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dmancer of the Scorched Desert RAW novel - Chapter (199)
199화
거웬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필 이 타이밍에 제온이 이렇게 말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당신이 이곳 책임자잖습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죽이라고요.”
“나는 나이가 들어 힘이 없다.”
거웬이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제온 일행을 강철 요새에 들일 때만 해도 그는 당당했다.
그때는 뒤를 든든하게 받쳐 주는 각성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수족처럼 부리던 각성자들은 모조리 붉은 폭풍단에 당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마약에 취한 각성자들은 붉은 폭풍단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각성자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사용한 마약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왔다.
각성자들을 모조리 잃은 거웬은 뒷방 늙은이에 불과했다.
거웬이 다급히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을 찾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이는 바로 이 장로인 홀트란이었다.
“홀트란!”
“거웬!”
“자네가 그를 설득해 주게. 이 스캐빈저들을 모조리 죽여야 하네. 우리 요새 위치가 드러나면 많은 이들이 노릴 걸세. 그러면 우리는 절대 살아남지 못해.”
“자네겠지.”
“뭐?”
“자네의 권력만 살아남지 못하겠지. 그 외 사람들에게 지배자가 바뀌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어떻게 자네가 그런 말을 하는가? 강철 요새의 이 장로가 할 말이 아니잖은가?”
“그깟 장로직 따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네. 그게 뭐 대단하다고.”
홀트란이 환멸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에 다급해진 것은 거웬이었다.
“이 친구야!”
“누가 누구의 친구란 말인가? 이제까지 그렇게 견제하고 홀대해 놓고선.”
“지금은 사사로운 감정을 논할 때가 아니야. 우리 강철 요새에 사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해야 해.”
거웬은 어떻게 해서든 홀트란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홀트란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한편 데보라는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강철 요새 내부엔 두 개의 파벌이 존재한다. 지금 애원하는 자가 주도하는 폐쇄적인 세력,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세력. 폐쇄적인 세력은 우리의 습격에 궤멸된 상황, 그에 대항하는 세력은 힘이 없고…….’
그녀의 머리가 무서운 속도로 팽팽 돌아갔다.
붉은 폭풍단의 수뇌부인 우르티안과 코맥 등은 데보라를 지켜보기만 했다.
평상시 절대로 앞으로 나서지 않는 데보라였지만, 일단 나서면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데보라가 제온을 바라봤다.
‘문제는 이 남잔데…….’
자신이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좋은 의견을 내놔도 제온이 거부하면 말짱 꽝이다.
하지만 모험해 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이 남자는 지금 방관자 포지션이야. 이 이상 강철 요새에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아.’
생각을 정리한 데보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단 오늘 일은 사과할게요.”
“응?”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오늘 일은 무조건 우리 잘못이에요. 변명할 생각은 없어요.”
“서론이 기네요.”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서 그래요. 우리 붉은 폭풍단에겐 이곳이 필요해요. 그리고 이곳 사람들에겐 보호자가 필요하죠.”
“하하! 이곳을 지키던 각성자들을 모조리 죽여 놓고, 그들을 대신하겠다는 건가요?”
제온이 자신도 모르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데보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그 점은 죄송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저희에게 죽은 자들도 강철 요새 내에선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 자들 같네요. 저는 홀트란 님께 묻고 싶네요. 만일 저희가 강철 요새에 합류한다면 받아 주실 수 있나요?”
갑자기 지목받은 홀트란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영리한 여자군.’
제온은 데보라에게 감탄했다.
아이들을 전면에 세워 제온의 개입을 막고,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가 흐름을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거기다 순식간에 강철 요새 내부의 권력 싸움을 파악하는 영민함까지 갖췄다.
이방인인 제온을 대화에서 자연스럽게 배제하면서 결정권을 가진 홀트란과 판을 새로 짜려 한다.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와! 보통 여우가 아니네.”
오죽했으면 브리엘조차 입을 떡 벌리고 데보라를 바라봤을 정도였다.
엘로이가 제온에게 속삭였다.
“저 여자 뜻대로 돌아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거야?”
“안 그러면요?”
“수많은 사람이 죽었잖아. 당연히 피 값을 받아 내야지.”
“우리가 흘린 피는 아니잖아요.”
“그……런가?”
“어차피 우리는 이방인이에요. 겨우 하룻밤 자고 가는……. 결정은 그들이 내리는 거고, 그들의 삶이에요. 그들의 결정에 책임지는 것도 그들이죠.”
“보기보다 냉정하네.”
엘로이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제온을 바라봤다.
제온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데보라와 홀트란 간의 대화에 끼어들 생각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표현한 것이다.
그때였다.
우르티안이 쩔뚝이며 제온에게 다가왔다.
“모래술사!”
“제온입니다.”
“뭐?”
“제 이름은 제온입니다.”
“아, 그렇군! 제온! 내 이름은 우르티안이다.”
“우리가 살갑게 대화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렇지! 마음 같아서는 네놈의 뼈를 갈아 마시고 싶거든. 그런데 데보라가 나서서 말이야.”
“여자에게 꽉 잡혀 사는군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거든. 저 여자가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야말로 붉은 폭풍단의 진정한 주인이지. 보라고. 그녀가 나서자 아무도 싸우려 하지 않잖아.”
우르티안의 말대로였다.
엘로이에게 패한 두두얀, 레빈에게 진 코맥도 아직 싸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쪽으로 물러나 지켜보는 것은 바로 데보라가 나섰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녀는 나의 아내이자 붉은 폭풍단의 안주인이다. 우리는 모두 그녀의 결정을 존중하고 따르지. 그녀가 나서지 않았으면 너는 내 손에 죽었다.”
“반대 아닌가요?”
“내가 겨우 이 정도 상처로 죽을 것 같은가?”
우르티안이 상처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실제로 그렇게 심각하던 상처가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였다.
그의 전신에 새겨진 문신 덕분이었다.
그 모습을 본 브리엘이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수호주? 당신 하이 엘프에게 문신을 받았군요.”
“수호주를 알아본다고? 너, 하이 엘프구나.”
우르티안이 단번에 브리엘의 정체를 눈치챘다.
브리엘의 말대로 그에게 수호주라는 문신을 새겨 준 이는 하이 엘프였다. 수호주를 새길 줄 아는 하이 엘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우르티안을 비롯해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극소수도 모두 하이 엘프였다.
“하이 엘프가 왜 인간과? 혹시 너도 낙오된 것이냐?”
“뭐, 비슷해요.”
“꽤 희귀한 경우구나. 하이 엘프는 절대 동족들을 낙오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데 말이야.”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기 마련이죠.”
“호! 제법 인간 세상에 찌든 티가 나는데?”
우르티안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이 엘프는 일반적인 엘프들과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그 때문에 일반 엘프들에게도 배척을 받아 극소수에 불과했다.
평범하지 않은 엘프들에게도 이질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종족들.
대신 그들은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우르티안에게 수호주라는 문신을 새겨 준 하이 엘프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그는 특이하게 문신에 심취해 연구했다.
원래 엘프는 순수함을 제일 덕목으로 생각했다.
부모에게 이어받은 육신을 죽을 때까지 순수하게 유지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 하이 엘프들에게 문신은 절대 금기였다. 그런데 그는 금기를 어기고 문신을 연구한 것이다.
그는 문신을 이용해 힘을 증폭시키거나, 마법을 발휘하는 방법을 만들어 냈다.
우르티안이 새긴 문신은 그의 집념이 만들어 낸 초기 역작이었다.
당시 우르티안은 엘프 무리에게서 낙오된 상태였고, 세상에 대한 분노로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다.
우르티안은 스스로를 보호해 줄 힘이 필요했고, 하이 엘프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증명해 줄 시험체가 필요했다.
두 엘프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덕분에 우르티안은 수호주를 새길 수 있었다.
“어린 하이 엘프여. 동족은 어찌하고 이자와 어울려 다니는 거냐? 하이 엘프의 덕목을 망각한 거냐?”
“그걸 타락한 엘프에게 말해 줄 이유가 있을까요?”
“왜 내가 타락했다고 생각하지? 인간들과 어울려서? 아니면 인간 여자를 아내로 둬서? 아니면 약탈을 해서?”
“…….”
“어느 날 낯선 세상으로 끌려왔고, 동족들에게 버려졌다. 나는 다른 엘프와 달리 너무 이질적이어서 같이 가지 못하겠단다. 그렇게 사막에 남겨졌고, 경험이 부족해서 인간 무리에 포획됐다. 마나 구속구를 찬 채 온갖 몹쓸 짓을 다 당해 봤다. 심지어 같은 남자에게 몸도 빼앗겨 봤지.”
엘프는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을 패시브로 장착한 종족이다.
세상에는 같은 남자에게 성욕을 느끼는 존재들도 있었고, 그런 이들은 엘프 남자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기존의 가치관과 도덕심 따윈 모두 버려야 한다는 것을. 나는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날 순수했던 엘프는 악귀로 다시 태어났다.
자신을 포획한 스캐빈저들을 죽이고, 오히려 그 무리를 장악했다. 그렇게 붉은 폭풍단은 탄생했다.
붉은 폭풍단의 시작은 미약했다.
구성원도 그렇게 많지 않았고, 무력도 변변찮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세력은 크게 불었고, 그에 딸린 가족들도 늘어났다.
우르티안도 데보라를 만났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자식을 얻었다.
그렇게 가족이 생겼지만, 우르티안과 붉은 폭풍단의 생존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모래로 뒤덮인 이 세상에 그들이 정착할 만한 땅은 존재하지 않았다. 별수 없이 약탈로 생계를 이어 가야 했다.
살기 위해 빼앗고, 죽이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제온에게 처참하게 패한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브리엘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우르티안을 보면서도 겁먹지 않았다.
“계속 그렇게 살다가는 당신보다 강한 이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거예요.”
“흐흐! 쉽게 빼앗기진 않을 거다. 이쪽도 만만치 않게 강하니까.”
“흥! 그래서 제온에게 처참하게 당했나 봐요.”
브리엘의 이죽거림에 우르티안의 표정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그건 그의 능력이 사기이기 때문이지, 내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모래술사라니? 나는 쿠라얀에서도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정말 쿠라얀에 모래술사가 존재하지 않았나요?”
“내가 알기론 없었다.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 당황하진 않았을 것이다.”
우르티안은 솔직히 대답했다.
브리엘이 나선 시점부터 제온은 더 이상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어쩌면 더 이상 위협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커헉!”
갑자기 거웬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의 가슴엔 단검이 꽂혀 있었다.
“끄으으! 나, 나를……. 홀트란, 네가 어떻게?”
거웬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홀트란을 바라봤다.
그의 가슴에 단검을 찌른 이는 바로 홀트란이었다.
홀트란이 거웬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자네만 없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네.”
“홀……트란.”
“강철 요새는 이제 달라질 걸세. 붉은 폭풍단과 내가 그렇게 만들 걸세.”
“외……세와 손을 잡다니. 후회하게 될…….”
거웬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홀트란은 찹찹한 시선으로 거웬의 시신을 바라봤다.
그에게 데보라가 말했다.
“잘했어요.”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네.”
“내 아이들의 목숨을 걸고 맹세해요. 이젠 이곳이 우리의 터전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붉은 폭풍단은 요새 안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키겠어요.”
“믿겠소!”
결국 홀트란은 붉은 폭풍단과 합치는 것을 택했다.
거웬을 따르던 각성자들은 대부분 붉은 폭풍단에게 죽었고, 일반인들에게서도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하지만 생존자들이 더 많았다.
그들을 지키려면 붉은 폭풍단의 힘이 필요했다.
사태는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봉합됐다.
데보라가 제온에게 다가와 말했다.
“보다시피 강철 요새와 붉은 폭풍단은 힘을 합치기로 했어요.”
“대단하네요. 홀트란과 합의를 이끌어 내다니.”
“혹시 반대하나요?”
“나는 이방인이에요. 반대할 명분이 없죠. 그래서 당신도 홀트란 님과 직접 합의한 거 아닌가요?”
“제온 님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쉽게 합치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감사해요.”
제온이라는 강력한 존재가 부담스럽기에 데보라와 홀트란 모두 조금씩 양보했고, 덕분에 수월하게 합의할 수 있었다.
제온이라는 생태계 파괴종에서 살아남기 위한 연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