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dmancer of the Scorched Desert RAW novel - Chapter (319)
319화
“크으으!”
일라이가 원독 가득한 눈빛으로 징벌자들을 올려다봤다.
그녀는 양팔에 마나 구속구를 찬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징벌자들이 그녀를 제압해 마나 구속구를 채운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징벌자들도 적잖은 상처를 입었다. 북 구역의 이인자답게 일라이는 강했다.
징벌자들이 합심해서 그녀를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결코 산 채로 제압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라이가 마나 구속구를 찬 채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어서 구속구를 풀지 못해? 이깟 구속구 따위만 없으면 너희들 따윈 순식간에 없애 버릴 수 있어.”
“아직도 기가 살았네요. 팔 한쪽을 자르면 좀 조용해지려나?”
은색 가면을 쓴 엘프의 차가운 말에 일라이가 잠시 움찔했다.
모자를 깊이 눌러쓴 징벌자가 그런 일라이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 일라이!”
“뭐야? 누군데 나를 아는 것처럼 말하는 거야?”
“너도 나를 알고 있다. 나는 너를 아주 오래 지켜봐 왔으니까.”
“그럼 모자 벗고 말하든가?”
일라이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모자를 쓴 징벌자를 노려봤다.
그녀의 악독한 눈빛에 모자를 쓴 징벌자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모자를 벗고 정체를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애써 얻은 평화가 날아갈 수도 있었다.
만일 자신이 정체를 밝혔다면 일라이를 비롯해 권력을 노리는 자들이 벌써 접촉해 왔거나, 귀찮게 했을 것이다.
그런 번거로움이 싫어 정체를 감추고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 일라이의 말에 발끈해 얼굴을 노출했다가는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 있었다.
일라이가 징벌자에게 소리쳤다.
“거봐! 얼굴을 공개할 용기도 없잖아. 그렇게 가식 되게 살아가면 좋아? 세리언이 그렇게 살아가는 게 옳은 거라고 그러든? 우리 솔직해지자고. 언제까지 이렇게 인간들 세상에 기생해 살아갈 거야? 엘프가 인간들보다 월등한데, 이렇게 눈치를 보며 사는 게 정상이야?”
“정말 엘프가 인간보다 월등하다고 생각하느냐?”
“머리도 훨씬 좋고, 육체적인 능력도 월등해. 외적인 아름다움도 인간이 따라올 수 없지.”
“그럼 진작 독립하지 그랬느냐? 인간의 눈치를 보며 네오 서울에 살 게 아니라, 바깥세상에 너만의 왕국을 만들지 그랬느냐? 아니면 쿠라얀에서 넘어온 동족들이 만든 도시로 넘어가든가?”
“그건…….”
“우리 인정할 건 인정하자꾸나. 인간이 비록 육체적으로는 우리보다 열등할지 모르지만, 그들에겐 우리에게 없는 것이 있다. 그게 뭔지 아느냐?”
모자를 쓴 징벌자의 말에 일라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자를 쓴 징벌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걸 모르면, 넌 영원히 그렇게 착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답이 뭔데?”
“용기다.”
“뭐?”
“이제까지 누리던 모든 것을 잃고도 맨주먹으로 일어설 수 있는 용기,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마수에게 맞서 싸우는 용기,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 위에 돌을 옮기고, 집을 짓고, 결국은 도시를 세울 수 있는 용기. 이런 용기는 결코 엘프들은 갖지 못하는 거지.”
“웃기지 마. 엘프가 왜 용기가 없어. 엘프는 누구보다 강한 전사야.”
“그럼 왜 쿠라얀에서 도망쳐 왔느냐? 세상의 멸망에 맞서 싸우지 않고 왜 이 세상으로 도망쳐 온 것이냐?”
“그건…….”
일라이가 빨리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모자를 쓴 징벌자는 그런 일라이를 내려다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우린 멸망에 맞서 싸울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타의로 멸망한 세상에서도 스스로의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일어섰다. 그게 엘프와 인간의 가장 큰 차이다. 우리가 갖지 못한 용기를 그들은 가지고 있다. 그것이 용기가 없는 우리가 인간들의 세상에 빌붙어 사는 이유다. 너는 이런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런 궤변에 내가 넘어갈 것 같아?”
일라이는 끝까지 발악하며 모자를 쓴 징벌자의 말을 부정했다.
모자를 쓴 징발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제 와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일은 이미 벌어졌는데.”
징벌자들까지 동원한 덕에 일라이의 반역은 사전에 봉쇄됐다. 하지만 북 구역 내부에 분열이 일어난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사건은 북 구역에 큰 충격을 던져 줄 것이다.
일라이를 따르던 자들은 반발할 것이고, 세리언을 따르는 자들은 그들을 백안시할 것이다.
이런 분열을 수습하는 것이 세리언의 몫이었다.
“여왕께서 또 한동안 고생하시겠군.”
“별수 있나? 우리가 그녀를 도와주는 수밖에.”
은색 가면을 쓴 엘프가 모자를 쓴 징벌자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 전에 해결할 게 하나 더 있지.”
“응?”
“모래술사!”
“음!”
은색 가면을 쓴 엘프가 침음성을 흘렸다.
제온이 아니었으면 북 구역 전체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뻔했다.
“곤충들끼리 서로 잡아먹게 해 ‘고’라는 괴물을 만들다니.”
“고가 풀려났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모래술사가 없었으면 절대 막지 못했을 거야.”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해야겠군.”
“그게 우리들의 방식이니까.”
인간처럼 맨땅에서 일어날 용기는 없지만, 그래도 은혜를 입은 만큼 보답해 주는 것이 이들의 방식이었다.
은혜도, 원한도 철저하게 계산해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한다.
최소한 인간 세상에 섞여 살려면 신상필벌은 확실해야 한다.
은색 가면을 쓴 엘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군.”
“우리가 고민해 봐야 뭐 하겠나? 여왕께서 알아서 처리하시겠지.”
“후! 그녀에게 큰 짐만 지우는군요.”
“그녀가 선택한 길이야. 우리는 지금처럼 이렇게 은밀히 그녀를 보좌하는 수밖에…….”
모자를 쓴 엘프가 고개를 저으며 뒤를 돌아봤다.
보린과 푸른 낙엽 특작대가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보였다.
버프가 끝나자마자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이다.
열흘 쓸 에너지를 한순간에 압축해서 사용했으니, 앞으로도 며칠은 더 고생할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버프를 줬음에도 푸른 낙엽 특작대에도 사상자가 많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또한 수습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래저래 상처가 많은 하루였다.
“휴우!”
“하아!”
징벌자들의 깊은 한숨이 공기 중에 흩날렸다.
***
유세희는 갑자기 나타난 제온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니, 지금 네오 서울에 들어간 거 아니었어?”
“어제까지는 그랬었죠.”
“그럼 오늘 나왔다는 건가? 도대체 네오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북 구역 전체가 떠들썩하던데.”
“거기까지 알고 있는 건가요?”
“워낙 단속을 철저히 해서 내부 사정까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큰 사건이 일어난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
북 구역에 변고가 일어나자마자 유세희도 사정을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 즉시 북 구역에 모든 출입이 금지되면서 정보가 완전히 차단됐다.
그 때문에 갑갑함을 느끼고 있던 중이었다.
제온이 그녀에게 그간의 사정을 말했다.
“북 구역의 이인자인 거미 여왕이 반란을 획책했어요.”
“일라이가?”
“네!”
제온은 그녀에게 ‘고’와 로미나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줬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유세희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괴생명체가 풀렸다면…….”
“많은 사람이 죽었을 거예요.”
“제대로 미친년이네. 아무리 권력이 좋아도 그렇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제아무리 인권이 바닥에 떨어진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지켜야 할 선이 있었다.
일라이는 그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다.
“그래서 일라이는 어떻게 됐지?”
“조용한 것을 보니 잘 제압했나 보네요.”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같이 온 사람들은 누구야?”
유세희의 시선이 제온의 옆에 서 있는 남자들을 향했다.
그중 한 명이 마치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헬브린 용병대에 있었던 아카시였다.
일라이가 ‘고’의 먹이로 삼던 사람들을 납치한 죄가 있기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는 것이다.
제온은 그에 대해 가감 없이 말했다.
“이름은 아카시. 헬브린 용병대의 탐지꾼이에요. 이자 때문에 헬브린 용병대가 마수를 피해 수많은 사람들을 납치할 수 있었어요.”
“탐지꾼이라고? 설마 마수들을 미리 탐지할 수 있단 말이야?”
“네!”
“맙소사!”
유세희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만큼 제온의 말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마수를 미리 탐지할 수 있는 각성자는 극히 희귀했다.
“감지 범위가 얼마나 되지?”
제온이 대답 대신 아카시를 바라봤다.
본인이 직접 말하라는 눈빛이었다.
아카시가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제온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저는 C급 각성자입니다. 감지 범위는 대략 십 킬로미터 정도입니다.”
“그렇게나 멀리 있는 마수를 감지할 수 있다고?”
“아! 정확히는 마수 탐지 능력이 아니라 생명체 탐지 능력입니다. 십 킬로미터 밖에서 감지할 수 있는 마수는 그만큼 생명 반응이 강한 녀석들뿐입니다.”
“B급 이상의 대형종이란 말이군.”
“네!”
“그럼 소형 마수들은?”
“무리 지어 활동하는 녀석들은 칠, 팔 킬로미터 정도고, 소형 마수들은 사에서 오 킬로미터 정도 접근해야 알 수 있습니다.”
“으음!”
유세희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녀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십 킬로미터 밖에서 대형 마수들을 미리 감지할 수 있다면 회피할 수 있다.
그녀가 알기로 기존의 탐지꾼 중 가장 뛰어난 이가 겨우 삼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마수를 감지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만으로 엄청난 대접을 받고 특별 보호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눈이 쫙 찢어진 사내는 무려 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대형 마수를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인간 레이더라고 볼 수 있었다.
전문적인 내비게이터에 비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라면 최고의 재능이라 볼 수 있었다.
유세희가 제온에게 말했다.
“이자, 우리에게 넘겨.”
“죄를 많이 지은 자입니다.”
“상관없어. 우리가 그가 지은 죄 이상으로 뽑아 먹을 테니까.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부릴 거야.”
“도깨비 시장의 주인다운 대답이군요.”
제온이 피식 웃었다.
그녀에게 사람의 선악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었다.
능력만 있다면 어지간한 죄 따윈 용서됐다.
아카시만 잘 이용하면 외부로 통하는 여러 활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제온이 말한 강철 요새 말이다.
강철 요새로 향하는 안전한 길만 개척할 수 있어도 도깨비 시장엔 엄청난 이득이었다.
아카시를 데리고 있는 부담감을 충분히 상쇄할 수 있었다.
유세희가 말했다.
“보답은 확실히 할게.”
“보답은 필요 없고, 대신 이 사람을 잘 보살펴 줘요.”
제온이 아카시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이 사람은 또 누구야?”
“브라이스. F급 연금술사입니다.”
“연금술사? 겨우 F급?”
유세희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F급 각성자는 발에 치일 정도로 넘쳤다.
연금술사라는 클래스가 마음에 들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들일 정도로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제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는 모래 경화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경화제가 뭐……. 잠깐! 모래를 경화시킨다고?”
“네!”
“제기랄!”
쾅!
유세희가 책상을 내리쳤다.
그제야 브라이스라는 F급 연금술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자각했기 때문이다.
“모래를 굳혀 벽돌을 만들 수 있겠군. 집을 더 지을 수 있는 거야.”
“네! 지하에 벙커를 만들 수도 있을 테고.”
“이자는 또 어디서 납치해 온 거야?”
“아카시가 있던 헬브린 용병대가 약탈한 생존자 마을 사람입니다.”
핫심의 말과 달리 헬브린 용병대는 브라이스와 마을 사람들을 일라이에게 넘기지 않고 모처에 가둬 두기만 했다.
아카시는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핫심의 거짓말을 알렸고, 그들이 갇혀 있는 장소를 알아내자마자 제온이 구한 것이었다.
제온이 말했다.
“브라이스에겐 가족들이 있어요.”
“오케이! 몇 명이 됐든 우리가 보호해 주고, 터전을 마련해 줄게. 그러니까 브라이스까지 넘겨줘.”
“약속한 겁니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해. 도깨비 시장에서 책임질게.”
“좋습니다.”
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우두커니 서 있던 브라이스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져 있던 그에게 유세희의 말이 한 줄기 빛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원하던 방식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생존자 마을에서 같이 살던 사람들 모두 도깨비 시장의 보호하에 빈민가에서 살 수 있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만족했다.
“고맙습니다. 흐흑! 정말 고맙습니다.”
조용한 실내에 브라이스의 오열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