모래가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그 어떤 모래 줄기도 붉은 공간에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해보자는 거지?”
제온은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손을 휘둘렀다.
슈슈슈!
샌드 블라스터가 연신 발사됐다.
이 정도로 샌드 블라스터를 쏴 댔으면 어느 정도 타격감이 느껴져야 하는데,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제서야 제온은 이상함을 느꼈다.
이렇게 화가 들끓는 자신의 상태도 이상했고, 샌드 블라스터에도 끄떡없는 이 공간도 이상했다.
제온은 그렇게 화가 들끓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그랬는지 모르지만, 팔 년 동안 세상을 떠돌면서 이성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했다.
그 후 한 번도 이성을 잃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자신이 이렇게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린다?
정상적인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후!”
제온은 한숨을 내쉬며 화를 가라앉혔다.
그러자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단순히 붉은 공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때마다 제온의 코와 입으로 붉은 기운이 흡입되고 있었다.
제온은 일단 호흡을 차단하고, 마나로 전신을 보호했다. 그러자 몸 안의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바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붉은 기운이었다.
제온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상당량 흡입한 것이다.
붉은 기운은 특히 그의 중추 쪽에 많이 모여 있었다. 붉은 기운이 중추 신경을 장악하고 자극해, 제온이 그렇게 화가 폭발했던 것이다.
제온은 정신을 집중해 이질적인 기운을 체외로 밀어냈다.
“후우!”
그제야 정신이 한결 명료해지고 자신의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붉은 기운은 생명체의 감정을 자극해 적의를 끌어낸다. 적의에 잠식되면 이성을 잃고 발악을 하다가 탈진해 쓰러지는 것이고. 신선하군! 이러니까 알아차리지 못하지.”
제온은 이 공간이 꽤나 창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제온이 이성적이기에 자신의 문제점을 알아차린 것이지,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적의에 잠식되어 폭주했을 것이다.
데미안은 처음부터 제온을 무력으로 제압할 생각이 없었다.
제온이 모래를 부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가 진심으로 움직이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식의 던전을 재현한 것이다.
제온이 스스로 폭주하다가 탈진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제온은 데미안의 생각보다 훨씬 더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살필 줄 알았다.
“이 붉은 공간은 현실과 유리된 초상 공간, 걸어서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해. 결국은 이 공간 자체를 깨부숴야 해.”
샌드 블라스터 정도로는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보다 훨씬 강력하면서 파괴적인 스킬이 필요했다.
마침 제온에겐 그런 스킬이 있었다.
쿠우우!
제온의 발아래 있던 모래들이 회전하면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를 중심으로 모래 폭풍이 일어난 것이다.
데미안은 초상 공간에 모래가 없으니 제온의 능력을 어느 정도 봉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제온이 아공간 가득 모래를 채우고 다닌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콰콰콰!
모래 폭풍은 금세 커졌다.
엄청난 양의 모래가 회전하면서 거센 바람이 일어났다.
모래 폭풍은 현실과 유리된 붉은 초상 공간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붉은 초상 공간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부서질 듯하면서도 끈질기게 버텼다.
그만큼 이 초상 공간 안이 광활하다는 의미였다.
초상 공간을 완전히 깨부수기에는 모래의 양이 부족했다.
하지만 제온에겐 부족한 모래를 보완할 힘이 있었다.
“이걸 꺼내는 것도 오랜만이네. 엑시온!”
순간 그의 전신에서 검은 기운이 발산됐다.
모공 가득 담아 뒀던 세상에서 가장 고운 모래 입자인 엑시온이었다.
엑시온은 그 자체로도 강하지만, 모래에 더해지면 위력이 배가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제온은 초상 공간에 휘몰아치는 모래 폭풍에 엑시온을 투입했다. 그러자 모래 폭풍의 위력이 더욱 강해졌다.
쿠콰콰콰!
엄청난 모래 폭풍의 위용에 초상 공간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제온은 모래 폭풍을 더욱 강하게 휘돌렸다. 그러자 곳곳에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쩌저적! 쩌적!
파열음은 심해지더니 초상 공간 곳곳에 균열이 나타났다.
균열 사이로 외부 공간이 보였다.
모래로 가득한 광활한 사막이 제온의 시야에 들어왔다.
제온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좋아!”
제온은 외부의 모래를 끌어들였다.
마치 해일이 일어난 것처럼 사막의 모래가 균열 사이로 파도처럼 밀려와 초상 공간을 가득 채웠다.
엄청난 양의 모래까지 더해지자 모래 폭풍은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덩치를 불렸다.
그 엄청난 위세 앞에 초상 공간은 갈가리 찢겨 나갔다.
쩌어엉!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제온을 에워쌌던 붉은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초상 공간 자체가 파괴되면서 흔적도 없이 흩어진 것이다.
“후!”
제온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한순간 강하게 힘을 썼더니 탈력감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내 심신을 수습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순간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다.
주위 상황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다.
팔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흘러나온 시신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개중에는 서로 죽인 것으로 보인 시신들도 있었다.
워낙 많은 부류들이 공격해 왔으니 서로를 죽여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문제는 서로를 죽인 두 사람이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소속의 각성자임이 분명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동료가 서로를 죽일 이유가 없었다.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란 거군.”
자신 역시 붉은 초상 공간에 갇혀 죽을 고생을 했다.
붉은 기운이 그의 적대심을 자극해 폭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색의 기운들 역시 인간의 다른 감정을 자극하는 힘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제온은 시신들의 상태를 살폈다.
“상처가 벌써 말라붙었어. 시간이 꽤 지났다는 의미인데? 초상 공간 안에서는 시간이 현실과 다르게 흐르는 건가?”
제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느끼기에 초상 공간 안에 있던 시간은 불과 서너 시간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만진 시신은 최소 하루 전에 죽은 것처럼 보였다.
각각의 초상 공간마다 현실과 다른 시간이 흐르는 것이 분명했다.
제온이 한숨을 내쉬며 성채를 바라봤다.
그의 짐작을 확인시켜 주듯 성채는 조금 전에 비할 수 없이 크게 파괴되어 있었다.
정말 밖에서는 하루 이상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데미안,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든 거냐?”
제온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성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여섯 개의 빛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쩌어엉!
마치 유리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허공에 균열이 나타나며 일단의 무리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부상 입고 지친 모습으로 나타난 이들은 바로 기세 좋게 성채를 향해 달려들던 엘프들이었다.
“이런 짓거리를 하다니.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인간!”
이빨을 뿌득 가는 엘프는 가시나무 공격대의 대장인 마리엘이었다.
기세 좋게 성채로 달려들던 가시나무 공격대와 엘프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스펙트럼 프리즌에 갇혔다.
그들이 갇힌 곳은 푸른색 초상 공간이었다.
하늘도 땅도, 모든 것이 푸르렀다.
마치 말로만 듣던 쿠라얀에 온 것처럼 싱그러운 느낌이 엘프들을 전율케 했다.
엘프들 대부분은 네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들이 본 것이라곤 황량한 사막과 발전한 도시의 모습뿐이었다.
푸른 초원은 당연히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푸른 초상 공간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고향 쿠라얀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떤 엘프들은 환희의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감격했다.
마리엘의 가슴도 적잖게 흔들렸다.
푸른색이 가득한 게 이렇게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지 처음 알았다.
그제야 엘프 여왕인 세리언이 쿠라얀을 그렇게 그리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엘프들은 이런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라야 했다.
그것이 그들이 지구로 넘어온 이유였다.
하지만 테라포밍의 부작용으로 지구는 황폐해졌고, 그들에겐 푸른 녹지를 경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분했다.
그렇게 모든 희생을 하고 온 것이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령왕의 크라운만 손에 넣으면 다시 엘프들의 터전을 만들 수 있어. 지저분하게 인간과 섞여 사는 게 아니라 엘프들만의 낙원을 세울 수 있을 거야.”
마리엘은 인간을 증오했다.
정확히는 엘프들을 배척하는 인간들을 증오했다.
이렇게 인간들이 세운 도시에 세입자처럼 끼어 사는 자신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인간과 함께 살기로 결정을 내린 세리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가 이인자인 일라이를 따르는 이유였다.
마리엘은 각오를 다지며 엘프들을 독려했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모두 서둘러라.”
하지만 엘프들은 그녀의 명령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푸른 공간이 그들의 마음을 홀려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푸른 초상 공간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리엘의 명령이 잔소리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제야 마리엘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제온이 붉은 공간에서 강렬한 적개심을 가진 것처럼 이 푸른 공간은 엘프들에게 안온함과 망각을 안겨 줬다.
차라리 적이나 마수와 싸우는 게 나았다.
스펙트럼 프리즌 안에서의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엘프들은 싸워야 할 이유를 망각했고, 푸른 공간이 주는 안온함에 나태해졌다.
그것이 스펙트럼 프리즌의 무서운 점이었다.
일곱 개의 빛은 각기 다른 파장을 발산하고, 이 파장은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끼친다.
정말 무서운 것은 이렇게 정신이 잠식당해도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신이 잠식된 엘프들을 깨우기 위해선 극단의 충격요법이 필요했다.
뚝뚝!
마리엘의 검을 타고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엘프들의 피였다.
푸른 초상 공간에 정신이 잠식된 엘프들을 깨우기 위해 그녀는 극단적인 수를 썼다.
바로 본보기로 수하들 몇 명을 죽인 것이다.
가시나무 공격대를 비롯한 엘프들은 모두 그녀에게 친자매, 형제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죽인다는 것은 그녀에게도 마음의 상처를 안겨 줬다. 그래도 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힘으로 푸른 초상 공간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결국 충격 요법에 정신을 차린 엘프들은 힘을 모아 스펙트럼 프리즌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마리엘이 충혈된 눈으로 성채를 바라봤다.
“간악한 인간들. 이런 더러운 수를 쓰다니.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