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02)
바다새와 늑대 (101)화(102/347)
#101화
집에 돌아가 선생과 혼사에 대해 논하고 왔다고 전했을 때 루셀라가 지은 표정을 로트렐리는 잊지 못했다. 그건 슬픔과 경악, 그리고 아주 약간의 안도감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루셀라도 딸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걸 원하지 않았고, 여건만 괜찮았다면 어쩌면 로트렐리는 바다로 나가서 멋진 항해사가 되거나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왠지 로트렐리는 루셀라의 표정에 드러난 그 약간의 안도감이 자신의 가슴을 찢는 것처럼 느껴졌다. 루셀라도 로트렐리의 선택을 안타까워했지만, 그러니까, 그럼에도 아주 조금은 안도를 느꼈다는 것에 로트렐리는 배신당한 기분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성인군자도 아니고 어떻게 태연하기만 할 수 있을까? 가족들 먹여 살리자고 제 삶 하나 내던졌는데.
하지만 심정이 어떻든 이미 로트렐리는 마음을 정했고, 그나마 남은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루셀라와 랄티아 역시 그런 로트렐리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안절부절못했고, 로트렐리는 오히려 그들의 그, 죄라도 지은 것 같은 태도가 거북했다.
섬에 있으면 로트렐리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진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보며 수군거렸고, 집에 가면 가족들이 로트렐리에게 빚진 것처럼 비위를 맞추려 들었다. 로트렐리는 그 모든 것을 뻔뻔하게 넘길 정도로 낯짝이 두꺼운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모두 거북했기 때문에 로트렐리는 바다로 도피했다. 평소라면 저러다 도망가는 것 아니냐며 트집 잡았을 마을 사람들도 혀를 차며 로트렐리가 바다에 나가는 것을 관망했다.
발카는 바다에 자주 나가는 로트렐리가 좋은 듯 콧노래를 불렀으나, 바다에 나와도 로트렐리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가야 하는 곳은 섬과 집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형 커터에 누운 로트렐리는 흘러가는 구름처럼 자신도 어디론가 녹아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로트렐리는 중장이란 사람에게서 답신이 오고, 신부가 되기 위해 미뤄온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며칠간 잡혀 있다가, 그것에 질려 뛰쳐나오기를 반복했다. 중장이 나름대로 상식이 있는 사람인지 로트렐리가 성인이 된 이후에 식을 올리겠다고 전해왔기 때문에, 선생은 그나마 시간 여유가 있는 게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렇게 로트렐리는 스무 살이 되었다. 짧은 유예였다. 새해가 밝고 결혼식의 대략적인 날짜가 정해질 때쯤, 정말로 끝이구나 싶어서 로트렐리는 마지막으로 바다에 나가기 위해 커터 위에 올라탔다.
그날만큼은 선생도 로트렐리를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이 마지막을 만끽하라는 듯 다른 마을 사람들도 모두 그녀에게 친절했다. 바다로 나아가며 로트렐리는 생각했다. 하하, 죄다 엿 먹었으면.
그날,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바다로 나간 그 날. 한가로이 가슴팍에 드러누운 발카와 작은 커터에 누워 파도의 소리와 찰랑이는 물결 소리를 듣고 있던 로트렐리는 자신의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눈꺼풀 아래에서 느꼈다.
구름의 그림자인가? 눈을 반짝 뜬 로트렐리는 검붉은 빛의 커다란 해적선과 마주쳤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 로트렐리가 그들의 눈에 띄기 전에 배를 돌리려 했으나, 가까이 온 그들은 이미 로트렐리의 존재를 눈치채고 다가온 것 같았다.
역광 때문에 온통 검게만 보이는 선원들의 얼굴이 배의 난간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중 덩치가 크고, 진녹색의 머리칼을 구불구불 늘어뜨린 사람이 크게 웃었다.
“아하, 아하! 이게 누구야! 연이 닿으면 드넓은 바다 중에서도 만난다더니!”
그가 그렇게 외치며 웃자 그림자 무리처럼 보이는 선원들이 저마다 낄낄 깔깔 웃었다. 로트렐리처럼 놀라서 어깨 위에 앉은 발카가 히익, 하는 소리를 냈다.
『해적이라고? 왜? 여태 해적이 이 섬 부근에 출몰한 적은 없잖아…….』
로트렐리라고 이유를 알겠는가! 로트렐리는 서둘러 노를 챙겨 들고 돛을 펼쳤다. 누가 봐도 꽁지 빠지게 도망치려는 모습에 그들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도망가려나 본데? 도망가 봐, 도망가! 그들이 발을 구르고 난간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목청을 높였다. 그때 아까의 진녹색 머리의, 선장모를 쓴 남자가 외쳤다.
“바다새가 우리 손에 들어왔다!”
로트렐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어떻게 알아챘지? 발카가 바다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하지만 그깟 거 알게 뭔가! 해적들에게 잡히게 생겼다!
로트렐리가 돛을 펼치자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불어왔다. 바다새의 가호가 있으리라 지금만큼 실감 났던 적도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해적선이었고, 일개 바람을 타고 노 저어 나아가는 소형 커터보다 마장석을 이용하는 그들이 더 빠를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로트렐리를 따라오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노래를 불렀다.
오, 도망가, 작은 보트! 잡히면 죽게 될 거야!
오, 도망가, 이 겁쟁이! 잡히면 혓바닥을 뽑으리!
파도 뒤지던 손, 늑대 모가지를 잡았네
그 목을 지키고 싶다면,
오, 도망가, 작은 보트! 잡히면 가만 안 둔다!
잘 숨어라! 잡히면 갑판 위에 내장을 늘어놓으리!
우리는 어디든 간다네, 바다 어디든!
네가 숨은 곳도 헤집어 버릴 테다!
로트렐리는 등 뒤로 땀이 비 오는 것처럼 흐르는 것을 느꼈다. 최고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데도 배가 너무 느린 것처럼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에 커터에 납작 엎드리자, 그 위를 스치고 날아온 총탄이 바다에 박혀 작은 물보라를 일으키더니 가라앉았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데 해적선의 대포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망할, 격추당한다! 뇌리가 공포로 하얗게 세었다.
그 순간, 파란빛이 시야를 가득 채우며 몸이 어디론가 훅 이끌렸다. 본모습을 드러낸 발카가 로트렐리와 소형 커터를 발에 쥐고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해적들은 감탄인지 야유인지 모를 것을 내뱉으며 왁왁 소리를 질렀다. 선장모를 쓴 사내가 외쳤다. 따라간다! 그 소리에 로트렐리는 퍼뜩 외쳤다.
“안, 안 돼, 섬으로 오려는 속셈이야!”
『어차피 이 근처에 섬이라곤 너희 섬뿐이야! 그들에게 알려야 해, 로트렐리!』
로트렐리는 그 말에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마을로 도착한 발카는 소형 커터를 대충 바다에 내던지듯 내려놓고 로트렐리를 백사장에 내려주었다. 작은 크기로 돌아온 발카가 뛰어가는 로트렐리의 곁에서 낮게 날았다.
로트렐리가 서둘러 백사장을 가로질러 달려가며 소리를 질렀다.
“해적이야! 해적이 오고 있어요!”
“뭐? 해적이라니?”
“모르, 모르겠어요! 갑자기 마주쳤어요.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 다들 피해야 해요!”
로트렐리가 숨을 헐떡이며 말하자 마을 사람들은 순식간에 혼란에 젖었다. 다들 비명을 지르며 집의 물건을 바리바리 싸 들기 시작했고, 무언가 챙기려는 아들딸을 만류하며 옆구리에 끼우고 어디론가 데려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어렵지 않게 섬마을을 찾아낸 해적들이 대포를 쏘는 소리가 왕왕 울렸다.
사방에서 겁에 질린 비명과 외침이 울려 퍼졌다. 로트렐리는 서둘러 자신의 집을 향해 뛰어갔다. 해변과 멀지 않은 곳이니 위험할 것이다. 가족들이 위험할 것이다! 해적들이 개미들을 사냥하는 사마귀처럼 배에서 우르르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로트렐리는 죽어라 뛰었다. 망할 해적들보다 자신이 먼저 가족들에게 도착해야 했다. 그러나 숨이 턱턱 막힐 때야 도착한 집은 이미 화마에 휩싸여 있었다. 그 앞에서 루셀라가 검을 들고 해적들에 맞서다가 집이 불에 타오르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동생들이 아직 집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로트렐리는 숨을 헐떡이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엄마!”
“로트렐리!”
로트렐리의 목소리가 놀란 루셀라가 검을 들어 해적들의 칼을 막다가 외쳤다. 이리 오지 마! 도망가! 그때 해적 중 하나가 루셀라의 허리춤을 베었다. 로트렐리가 그들에게로 달려가다가 비명을 지르며 돌을 주워 던졌다.
그러나 이미 자세가 허물어진 루셀라의 배에 칼을 찔러 넣은 해적은 로트렐리가 던진 돌이 우습다는 듯 웃으며 그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뒤로 루셀라가 바닥에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그때 다시 발카가 로트렐리의 어깨를 잡더니 다시 본체를 드러냈다. 로트렐리는 자색으로 빛나는 눈을 보며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설마, 아니지? 그러나 발카는 로트렐리의 기대를 배반하고 그녀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뒤이어 불타는 집을 뒤로하고 루셀라가 다시 한번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발카에게 잡혀 날아가는 로트렐리를 보며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검을 들며 웅얼거렸다.
‘긍지 높은 루셀라 아피나 경이 인사…….’
로트렐리는 그것을 보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발카의 발을 주먹으로 때렸다.
“발카! 돌아가! 당장!”
『그럴 순 없어!』
“뭐가 ‘그럴 수 없어’야? 당장 돌아가라고!”
『로트렐리, 정신 차려!』
그러더니 발카는 다시 소형 커터로 돌아가 로트렐리를 그 위에 앉히고 말했다.
『저들은 널 쫓아온 거야! 네가 피해야 한다고! 네가 가장 위험하단 말이야!』
“그게 무슨, 무슨 소리야……. 잠깐, 잠깐만……. 나 정말로 혼란스러워……. 이게 다 뭐야…….”
『로트렐리!』
“입 닥쳐! 제발 조용히 좀 해봐!”
그러나 로트렐리의 현실도피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해적 하나가 로트렐리가 있는 방향을 알고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워후, 하고 한 번 환호성을 지르더니 주머니에서 고둥을 꺼내 들었다.
표적을 발견했다고 알리려는 속셈이다. 로트렐리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커터에 두고 다니던 단도를 들고 그에게 덤벼들었다.
그가 놀라서 로트렐리의 머리를 고둥으로 내리쳤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찰나 로트렐리는 팔을 휘둘러 그의 목에 단도를 꽂아 넣었다. 루셀라에게 검술을 배웠다고는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엉망인 자세였다. 그러나 로트렐리는 손아귀의 단도를 타고 들썩 움직이는 감각과 함께 얼굴과 온몸에 튀는 뜨끈한 피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피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풀썩 쓰러지자 로트렐리는 자기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 쳤다. 사람을, 사람을 죽였다.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
로트렐리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얼굴도 손도 온통 피투성이라 마치 악귀 같은 모습이었다.
그때 마음을 추스를 시간 따위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다른 해적이 또다시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그가 로트렐리의 발치에 쓰러진 해적을 보고 왁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로트렐리는 자신이 이렇게 살고 싶다는 의지가 강한지 그때에야 처음 알았다.
쓰러진 해적 목에 박혀있던 단도를 뽑아 들고 그에게 달려든 로트렐리는 아까처럼 엉성한 자세가 아니라 제대로 된 검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었다. 사람의 피를 뒤집어쓴, 속이 울렁거리는 감각은 그렇게 빨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내내 소리를 지르는 것 때문에 덩달아 혼란스러워진 로트렐리는 몇 번이고 그의 목과 가슴을 찌른 뒤에야 그가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고, 이미 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의 고함을 들은 해적들이 백사장을 향해 오고 있었다.
넋을 빼고 있던 로트렐리는 해적들이 오는 소리에 허겁지겁 배에 올라 노를 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