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03)
바다새와 늑대 (102)화(103/347)
#102화
섬도 해적선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이르러서야 로트렐리는 바닷물로 자신에게 튄 피를 씻어냈다. 몇 번이고 씻어내다가 발카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든 로트렐리는 들썩이는 호흡을 애써 억누르며 이마를 짚었다.
『여기서 좀만 있다가 내가 섬을 정찰하고 올게. 그들이 갔을 때 돌아가자.』
“……그래.”
『괜찮아?』
“…….”
로트렐리는 이마를 짚은 그대로 발카를 바라보았다. 괜찮냐고? 괜찮냐고……. 로트렐리는 헛웃음을 짓다가 이내 깔깔 웃었다. 괜찮냐고! 엄마도 동생들도 죽었을 게 뻔한데 괜찮냐고 묻는단 말인가? 로트렐리는 온몸을 들썩이면서 웃다가 말했다.
“죽고 싶어.”
『로트렐리…….』
“아, 아냐……. 그래, 차라리 이대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버릴까? 아, 홀가분하다. 가족들도 다 죽었으니 난 정말 자유네. 빌어먹을, 장난해?”
로트렐리는 하하 웃다가 얼굴을 굳히며 발카를 노려보았다.
“본체를 쓸 수 있으면 엄마도 같이 구해 주지 그랬어? 해적과 마주쳤을 때 그들을 쓸어버리지 그랬어? 벼룩 털어내듯 털어냈으면 그 개 같은 새끼들이 유유자적 배 타고 우리 섬으로 왔겠어?”
『난…… 난 전투를 못 해.』
“누가 싸워주래?! 누가 멋지게 그놈들을 전부 해치워주래?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어! 그때 엄마를 두고 나만 데려오면 어쩌잔…….”
『난 내 주인이 죽는 걸 원치 않아.』
발카의 나직한 말에 로트렐리는 일순 허탈해졌다. 발카를 탓해 뭐 해. 엄마는 이미……. 울컥 눈물이 솟아났다. 로트렐리는 하하 웃으며 뺨을 닦았다. 그러나 닦여 나오는 것은 없었다.
아……. 이게 다 뭐야. 갑자기 이게 다 뭐란 말이야……. 그리고 둘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망망대해에 가만히 있었다. 발카는 한참 동안 로트렐리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지금쯤이면 그들도 떠났겠지. 둘러보고 올게. 얼마 안 걸려.』
로트렐리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발카는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트렐리는 풀썩 쓰러지듯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번에도 내 탓인가? 내가 굳이 바다에 나가서 이런 일이 일어났나?
전부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
말한 대로 돌아오는 데 얼마 안 걸린 발카가 괜찮은 것 같다며 알려주자 로트렐리는 그제야 움직여 노를 움켜쥐었다. 무언가 생각을 한 것 같았지만 동시에 머리 한구석이 마비된 것처럼 둔중했다.
돌아가는 내내 로트렐리는 애써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생각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마을로 돌아가면…… 어차피 가족이 사라진 마당에 혼사는 진행할 필요가 없으니까 취소하자. 선생이나 다른 사람들은 길길이 날뛰겠지만, 알 바야?
그리고 이젠 정말로 이 마을을 떠나버리자. 내 삶을 찾는 거야. 이젠 다 지긋지긋해.
그러나 마을에 도착한 순간 로트렐리는 다시금 무언가 틀어졌다는 직감이 들었다. 눈물 자국과 검댕으로 더러워진 누고가 지팡이를 짚으며 배에서 내리는 로트렐리에게 절룩절룩 다가왔다. 그리고 대번에 할멈의 지팡이가 로트렐리를 내리쳤다.
발카가 꽥 소리를 질렀고, 눈앞이 번쩍이는 감각에 주춤 물러난 로트렐리가 부릅뜬 눈의 누고를 쳐다보았다. 난데없이 얻어맞은 탓에 얼이 빠진 그녀에게 누고가 버럭 호통쳤다.
“이 망할 년이 기어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구나!”
“뭐…… 뭐라고요?”
“그 잡놈들이 뭐라 했는지는 아느냐? ‘바다새를 찾으러 왔다’! 네년이 대체 그간 배를 타고 어딜 가서 놀다 오면 외지인이 네 바다새를 아느냔 말이야!”
로트렐리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배를 타고 나가면 얼마나 멀리 간다고 그러는가? 가장 가까운 이웃 섬조차 작은 커터로는 한나절을 꼬박 가야 있었다. 로트렐리는 다른 섬을 다녀올 정도로 일상에 여유가 있지도 않았고, 섬을 나가 외박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생각보다 심상치 않았다. 로트렐리가 진정으로 섬 밖을 나돌아다녔는지와는 별개로 그녀는 로트렐리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누고의 뒤로 그들을 둘러싸고 선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녀처럼 눈물과 검댕으로 얼굴은 엉망이었고, 옷엔 피가 묻은 사람도 있었다.
누고가 말했다.
“그놈들이 마을 사람들도 잡아갔어……. 든든한 남자든 참한 여자든 할 것 없이…….”
“그래서, 그래서 그게 제 책임이라고요?”
“그래! 그들은 내내 너만 찾았다! 이 광경이 보이지 않아?! 죄다 불에 타고 죽었다!”
“제…… 제 가족도 죽었어요! 어떻게 그게 제 책임이 되나요! 저도 피해자예요!”
로트렐리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으나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에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누고가 외쳤다.
“네 잘난 가족! 그래, 확실히 루셀라와 네 남동생들은 죽었지. 유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인질로 잡혀간 사람 중 네 동생은 가치가 있으니 살려둘지 몰라도 우리 가족들은―”
“뭐라고요?”
로트렐리는 자신의 가슴팍을 찌르던 지팡이를 밀어내고 누고의 어깨를 쥐었다. 서늘한 벼락이 내리꽂힌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랄티아가 그놈들에게 잡혀갔어요?”
“이거 놓아라!”
“랄티아가 살아 있냐고요!”
“이, 악독한…… 마녀 년!”
누고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지팡이로 한 번 더 로트렐리를 후려쳤다. 로트렐리가 휘청이며 물러서자 발카가 날카롭게 울더니 누고의 손을 쪼았다. 할멈이 악, 소리를 지르며 물러나자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감싸고 끔찍한 것을 본다는 얼굴로 로트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로트렐리는 그런 것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랄티아가…… 랄티아가 그놈들에게 잡혀갔다고. 살아 있는 거야? 만약 그렇다면 자신은…….
욱신거리는 머리로 한 가지 각오가 스며들었다. 랄티아를 구해야 했다. 로트렐리는 당장 해적들을 쫓아가려 몸을 돌렸다. 그때 누군가 로트렐리의 어깨를 잡아채더니 백사장에 꿇어 앉혔다. 그에 발카가 그들의 손을 쪼려 하자, 누군가 발카를 내리쳐 기절시켰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걸 본 로트렐리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짓이에요!”
“로트렐리 아피나, 잘 들어라.”
“무슨…….”
누고가 들끓는 목소리로 비척거리며 작은 나무 사발을 들고 다가왔다. 거뭇하게 젖은 나무 사발 안에 무언가 불길한 색조의 덩어리가 들어있었다. 피 냄새가 뒤늦게 코를 찔렀다.
로트렐리는 그 냄새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누고는 나무 사발 안에 손가락을 넣고 휘젓더니, 피가 흐르는 손으로 로트렐리의 이마 한가운데를 짚었다. 질척한 피가 섬뜩하게 묻어났다.
로트렐리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마을의 나이 든 할멈은 어떤 것이든 그 섬의 주술 따위를 자세히 알고 있는 작자이다…….
“잠깐, 무슨 짓이에요?”
“로트렐리 아피나, 너의 도 넘은 행동을 우리 섬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바, 너를 이곳에서 추방하노라.”
“이거 놔요!”
누고가 읊는 듯이 말하며 이마에 얹은 손을 움직여 피로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로트렐리는 하얗게 질려서 뒤늦게 몸부림쳤으나 사람들이 그녀의 팔과 어깨를 붙들어 굳건하게 고정했다.
“이제 이 마을을 떠나 먼 길을 떠날 너에게 ‘축복’을 내리니, 너의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타오를 것이며 너는 태양을 삼킨 듯 속엔 화염을 품게 될 것이며…….”
“이거 놓으라고요!”
“칼에 찔리듯, 얼어붙듯, 불에 타듯 그 어떠한 고통이 있어도 버틸 수 있을 것이며, 그러나 기어코 한계에 다다를 때엔,”
로트렐리는 온몸에 식은땀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저주였다. 섬에서 추방당하는 사람에게 안녕을 기원하는 것처럼 포장한 저주였다! 할멈이 중얼거리듯 떠드는 소리가 귀신의 곡소리처럼 섬찟했다. 로트렐리를 붙든 손들도 그 오싹함을 느낀 것처럼 벌벌 떨리고 있었으나, 그녀를 잡은 손을 풀지는 않았다.
누고가 마지막으로 한 획을 내리그으며, 선언하듯 크게 외쳤다.
“그 몸 서둘러 썩어 흩어지리라!”
그 순간 뱃속에서 칼날이 일어나 내장을 온통 찢어놓는 것 같은 통증이 엄습해왔다. 무언가 어깨 위로 내려앉은 것처럼 온몸이 묵직하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마치 날카로운 파도에 부서지는 난파선이 된 기분이었다. 로트렐리는 겪어본 적 없는 통증에 비명도 못 지르고 덜덜 떨며 고개를 숙였다.
마을 사람들이 내던지듯 그녀를 풀어주었으나 로트렐리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웅크린 로트렐리의 팔을 잡아 그녀의 작은 커터에 밀어 넣고, 기절해 축 늘어진 바다새도 더는 상서롭게 느껴지지 않는지 로트렐리에게 떠넘기듯 내던지고는 무작정 커터를 바다로 떠밀었다.
로트렐리는 속을 뒤집어놓는 고통에 이를 갈면서도 그들을 노려보았다. 살면서 한 번도 도움 되지 않은 망할 섬마을이 기어코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구나. 다 됐다 그래, 자신은 어차피 떠날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로트렐리는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미칠 듯이 맹렬하게 분노가 온몸으로 뻗쳐나가는 것 같았다. 그간 느껴온 어떤 것보다도 통렬하고 거센 분노였다. 혹은 그동안 억지로 흘려보내던 것이 한순간 모여들어 부피를 늘리는 것 같기도 했다.
멀어지는 섬을 보며 로트렐리는 일그러진 얼굴로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망할, 망할 새끼들, 다 뒤져버려라! 나도 뒤져버리고 저들도 뒤져버리면 그거 정말 웃긴 꼴이겠다!
그러나 곧 로트렐리의 분노로 어그러진 눈동자가 서릿발처럼 얼어붙었다. 아니, 역시 억울해서 안 되겠다. 여태 저 작은 곳에서 내 삶을 가둬놓고는 인제 와서 내버린다고?
그녀의 분노는 터지는 화산보다 세상의 모든 수맥을 얼리는 통렬한 추위와 닮았다. 단단하게 굳어지고, 싸늘하게 사방을 얼리는 기운을 닮았다.
두고 봐라. 난 쉽게 죽지 않아. 랄티아도 구하고, 내 자유도 되찾고, 네놈들 낯짝을 뭉개준 뒤에야 눈을 감을 수 있어. 두고 보자고, 정말로, 두고 보자고…….
방향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바다로 떠밀린 로트렐리는 숨을 헐떡이다가 이내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그 고통이 거짓말처럼 싹 사라진 상태였다. 시선만 굴리던 로트렐리는 비척비척 일어났다. 발카는 아직도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로트렐리는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물결치는 바다와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응시했다. 그러다 돌연 단도를 들었다.
서걱, 서걱 하고 긴 머리채를 아무렇게나 자른 로트렐리는 그것을 대충 바다에 던지고 단도와 얼굴을 물결에 씻어냈다. 까맣고 긴 머리채가 물결 아래로 너풀너풀 가라앉았다. 로트렐리는 그것을 내려보다가 하, 하고 조소했다. 물에 비친 얼굴이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망할 마을 인간들은 굶어 뒤지라고 그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지만 로트렐리는 항상 자신의 배에 적당한 양의 음식을 두고 있었다. 이걸 아껴 먹으면서 어디든 가는 거야. 어디든…… 이제는 정말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로트렐리는 단도를 꾹 쥐고 눈을 감았다가 다짐했다.
랄티아를 찾자. 그리고 로트렐리가 아닌 사람으로 살자. 바다에서 돌연 태어난 사람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자.
비로소 로트렐리가 바라던 자유가 도래했다. 그러나 로트렐리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유는 로트렐리를 몰아치는 파도처럼 거친 분노로 밀어 넣었다.
그 분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심해처럼 차갑고 싸늘한 분노.
‘로트’는 비로소 차가운 분노 위에서 눈을 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