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dmancer of the Scorched Desert RAW novel - Chapter (26)
26화
전에 만난 엘프처럼 완전히 뾰족하지는 않았다. 인간과 엘프의 중간 정도 크기라고나 할까?
제온은 그제야 데이오든이 말하는 ‘잡종’의 의미를 깨달았다.
저 소녀는 인간과 엘프의 혼혈이 분명했다.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라니.’
데이오든의 엘프를 향한 무한한 적개심은 차치하고서라도, 인간을 향한 엘프들의 감정도 그리 좋지 않았다.
최소한 제온이 경험한 엘프들은 그랬다. 그런 엘프가 인간과 만나 가정을 이뤘다고 하니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중년 남자의 뒤에 숨어서 제온과 데이오든을 훔쳐보고 있었다.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그 안엔 호기심도 깃들어 있었다.
그때 중년 남자의 시선이 제온을 향했다.
“못 보던 아이군요. 제자입니까?”
“제자? 저 모지리가? 큿!”
데이오든이 비웃음을 터트렸다.
제온의 얼굴이 구겨졌지만,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데이오든에 비하면 자신이 모지리인 것이 맞기 때문이다.
중년 남자가 제온에게 말했다.
“내 이름은 고두원이다. 네 이름은?”
“제온입니다.”
“혹시 한국계인가?”
“부모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미안하군. 네 상처를 헤집을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같은 한국계 같아서 반가워 그랬다.”
“괜찮습니다.”
네오 서울의 빈민가에서도 출신을 따지는 이들이 꽤 많았다.
옛 서울에는 꽤 많은 외국인이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면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외국인들은 네오 서울에 눌러앉았다.
그들은 악착같이 살아남았고, 한국인이나 다른 외국인들과 결혼해 자식을 낳았다.
그렇게 수많은 인종이 용광로처럼 뒤섞이면서 순수 한국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데이오든이 고두원을 비웃었다.
“병신같이 아직도 한국계니, 외국계니 따지고 있나? 정작 제 자식이 엘프와의 혼혈 잡종이면서.”
“당신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군요. 여전히 거칠고, 무례하고…….”
“사람이 쉽게 바뀌면 뒈질 때가 머지않았다는 거다.”
데이오든의 대답에 고두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년 만에 보는 데이오든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타인의 감정 따윈 상관하지 않고, 비수처럼 쏟아 내는 독설까지도 말이다.
데이오든이 왜 이종족을 그리 증오하는지 고두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분노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려 백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당시 사건을 겪었던 이들 중 살아 있는 이는 데이오든을 비롯해 몇 명 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당시의 기억을 다 조용히 가슴에 묻고 사는데, 데이오든만 이리 분노를 머금고 살고 있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고두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긴 왜 오신 겁니까? 혹시 폭탄벌을 처리해 주려고 온 겁니까?”
“내가 왜 폭탄벌을 처리해야 하지?”
“아니란 말입니까?”
“아직도 허황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어리석군!”
“허황된 꿈이 아닙니다. 폭탄벌만 처리하면 이 숲을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정말 모르겠습니까?”
“내가 아는 건 단 하나야. 이미 죽은 나무는 어떤 수를 써도 되살릴 수 없다는 거지.”
데이오든이 손으로 나무를 두들겼다.
텅텅!
탄화된 나무에선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완전히 탄화되었어. 그런데도 되살릴 수 있다고? 그년이 그렇게 속삭이던가? 더러운 엘프 년의 말을 믿는다고? 차라리 입에 칼을 물고 자살하는 게 낫지.”
데이오든의 독설에 고두원이 입술만 질근 깨물었다.
엘프와 이종족들을 향한 데이오든의 분노는 너무 커서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도와주실 것도 아니면서 이곳에 왜 온 겁니까?”
“그냥 지나가다 들렀을 뿐이다. 검은 숲 외곽은 그늘져서 잠시 쉬어 갈 만하거든.”
“부디 오래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저희 일족은 모두 당신을 두려워하거든요.”
“내가 그깟 것들을 신경 쓸 것 같으냐?”
“그렇겠지요. 당신은 데이오든이니까요. 학살자 데이오든. 제가 잠시 그 사실을 잊었군요.”
“이제라도 알았으면 내 눈앞에서 꺼져라. 잡종의 목을 날리기 전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한번 해 볼까?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하지만 이쯤에서 물러가지요. 부디 먼 길 잘 가시길.”
고두원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데이오든은 한다면 반드시 하는 인간이었다.
그의 광증은 백 년 동안 덩치를 불려서 이제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고두원은 딸아이의 손을 잡았다.
순간 그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제온이 놀라 중얼거렸다.
“각성자구나”
“그래도 일족을 이끄는 놈이다. 각성하지 못했으면, 이제까지 일족을 건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들판[野]에 사는 고(高)씨 성을 가진 일족이라서 고야 일족이라 불린다.
그것도 고두원의 아내였던 엘프가 지은 이름이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잠시 후 떠날 테니 준비나 하거라.”
“네!”
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야 일족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이쯤에서 관심을 접기로 했다.
먼 길을 떠나려면 식사부터 해야 했기 때문이다.
제온은 육포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최대한 천천히 육포를 씹어 목으로 넘겼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입안이 텁텁했다. 그래도 제온은 쉬지 않고 육포를 씹었다.
육포 두 조각을 먹어 치우고, 물까지 마셨다.
제온은 미련 없이 손을 탁탁 털고 일어섰다.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데이오든은 바닥에 꽂아 두었던 크레이온을 집어 들었다.
두 사람이 미련 없이 검은 숲을 떠날 때였다.
우우웅!
갑자기 검은 숲 안쪽에서 강렬한 소음이 흘러나왔다.
폭탄벌의 날갯짓 소리였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닌 수백, 수천 마리가 한꺼번에 날갯짓하는 소리였다.
데이오든이 중얼거렸다.
“무언가 폭탄벌들을 흥분시켰나 보군.”
폭탄벌은 마수였다.
그것도 자기 영역에 대한 집착이 강한 마수.
놈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다른 생명체가 들어오는 꼴을 절대 좌시하지 않는다.
무언가 폭탄벌의 영역에 함부로 들어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데이오든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어차피 이곳은 잠시 쉬어 가는 곳.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가자!”
데이오든이 냉정하게 뒤돌아섰다.
제온이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하르! 하르!”
고두원이 누군가를 간절히 부르며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그의 뒤로 일족으로 보이는 몇 명의 남자가 함께했다.
두 사람 앞에 도착한 고두원이 데이오든에게 물었다.
“제 딸 하르 보지 못했습니까?”
“네 딸의 행방을 왜 나에게 물어보지?”
“벙커 앞에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때 고두원의 일족이 손으로 검은 숲을 가리켰다.
“저기?”
“폭탄벌이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에 고두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일대의 마수는 모두 고두원이 사냥했다.
주기적으로 마수들을 사냥해 일족을 보호한 것이다.
당연히 폭탄벌을 자극할 만한 마수가 존재할 리 없었다.
“설마 하르가 검은 숲에 들어간 건가?”
“어서 구해야 합니다.”
“하르가 위험합니다.”
일족들의 얼굴에 다급한 빛이 떠올랐다.
폭탄벌이 서식하는 검은 숲은 지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 중 하나였다.
폭탄벌은 개미와 같은 군집 생명체였다.
침입자를 격퇴하기 위해선 서슴없이 자폭을 택했다.
제아무리 강한 마수도 검은 숲에선 생존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위험한 숲에 딸이 홀로 들어갔다.
어떻게 구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고두원이 데이오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제 딸을 구해 주십시오. 어떤 대가라도 치를 테니…….”
“흐흐! 그깟 잡종을 내가 뭐하러 구한단 말인가?”
“맹약하지 않았습니까?”
“맹약?”
데이오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신은 제 아버지에게 목숨의 빚을 졌습니다. 그 대가로 하르가 스무 살 때까지 무사히 클 수 있도록 지켜보겠다 했습니다.”
고두원의 목에 핏대가 섰다.
그의 두 눈에 핏발이 가득했다.
고두원은 목숨을 걸고 부탁하고 있었다. 데이오든밖에는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데이오든은 오래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었다. 그런 그를 구해 준 이가 바로 고두원의 아비였다.
그때는 고두원이 이미 엘프와 결혼을 한 후였다.
이종족에 대한 분노가 누구보다 큰 데이오든이었지만, 차마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의 며느리와 손녀를 죽일 수는 없었다.
다른 방식으로 은혜를 갚겠다는 데이오든에게 고두원의 아비는 그저 하르가 스무 살 때까지만 내버려 두면 만족한다고 말했다.
데이오든은 그렇게 하겠다고 맹약했다.
“하르는 이제 겨우 열두 살입니다. 당신의 맹약이 끝나려면 아직 팔 년이나 남았습니다.”
“나는 지켜보겠다고 했지, 보호해 주겠다는 말은 한 적 없다.”
“하르가 살아남아야 지켜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까득!
데이오든이 이를 악물었다.
맹약의 모순이었다.
‘여우 같은 늙은이에게 당했군.’
이제야 고두원의 아비가 왜 그런 맹세를 하게 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이런 상황을 대비한 것이 분명했다.
고두원이 말했다.
“하르가 살아남지 못하면 지켜볼 수도 없습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억지 부리지 마라. 그런다고 내가 네 억지를 들어줄 것 같으냐?”
“제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부디 제 딸을 구해 주십시오. 그 아이는 저희 일족, 더 나아가 이 근방에서 근근이 목숨을 이어 가는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고두원의 목소리엔 절절한 부정이 담겨 있었다.
데이오든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고두원을 바라봤다.
고두원의 말은 억지에 가까웠지만, 데이오든이 갈등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데이오든은 평생 제멋대로 살아온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같은 인간을 상대로 거짓을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그때 그를 구원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제온이었다.
오랫동안 데이오든과 함께 다녔기에 그의 복잡한 심정을 눈치챘다.
데이오든이 정말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면 아예 고두원을 베어 버리고 이 자리를 떴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저렇게 뭉그적거린다는 것 자체가 그가 갈등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데이오든이 제온을 바라봤다.
“네가 왜?”
“마침 검은 숲 내부가 궁금해졌거든요.”
“흐음!”
데이오든이 미간을 찌푸렸다.
폭탄벌이 무서운 것은 그들이 군집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벌이 자폭 공격하기에 일반적인 각성자들은 결코 그들을 상대할 수 없다.
고두원이 그렇게 검은 숲에 욕심내면서도 탈환 못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엘프처럼 활과 화살을 이용해 사냥한다.
커다란 마수를 사냥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폭탄벌같이 엄청난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군집 마수에겐 역부족이다.
그것이 고두원이 데이오든에게 그토록 사정한 이유였다.
반면 제온은 군집 마수들을 상대로 최고의 상성을 가지고 있었다.
모래를 무기로 다루는 그에게 수적인 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데이오든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신 있는 모양이구나.”
“마침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네 스스로 가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그때까지 안 나오면 가셔도 됩니다.”
“흥!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하려 했다. 명심해라. 내일 아침까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제온이 검은 숲 안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나도 같이 가겠다.”
고두원이 따라붙었다.
제온이 슬쩍 그를 바라봤다.
“괜찮겠습니까?”
“내 딸의 생사가 걸린 문제다. 아비 된 도리로서 어찌 보고만 있을까?”
“알겠습니다.”
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비가 딸을 구하겠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일족은 감히 따라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고두원과 달리 각성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두원이 제온의 곁에 바싹 붙어 걸으며 말했다.
“고맙다. 흔쾌히 나서 줘서.”
“별거 아닙니다.”
“남을 위해 나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이 은혜 잊지 않겠다.”
고두원의 말에 제온이 슬쩍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나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D급으로 오르면서 스킬을 깨달았다.
스킬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과 싸워 보는 것이다.
폭탄벌은 최적의 상대였다.
그 때문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선 것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검은 숲에 들어가는 게 아니다 보니 쑥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위잉!
전방에서 맹렬한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고두원의 안색이 싹 변했다.
폭탄벌이 날아오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는 들고 있던 활에 화살을 걸었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제온이 움직였다.
촤하학!
전방에 모래가 솟구쳐 올랐다.
이어 ‘펑’ 하는 폭음이 울려 퍼졌다.
맹렬히 돌진하던 폭탄벌이 모래 벽에 부딪혀 폭발한 것이다.
고두원이 놀라 입을 떡 벌렸다.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