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01)
바다새와 늑대 (100)화(101/347)
#100화
난데없이 오더니 혼사 이야기인가, 싶었던 로트렐리는 한숨을 쉬며 손을 내저었다. 됐다는 뜻이었다. 이제 열아홉이 된 로트렐리는 오히려 다른 여자아이들에 비하면 결혼이 늦은 편이었으나, 로트렐리는 자신에게 결혼이 딱히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었으므로 큰 불편은 없었다.
오히려 결혼해서 남편 집으로 가야 하면 남은 가족이 걱정이었으며, 살림을 꾸리고자 할 정도로 애정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애정 없는 사람에게 헌신할 정도로 상냥한 사람도 못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혀를 차며 말했다.
“너에게 꽤 좋은 이야기니까 들어보기라도 해라.”
“대체 무슨 좋은 이야기가 된단 거예요? 혼수 준비할 여건도 안 되는 마당에.”
“제국의 귀족분이 신부를 찾는다더구나. 마침 내가 너를 딱하게 여겨서 편지를 보내보았는데, 좋다고 하더군.”
나이 찬 시골 계집애를 좋다고 한다니, 대가리가 부족하든 인성이 부족하든 하겠군. 로트렐리는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생각했다. 아니면 역으로 나이가 너무 가득 차신 분이라든가. 로트렐리가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얼굴로 바라보자 선생은 혀를 차며 말했다.
“이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네가 아직 모르는 것 같은데, 이분은 네게 막대한 돈을 약속했어. 네 가족이 걱정 없이 먹고살 만한 돈이지.”
“몸 팔란 소리 한번 고상하게 하시네.”
로트렐리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혀를 차며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선생이 다급하게 만류했다.
“이분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못돼먹은 귀족이 아냐! 돈도, 지위도, 인성도 모두 가진 분이시다! 해군 중장이시라고! 게다가 나이도 그렇게까지 크게 차이 나지 않으신다. 응?”
“몇 살이길래요?”
“서른 넘으신 분이신데…….”
“잘 가세요.”
로트렐리! 선생이 버럭 외쳤으나 로트렐리는 마음 바꿀 생각이 없었다. 돈, 그놈의 돈은 좀 탐났지만 그렇다고 체질에 맞지도 않는 결혼을 하는 것도 웃겼다.
자신이 제국 땅에 가버리면 남은 가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알기 힘들어질 텐데, 평화롭게 살고 있겠지, 하는 가정으로 버틸 수나 있겠는가?
선생은 속이 탄다는 듯 몇 번 발을 동동 구르다가 말했다.
“정말 이런 좋은 조건은 없어! 거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전무하다고! 이 기회를 차버리면 어쩌잔 거니!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그럼 그만큼 뭔가 뒤가 구리겠죠. 귀족 놈들 횡포 한두 번 보시나.”
“정말, 정말 믿을만한 분이시다! 해군 중장 자리에 앉으신 분인데 못 믿을 건 또 뭐야?”
“그럼 믿을 건 또 뭔데요? 군인이라, 그러면 대가리가 상명하복에 찌들어서 뻑 하면 기어오른다고 하겠네요. 만약 부부관계에 문제 생겨서 어디에 신고해도 상대가 중장이니 나만 무시당할 거고. 전 뻔히 보이는 위험을 알고도 저지르는 멍청이는 아니라서요.”
그 말에 선생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네가 언제부터 위험을 피했다고?’ 그렇게 묻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로트렐리는 한숨을 쉬었다. 지친다. 그런 생각이 온몸에 눌어붙은 것 같았다.
어렸을 적처럼 앞뒤 안 가리고 부딪치는 나이는 지났다. 애초에 이제는 로트렐리가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마당에 위험을 부담할 여력이 없는 건 당연했다.
여차해서 루셀라에게 큰일이라도 난다면 그땐 로트렐리가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푸에르가 죽은 뒤로 루셀라도 아직까지 슬픔에 잠겨 큰딸인 로트렐리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로트렐리가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든 결과물들은 대부분 처참했다.
이제 어린애도 아니니까 날뛰는 건 졸업해야지. 로트렐리가 굳건하게 거부하자 결국 선생은 쓴맛만 삼키고 돌아섰다. 그녀는 답할 기간은 많으니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말했지만 로트렐리는 어깨만 으쓱이고 관뒀다. 생각이 바뀔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로트렐리는 자신이 버틸 만하다고 해서 다른 가족들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간과했다. 단출하게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선생이 찾아온 이야기를 해주자 랄티아는 어색한 얼굴을 했고, 쌍둥이들은 그게 왜 로트렐리에게 나쁜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로트렐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쨌든 거절했어. 내가 가버리면 엄마랑 동생들은 어떡해.”
“그래, 그랬구나. ……돈은 정확히 얼마 주는지 말 안 하지?”
“뭐……. 알아서 뭐 해. 가지도 않을 거 알아봤자 속만 쓰리지.”
로트렐리는 루셀라의 말에 떨떠름하게 대꾸하면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어머니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눈치가 빠르다는 것을 후회했다. 루셀라는 로트렐리가 혼인을 했을 때 오는 이득을 계산하고 있었다.
랄티아가 수프를 떠먹다가 루셀라를 향해 헛기침하자, 그제야 아차 싶었던 루셀라가 손을 내저었다.
“아냐, 신경 쓰지 마라. 엄마가 말했잖아. 네가 원하지 않는 결혼은 안 시킬 거야.”
“……로타, 루티. 밥 다 먹었으면 방으로 가.”
로트렐리는 루셀라에게 뭐라고 하려다 말고 동생들에게 말했다. 쌍둥이가 어설프게 눈치 보다가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로트렐리는 입을 열었다.
“왜? 그 정도로 돈이 부족하진 않잖아. 아버지 빈자리가 크긴 하지만 그럭저럭 평범하게 생활했는걸. 뭐 때문에 그래?”
“그야 엄마가 가문에서 가져오고 푸에르가 혼수로 마련했던 패물까지 팔았으니까 그렇지…….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어, 로트렐리…….”
“무슨 소리야? 여태 밭일 도운 품삯 아니었어? 아니, 아니……. 잠깐만, 그걸 제값 주고 살 만한 부호가 이 섬에 있기는 해?”
“고래잡이네 집에서 주로 사 갔지. 그건, 그건 중요한 게 아냐. 이제 로타와 루티도 커가니까 돈 쓸 곳은 많아질 텐데…….”
루셀라의 말에 로트렐리가 머리를 쥐어 싸맸다. 어쩐지 암만 매번 일을 나간다지만 꾸준히 품삯이 들어오는 것이 이상하다 싶더라니, 패물을 판 돈을 쪼개고 쪼개 쓰고 있던 것이다. 실제로 들어오던 품삯은 그에 비하면 그야말로 쥐꼬리였겠지. 작은 마을에서 엄청난 대부호라 봐야 고작 고래잡이가 고래를 하나 잡을 때마다 일확천금하는 것뿐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어쩌면 모른 척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 로트렐리는 랄티아가 가계부를 들고 와 살피는 것을 보고 손짓해 그것을 덮게 했다.
“됐어, 가계부 들춰봐야 아낄 구석이 나오겠어? 여태 쥐어짜댔는데…….”
“아냐, 어떻게든 되겠지. 너무 걱정하지 말고.”
루셀라가 로트렐리를 달래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로트렐리는 할 말 많은 얼굴로 루셀라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걱정을 안 하는가? 정말로 팔아치울 패물까지 바닥나면…….
로타와 루티가 뱃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애들이 바다로 나가 제 몫을 하기 전까지는 애들을 책임지는 건 어른들의 몫이었다. 그 어른은 곧 루셀라와 장녀인 자신이었다.
랄티아도 재능을 썩히지 않고 제국에 나가서 공부한다면 분명 크게 될 테니 그걸 위해서라도 돈을 모아야 했다. 돈은 있어도 부족했다. 루셀라도 노후를 대비해야 하니까 저축이 필요하고, 돌발적인 사고를 대비해 어느 정도의 저축도 필요했다.
그리고 나는……. 나는? 로트렐리는 머리를 짚고 있던 그대로 일순 굳어졌다.
자신은 무얼 한단 말인가. 자신이 혼자 바다로 나가길 하겠는가, 기사가 되길 하겠는가, 뭘 하겠는가? 로트렐리는 다시 한번 깨닫고 말았다.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이룬 것도, 이룰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은 달랐다. 로트렐리는 아무 말 없이 식은 수프가 올라있는 식탁 위를 눈으로 훑었다.
돈이…… 돈이 있다면 해결될까? 그러자 루셀라가 로트렐리의 생각을 알아챈 듯 말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라, 로트렐리. 난 딸이 원하지 않는 결혼하는 꼴은 못 봐.”
“아니, 나는…….”
『뭐? 로트, 결혼을 생각하는 거야? 바다는 어쩌고?』
“…….”
그러고 보면 발카가 있었지. 자신이 해군 중장과 결혼하게 된다면……. 발카는 그 사람에게 맡기는 편이 좋을까? 하지만 나는 바다에 나가지 못하겠지. 아냐, 중장의 아내인데 가끔 배에 동승하는 정도는…….
로트렐리는 끙,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어쨌든 지금 고민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나중에 더 생각해볼게.”
“무슨 소리니! 이미 거절했잖아. 그냥 생각하지 말렴.”
로트렐리는 기겁하는 루셀라를 보며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래, 그럴게.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로트렐리는 선생을 찾아갔다. 루셀라가 패물을 죄다 팔아봤자 제값도 못 받을뿐더러, 오히려 그건 루셀라의 노후 자금과 만일의 보험으로 남겨둬야 했다.
그럴 바에야 로트렐리가 제국으로 혼삿길에 오르며 랄티아와 함께 가서 랄티아는 공부를 하고 로트렐리는 섬으로 돈을 부치는 식으로 생활하는 게 완벽할 것이다.
며칠에 걸쳐 생각한 로트렐리의 계획을 들은 발카는 날개를 퍼덕이며 결사반대를 외쳤지만, 상대가 해군 중장이니 바다로 나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거짓말에 넘어가 탐탁잖지만 일단 수긍하는 편으로 마음을 바꿨다.
로트렐리는 반색하며 자신을 반기는 선생을 보며 속이 꼬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러는 편이 가장 나아.
로트렐리가 계속 바다에서 홀로 고기잡이를 해와도 아무도 그 물고기를 사지 않고, 그나마 사가는 것도 제값을 받지 못하는 마당에 어느 날 로트렐리마저 푸에르처럼 바다에서 비명횡사하면 남은 가족들은 그야말로 가난에 허덕이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엔 정말로 이게 낫지……. 로트렐리는 애써 시커멓게 타는 마음을 달래며 선생의 설명을 들었다. 어느 누구 집안의 누구 씨에게 편지를 보내면 얼마 후에 답신이 오고 얼마 후에 결혼이 성사될 거고……. 그 사이에 로트렐리가 제국에 갈 때, 랄티아를 끼워 데려가겠다고 하자 선생은 콧잔등을 찌푸렸지만, 아무렴 가장 원하던 신붓감인 로트렐리가 순순히 나서니 감안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생이 대충 이 정도의 금액을 준다고 약속했다며 내민 종이는 과연 만족하고도 넘치는 액수가 적혀있었다. 그것을 보자 로트렐리는 정말로 자신이 결혼한다는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을 돈으로 환산하면 저 정도의 금액이 나오는 걸까? 하지만 누가 내 값어치를 판단한단 말인가. 감히 누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젠 정말 별수 없었다. 선생은 로트렐리에게 결혼한 이후에도 잘 지내면 중장의 집안에서 돈을 더 보낼 수 있을 것이라며 아이 어르듯 달랬다. 그녀는 로트렐리가 마음을 바꾼 이유를 대강 짐작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잘 생각했어. 이런 집안에 시집가서 잘 지내기만 하면 넌 귀족 부인이 되는 거고, 가족들은 부유하게 잘살 수 있을 테니 얼마나 좋은 일이니?”
로트렐리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미소만 보여줄 뿐이었다. 애초에 당신들이 내가 잡아 온 해산물을 사주기만 했어도 누군가의 아내로 돈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을 텐데. 그러나 그런 날 선 말로 들뜬 선생을 상처 입히기도 치졸했다.
그래서 로트렐리는 그냥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며 선생의 말에 맞장구만 쳐줬다.
아……. 중장인지 뭔지. 가족들의 안녕만 보장되면 다 죽여 버리고 귀족 살인죄로 광장에서 목이 잘려버릴 테다……. 로트렐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더러운 기분을 달랬다. 선생이 편지를 보내겠다며 자리를 파하고 로트렐리는 선생의 집을 나서다가 벽에 걸린 거울로 자신을 보았다.
모로 보나 머리만 길다 뿐이지 평범한 여자아이들과 다르게 갸름한 소년 같은 모습이었다. 목소리도 무뚝뚝하고 낮은 편이라 머리만 짧으면 정말로 목소리 톤이 조금 높은 소년처럼 보일 것이다. 로트렐리는 음울하게 쳐다보는 거울 속 모습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로트렐리가 소년이었으면 나았을까? 생각해봐야 하등 쓸모없는 것만 머릿속을 드글드글 채워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