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dmancer of the Scorched Desert RAW novel - Chapter (317)
317화
세리언과 함께한 세월이 백 년이 넘었다.
당연히 두 엘프 사이에 비밀 따윈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외도 있었다.
바로 징벌자들이었다.
세리언과 달리 일라이는 그들의 얼굴이나 이름을 모른다.
징벌자들이 철저하게 정체를 숨겼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북 구역의 이인자인 일라이에게조차 자신들의 본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들의 실체를 아는 이는 오직 세리언뿐이었다.
그 사실에 일라이는 열등감을 느꼈다.
명색이 북 구역의 이인자인데, 최강 전력을 부릴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자괴감을 안겨 준 것이다.
언젠가 일라이가 세리언에게 징벌자들의 신상 명세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북 구역의 이인자이니만큼 비상시 그들을 부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그러나 세리언은 그녀의 청을 거부했다.
“그들은 스스로 인정한 자가 아니면 절대 정체를 밝히지 않고, 따르지도 않아요.”
세리언은 일라이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배려해 조심스럽게 대답했지만, 오히려 일라이는 비참함을 느꼈다.
세리언의 말은 곧 징벌자들이 일라이를 여왕이 아니라서 인정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때부터였을지 모른다.
일라이가 본격적으로 북 구역의 여왕 자리를 노리기 시작한 것이.
일라이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징벌자까지 동원했단 말이지? 정말 나와 끝을 보겠다는 건가? 세리언!”
그녀가 분노를 불태우며 나일리아의 활을 든 엘프를 바라봤다.
마침 결계를 부순 엘프 역시 고개를 들어 세리언을 보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가면 때문에 표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건방진!”
핑!
그 순간 가면을 쓴 남자 엘프가 그녀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쾅!
폭음과 함께 화살이 일라이의 코앞에서 터져 나갔다.
일라이의 앞에 투명한 거미줄이 그물처럼 쳐져 있었다.
그녀의 스킬 중 하나인 거미줄 방패였다.
투명한 은사를 소환해 거미줄 모양의 방패를 만들어 둬 스스로를 보호하는 스킬.
투명한 은사는 마나를 흡수해 흩어 버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어지간한 공격 따위엔 충격을 받지 않는다.
그런 거미줄 방패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만큼 활에 어마어마한 파괴력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맨몸으로 맞았으면 일라이조차 생명을 장담하지 못했을 정도로 말이다.
“어라? 멀쩡하네.”
활을 날린 엘프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의도적으로 일라이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한 것이다.
일라이는 강한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감히! 감히 징벌자 따위가 이 몸을 우습게 봐?”
그녀의 눈에 핏발이 섰다.
“서둘러 제압해.”
그때 보린이 푸른 낙엽 특작대를 이끌고 일라이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집을 보호해 주던 결계가 나일리아의 활에 완전히 날아갔기에 그들은 거침이 없었다.
평소라면 푸른 낙엽 특작대 정도의 전력으로 이렇게 당당히 일라이의 거처에 들어올 수 없었겠지만, 버프를 받는 지금은 달랐다.
징벌자의 버프에 평소보다 전력이 몇 배나 뻥튀기됐다.
‘미친!’
‘몸이 이렇게 가볍다고?’
그들에게 버프를 주는 징벌자의 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들도 꽤 많은 버프를 받아 봤지만, 이렇게 단기간에 능력을 몇 배나 뻥튀기는 버프는 처음이었다.
그들에게 버프를 주는 징벌자는 말했다.
자신의 버프는 즉발성이라 위력이 강하지만, 대신 후유증이 엄청나다고.
버프가 끝나는 그 순간부터 폐인이 되어 열흘 이상 누워 있어야 한다.
버프라는 게 아예 없었던 힘을 주는 게 아니라,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잠력을 격발시켜 쥐어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푸른 낙엽 특작대는 열흘 동안 쓸 에너지를 단 한 순간에 압축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보린은 마음이 급했다.
‘버프가 끝나기 전에 이곳을 정리해야 해.’
다행히 일라이의 집에 있는 전력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의 능력은 대단했지만, 버프를 받은 푸른 낙엽 특작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크악!”
“윽!”
일라이의 집을 지키던 이들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보린의 시선이 빠르게 집 안을 훑었다.
‘빨리 일라이 님을 제압하고, 이 사태를 진정시켜야 해.’
일라이와의 전쟁이기도 했지만, 시간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빨리 싸움을 끝내고 갈등을 봉합해야 한다.
싸움이 길어지면 필연적으로 북 구역에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일라이 님을 찾아라.”
“옛!”
보린의 명령에 푸른 낙엽 특작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때 보린의 곁으로 징벌자들이 다가왔다.
“일라이 님은 여기 없을 걸세.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그럼?”
은색 가면을 쓴 징벌자가 대답 대신 바닥을 바라봤다.
보린은 그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다.
“지하에 비밀 공간이 있군요.”
“맞네!”
가면을 쓴 징벌자가 화살을 발아래로 겨눴다.
쾅!
시위를 놓자 바닥이 무너지며 지하로 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로브의 모자를 눌러쓴 징벌자가 말했다.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으니 모두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확실히 살벌하군. 보통 독한 것을 준비한 게 아닌 것 같아.”
“도대체 일라이 님은 어쩌자고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었는지 모르겠군.”
“강렬한 욕망은 엘프의 눈과 귀마저 멀게 하기 충분하지.”
“쯧!”
징벌자들은 대화를 나누면서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보린과 푸른 낙엽 특작대도 조심스럽게 그들의 뒤를 따랐다.
징벌자들의 뒷모습을 보는 보린과 푸른 낙엽 특작대의 얼굴엔 경외감이 떠올라 있었다.
은색 가면을 쓴 징벌자는 자신은 시위조차 제대로 당기지 못한 나일리아의 활을 너무 쉽게 다뤘다.
그만큼 그와 자신에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분들의 진짜 정체가 무얼까?’
징벌자들은 그녀에게조차 진짜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연락하자마자 금방 나타났으니, 북 구역에서 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북 구역의 어지간한 인물들은 모두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보린이었지만, 한 번도 이와 비슷한 인물들은 본 적이 없었다.
그때였다.
“조심해! 피 냄새와 비린내가 심상치 않다.”
앞서가던 가면의 엘프가 경고를 했다.
정신이 번쩍 든 보린과 푸른 낙엽 특작대가 무기를 들며 사위를 경계했다.
우우웅!
그 순간 어두운 통로 앞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면을 쓴 엘프가 화살을 겨누며 말했다.
“어디 인사부터 해 볼까?”
핑!
그가 바로 전방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간 화살은 어둠 속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쾅!
폭음과 함께 후폭풍이 보린 등이 있는 곳까지 밀려왔다.
우우웅!
하지만 어둠 너머에서 들리는 기묘한 소음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전혀 타격받지 않은 것 같은 반응이었다.
“심상치 않군.”
“조심하는 게 좋겠어.”
덩달아 징벌자들의 표정 또한 심각하게 변했다.
그들의 육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 어둠 너머에 위험한 것들이 있다고.
보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전에 말한 곤충 마수 말인가?”
“네!”
“그 흉측한 것을 북 구역에서 키우다니 거미 여왕이 정신 나간 것이 분명하군.”
쏴아아!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 전에 통로 안쪽에서 무언가 무섭게 쏟아져 나왔다.
여러 가지 곤충이 합성된 듯한 기괴한 모습을 가진 곤충은 고가 분명했다.
“삿된 것들은 모조리 불타 버리거라.”
로브를 입은 징벌자가 크게 외치며 양손을 활짝 펼치자 드래곤의 브레스처럼 엄청난 불길이 통로를 가득 채우며 앞쪽으로 밀려갔다.
파다다다다당!
총탄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고들이 터져 나갔다.
초고열에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다.
하지만 터지는 고보다 살아남은 고들이 몇 배는 더 많았다.
“나일리아의 활은 별 소용이 없겠군.”
가면을 쓴 엘프가 나일리아의 활을 등에 걸었다.
더욱 강하게 쏘면 고를 상당수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상 위력을 세게 하면 지하 통로가 붕괴할 확률이 높았다.
고를 죽이려다가 생매장당할 수도 있기에 아예 봉인해 두는 것이 나았다.
대신 그는 허리에서 검을 빼 들었다.
엘프들이 주로 사용하는 레이피어가 아니라 인간들이 주로 사용하는 직도였다.
곧게 뻗은 도신은 오직 살상을 위해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파바바방!
그가 직도를 선풍기처럼 회전하며 앞으로 달려갔다.
빠가각! 빠각!
그의 도에 걸린 고가 무참히 잘려져 나갔다.
수천, 수만 마리나 되는 고가 도에 잘려져 나가는 것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남은 고는 또 다른 징벌자가 화염 마법으로 남김없이 불태웠다.
보린과 푸른 낙엽 특작대는 징벌자들의 위용에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친!’
‘칼 한 자루로 저 많은 곤충들을 베어 버리는 게 가능하다고?’
이미 고의 위협을 겪은 보린과 푸른 낙엽 특작대였다.
고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라는 마수는 저렇게 쉽게 무너질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무참히 베어져 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징벌자들의 능력이 엄청나다는 뜻이었다.
그때 징벌자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듣던 것보다는 조금 약한 것 같은데?”
“그러게! 저들이 아무래도 과장해서 말한 것 같군.”
징벌자들이 피식 웃었다.
피 튀기는 혈전을 각오하고 왔는데, 이 정도면 별반 힘을 쓰지 않고도 일라이를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앞을 막아선 고를 모두 베어 버리고 도착한 지하 공동엔 일라이가 있었다.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징벌자들을 노려봤다.
“벌써 고를 모두 제거했다고?”
“별거 아니었습니다, 일라이 님!”
“그럴 리 없어. 고가 얼마나 포악하고 무서운데.”
일라이가 징벌자들의 말을 부정했다.
그녀가 아는 고의 위력은 겨우 징벌자 두 명이 합류했다고 해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라이의 예상대로였다면 통로에 들어온 순간 고에 휩싸여 무참히 죽었어야 했다.
그런데 징벌자는 물론이고, 보린과 푸른 낙엽 특작대까지 멀쩡했다.
“뭔가 잘못됐어. 설마 그년이 날 속인 건가?”
“뭘 속았는지 모르겠지만,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일라이 님!”
가면을 쓴 엘프의 정중한 말에 일라이의 눈에서 살기가 폭사되어 나왔다.
“흥! 웃기지 마라. 고가 없어도 나는 강하다. 너희들 따위가 감히 나를 어쩔 수 있을 것 같아?”
“역시 쉽게 가는 법이 없군요. 이렇게 나오면 저희도 힘으로 제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징벌자라고 해도 나를 어쩔 수는 없다. 나는 거미 여왕 일라이. 이곳은 나의 영역이다.”
슈와악!
그녀의 전신에서 수많은 은사가 뻗어 나와 지하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모습이 흡사 거미굴 같았다.
말 그대로 일라이의 영역이 된 것이다.
본격적인 싸움은 지금부터였다.
징벌자들이 일라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보린이 그들의 뒤를 따르며 생각했다.
‘그런데 제온 님은 어디에 있는 거지?’
***
등에 커다란 나무통을 짊어진 여자가 사막의 모래 언덕 위로 힘겹게 걸어 올라왔다.
잠시 뒤돌아보자, 거대한 네오 서울이 보였다.
“호호! 이제 얻을 것은 다 얻었다. 더 이상 네오 서울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엘프는 바로 일라이의 심복인 로미나였다.
그녀는 홀가분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최고의 고를 얻었어. 이제 이 녀석들을 번식시키기만 하면 다시 일족을 번성시킬 수 있어.”
“당신이 오독 일족의 후예였군요.”
그때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미나가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니 웬 남자가 서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남자, 제온이 물었다.
“설마 엘프가 오독 일족의 후예일 줄은 몰랐네요. 혹시 하프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