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dmancer of the Scorched Desert RAW novel - Chapter (284)
284화
비록 쿠라얀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제온이었지만, 세계수라는 단어는 엘프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쿠라얀이라는 세계를 떠받치는 거대한 나무.
모든 생명의 모태가 되고, 엘프들이 어머니라 부르던 존재. 그러나 쿠라얀의 멸망과 함께 세계수도 완전히 사라졌다고 들었다.
“이게 정말 세계수의 씨앗이라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삐이!
“힘을 소실해서 그래? 다시 되살릴 수 있다고? 어떻게?”
―삐이이!
“네가 품어야 해?”
새끼 고래가 세계수의 씨앗을 입에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새끼 고래의 초조함이 느껴졌다.
씨앗의 주인인 제온이 허락해 주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제온이 피식 웃으며 새끼 고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해.”
―삐이이!
“그럼 진짜지. 어서 품어.”
―삐이이!
새끼 고래가 제온의 몸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좋아했다.
클레어는 왜 새끼 고래가 제온 주위를 나는지 알지 못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제온과 새끼 고래의 대화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새끼 고래가 입에 물고 있던 세계수의 씨앗을 꿀꺽 삼켰다.
화하학!
세계수의 씨앗을 삼킨 새끼 고래의 전신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고 새끼 고래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외형적으로는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크기도 그대로였고, 유순한 눈빛도 똑같았다.
다만 느껴지는 마나의 밀도가 달랐다.
조금 전에는 솜사탕처럼 가벼웠다면, 지금은 강철을 압축시켜 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새끼 고래가 한결 힘찬 몸짓으로 제온의 주위를 유영했다.
―삐이이!
“개화하려면 시간이 걸려? 얼마나?”
―삐이!
“너도 모르는구나. 괜찮아!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상관없어.”
제온의 말에 새끼 고래가 안심했다는 듯이 신나게 지느러미를 움직였다.
그 모습을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던 제온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가이아!”
―삐?
“네 이름 말이야. 가이아라고 부를게. 어때?”
새끼 고래가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새끼 고래의 이름은 가이아로 정해졌다.
한동안 제온의 손길을 즐기던 가이아가 다시 울음소리를 냈다.
―삐!
“쉬고 싶다고? 어디, 내 아공간에서?”
―삐이!
“거기서 살 수 있어?”
―삐!
나직한 울음소리와 함께 갑자기 가이아가 사라졌다.
“맙소사!”
제온이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봤다.
가이아가 세계수의 씨앗을 꺼낸 후 바로 아공간을 닫았다. 그러니까 계속 닫혀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가이아가 닫힌 아공간 속으로 마음대로 들어간 것이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공간의 주체가 변하고 있었다.
본래 그의 아공간은 초열의 건틀렛에 인챈트 되어 있었다. 때문에 초열의 건틀렛이 없으면 열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아공간의 주체가 초열의 건틀렛에서 제온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몰랐지만, 이제 제온은 초열의 건틀렛 없이도 아공간을 열 수 있게 됐다.
온전한 아공간의 주인이 된 것이다.
크기 또한 믿을 수 없이 확장됐다.
케일리가 손봐주면서 열 배 이상 확장되었던 아공간이 다시 열 배 이상 확장된 것이다.
가이아의 어미인 모비딕 몇 마리가 동시에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의 크기였다.
아무래도 가이아가 무슨 마법을 부린 것 같았다.
제온이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미쳤군!”
이젠 어지간한 일엔 놀라지 않는다고 자부했는데, 모비딕과 가이아를 만나고부터는 놀람의 연속이었다.
제온은 더 이상 이 상황을 이해하길 포기했다.
지금도 아공간에서 가이아가 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거면 됐다.
제온이 몸을 돌려 파빌사와 케일리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멀쩡하게 회복한 아르켈론을 만지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르켈론은 언제 죽어 갔었냐는 듯이 건재한 모습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켈론을 살리기 위한 여정이었다.
아무리 제온이 도와줘도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아르켈론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을 보니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제온의 시선이 클레어를 향했다.
클레어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이제 와 도망갈 수도 없었고, 자신이 한 일을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없었다.
이정호라는 보호자를 잃은 이상 그녀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근처에 테이밍 할 수 있는 마수라도 있었다면 조금 위안이라도 될 텐데, 제온에게 모조리 전멸했다.
클레어는 벌벌 떨면서 제온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미, 미안해요. 하지만 나도 그들이 시켜서 한 거라 어쩔 수 없었어요.”
“왜 그들 말을 듣는 겁니까?”
“안 들으면 네오 서울에서 어떻게 살라구요? 네오 서울에서 살고 싶다면 그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어요.”
“여왕 귀신 잠자리를 강제로 탈피시켜 날개를 가져간 것도 그쪽이죠?”
“그걸 어떻게?”
클레어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도 진금호가 시킨 겁니까?”
“맞아요.”
“뭐에 쓰려고 여왕 귀신 잠자리의 날개를 가져간 거죠? 모비딕의 심장은 또 어디에 쓰려구요?”
“나도 몰라요. 다만 천벌이라는…….”
퍼억!
‘천벌’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순간 클레어의 머리가 마치 총맞은 것처럼 뒤로 젖혀졌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클레어의 눈과 귀, 입과 코에서 끈적한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클레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온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제온이 굳은 표정으로 클레어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도 모르게 저주 같은 걸 걸어 둔 건가?”
정확히 어떤 메커니즘으로 클레어의 머릿속에서 폭발이 일어난 건지는 제온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천벌’이라는 단어를 말한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천벌이 일종의 시동어임을 알 수 있었다.
“천벌이라…….”
제온이 고개를 살짝 저어 상념을 날렸다.
어차피 단어만 가지고 알 수 있는 진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온이 주위를 둘러봤다.
모비딕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아르켈론은 한층 더 진화했다.
원래 B급 마수였는데, 지금은 A급이 된 것이다.
A급 마수가 된 아르켈론의 위용은 엄청났다.
특히 등껍질과 이마에 난 뿔 때문에 더 무섭게 보였다.
아르켈론 주위에 모비딕을 노리고 몰려왔던 마수들의 사체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레이 오우거, 크림슨 드레이크, 그리고 자이언트 스파이더의 사체도 보였다. 하지만 제온이 신경 쓰는 것은 마수의 사체가 아니었다.
마수의 사체를 향해 은밀히 접근하는 검은 그림자.
꾸물거리면서 기어가는 것이 꼭 거머리 같기도 했다.
딴에는 제온의 눈을 피하겠다고 몸을 바싹 낮춘 채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제온의 감각을 속일 수는 없었다.
“역시 살아남아 있었군.”
제온이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걸어갔다.
그레이 오우거의 사체와 몰래 접촉하려던 검은 그림자가 깜짝 놀라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검은 그림자가 물결치듯 흔들리면서 사람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판트시!”
놀란 표정을 짓는 얼굴은 판트시의 것이었다.
제온의 샌드 게헤나에 소멸 직전 판트시는 검은 말미잘의 핵과 융합을 시도했다.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의지였다.
그의 시도는 뜻밖의 결과를 불러왔다.
바로 검은 말미잘 베시와 융합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폭발에서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베시는 모든 힘을 잃었고, 겨우 핵만 남았다.
이대로라면 다른 마수의 먹이가 될 뿐이었다.
그 때문에 판트시는 모험을 해야 했다.
바로 제온이 몰살시킨 A급 마수들의 사체를 흡수하는 것이었다.
A급 마수 세 마리를 몰래 흡수하면 예전보다 더 대단한 위용을 가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은밀했던 시도는 바로 제온에게 들통나고 말았다.
판트시가 다급히 말했다.
“자, 잠깐 살려다오. 살려만 주면 충성을 다할 테니까.”
“마수의 충성이 필요할 만큼 궁하지 않아서요.”
“이익!”
화르륵!
판트시가 발작하려는 순간 새하얀 불꽃이 제온 앞에 피어올랐다.
초열의 건틀렛으로 만들어 낸 불꽃이었다.
너무 건조해 오히려 차갑게 느껴지는 새하얀 불꽃을 본 판트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러지 마. 나도 살고 싶어서 그런…….”
“그랬으면 조용히 숨어 있었어야죠.”
제온이 차갑게 대꾸하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새하얀 불꽃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여 판트시에게 옮겨붙었다.
겨우 손바닥만 한 크기의 불꽃은 판트시의 육체에 옮겨붙은 순간 순식간에 수백 배나 확대됐다.
“크아악!”
판트시의 처절한 비명이 불꽃 속에서 울려 퍼졌다.
바닥을 뒹굴며 몸에 붙은 불을 끄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제온이 만들어 낸 불꽃은 일반적인 화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헬 파이어!”
새하얀 불꽃에 초열의 건틀렛에 담긴 권능을 모조리 집약시켰다.
그야말로 지옥의 화염이었다.
판트시는 베시와 융합했기에 생명력도 강해졌다.
그것이 그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헬파이어에 당한 즉시 목숨을 잃었겠지만, 베시 때문에 작열하는 불꽃을 오래도록 느껴야 했다.
그의 고통은 육체가 완전히 소멸한 후에야 끝났다.
판트시가 잿가루 하나 남기지 못하고 완벽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제온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솔직히 판트시를 죽이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죽일 수 있을 만큼 미약했기에 살려 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런 자를 그냥 놔두면 반드시 후환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죽일 수 있을 때 확실히 죽이는 것이 정신 건강에도 좋았다.
제온은 마지막으로 마수들의 사체를 뒤적였다.
다른 마수들에게서 나온 마정석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겠지만, A급이나 B급 마수에게서 나온 마정석은 달랐다.
그레이 오우거나 크림슨 드레이크, 자이언트 스파이더 모두 흔하게 볼 수 있는 마수가 아니었다.
놈들에게서 나온 마정석도 그만큼 특별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셋 다 큼지막한 마정석을 품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온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크림슨 드레이크의 마정석이었다.
초열의 건틀렛에 박은 레드 드래곤의 눈과 같은 화염 계열 마수.
물론 드래곤에 비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같은 계열의 마수였다.
그 때문인지 크림슨 드레이크에게서 나온 마정석도 짙은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화염 속성을 품고 있군.”
이렇게 속성을 품은 마정석은 꽤 귀한 편이었다.
A급 마수의 마정석은 더더욱 귀했다.
만일 네오 서울에 판다면 굉장히 거액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나중에 상황 봐서 처리하자.”
그때였다.
아공간 안에 들어갔던 가이아가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나왔다.
―삐이!
가이아는 제온의 손에 들린 마정석을 빤히 바라봤다.
그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왜, 먹고 싶으냐?”
―삐!
가이아가 그렇다는 듯이 울음을 터트렸다.
어미에게 네 가지 속성령을 물려받은 가이아였다.
가이아에게 마수의 속성이 담긴 마정석은 굉장히 귀한 식량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제온은 거리낌 없이 가이아에게 크림슨 드레이크의 마정석을 던졌다.
가이아는 강아지처럼 마정석을 덥석 물고는 좋아서 아공간으로 돌아갔다.
졸지에 귀한 마정석을 빼앗겼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나머지 마수의 마정석과 그레이 오우거의 몽둥이까지 모두 챙긴 제온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귀환할 시간이었다.
마침 좋은 탈것이 눈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제온은 바로 아르켈론에 올라탔다.
“출발하죠.”
“어디로 보내 줄까?”
“네오 서울요.”
“최고로 안전하게 모시죠, 손님!”
파빌사가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