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05)
바다새와 늑대 (104)화(105/347)
#104화
내 물건과 해먹은 난장판이 나기 전의 모습으로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한번 헤집어졌다가 가까스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상태인 걸 알 수 있었다. 아마 키이엘로와 도멤이 수습해뒀을 터였다.
선원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만 아니라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키이엘로와 내 손에 잡혀 짐짝처럼 끌려온 도멤은 연신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찔끔찔끔 짜냈다. 나는 서둘러 정확한 상황을 알고 싶었지만, 도멤이 계속해서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진정시키는 게 더 시급했다.
도멤과 키이엘로도 묘하게 감회가 새롭다는 얼굴로―사실 도멤은 여전히 징징, 잉잉 울고 있었다― 자리에 앉았다. 텐이 키이엘로의 발치에 앉고 발카가 내 해먹 끝에 앉자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평소로 돌아온 기분이 되었다. 도멤도 비슷한 것을 느꼈는지 눈물이 더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묘하게 새삼스럽고 익숙한 기분으로 해먹에 앉아 말했다.
“나 지금은 멀쩡해. 세운한테 검사도 받고 왔다고.”
“앞으론 그렇게 나서지 마.”
도멤이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나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음, 하고 눈을 굴렸다. 뭐라고 한단 말인가. 나라고 딱히 온몸 바쳐 널 구할 생각은 없었어, 뭐 이러겠나? 사실 그 당시엔 정말 별생각 없었고…….
도멤은 소매로 대충 눈가를 문질러 닦으며 꿍얼거렸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아직까지 몇 명은 널 우홉피아주 첩자로 오해하는 거 같아. 얼마간은 어쩔 수 없겠지…….”
“그러고 보니 궁금했어.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넌 그게 할 말이야?! 아, 속 터져! 내가 널 몰라? 나랑 키이엘로랑 같이 지내던 널 모르겠냐고…….”
도멤은 제 가슴을 퍽퍽 내리치며 꽥 소리치더니 다시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나에 대해 아는 게 뭐라고.
너희는 내 진짜 이름도,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어떤 일을 해왔는지도 모르면서……. 그러나 내 생각과 다르게 도멤은 허엉, 하고 얼굴을 싸쥐더니 울먹거렸다.
“나는 네가 뭐 하던 사람이든지 내가 본 널 믿는단 말이야. 너, 너 진짜로 우홉피아주 첩자면 가만 안 둬. 내 사람을 향한 신뢰에 금이 가게 하지 마!”
“그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야 당연히 아니겠지!”
도멤은 다시 허엉, 하고 서러워했다. 거참……. 나는 도멤을 떨떠름하게 쳐다보다가 그의 수그린 등허리를 토닥토닥 두드려줬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몸을 움찔 떨자 나는 미간을 좁혔다.
셔츠 아래로 무언가 단단히 감싼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상함을 느낀 것을 눈치챈 키이엘로가 서둘러 화두를 돌리려 들었다.
“맞아, 로트, 아까 네가 봐야 한다는 문제가 있는데…….”
“너 뭐야? 다쳤어?”
내가 키이엘로의 말을 끊고 묻자 도멤이 고개를 내저으며 내 손을 밀어냈다. 나는 왼손으로 도멤의 셔츠 목 뒤축을 쥐었다. 도멤이 한탄했다. 그래, 너 진짜 멀쩡하단 거 실감 난다…….
나는 헛소리 말라며 일갈하고 물었다.
“등에 감은 거 붕대지? 어디 다쳤어? 왜 붕대를 하고 있어?”
그 말에 잘만 울던 도멤과 말문이 트이는가 싶었던 키이엘로가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다시금 그들의 파리한 안색과 부르튼 입술을 일별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암만 누구를 걱정한대도 사흘 만에 사람의 안색이 극적으로 변하는 것은 어려웠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는 키이엘로를 보며 눈썹을 휘었다.
“너도야?”
“그, 별거 아냐.”
“뭔데? 별거 아니면 말을 해.”
그러나 내 말에도 키이엘로는 연신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보다 다른 일이 있다, 어쩌고저쩌고, 하며 말을 돌리려 들었다. 나는 그 헛소리들을 무시하며 시선을 굴리다가 텐을 보았다.
내 눈이 텐에게 향하는 것을 본 키이엘로와 도멤이 헉 하며 텐을 붙들려 했지만, 말은 항상 행동보다 빨랐다.
『선장 명령 불복종으로 벌을 받았, 켁.』
“텐!”
“뭐야? 뭐야, 결국 말한 거야? 로트, 넌 대체 왜 동물 말을 들을 수 있는 거니!”
텐의 주둥이를 잡아챈 키이엘로가 경악하자 상황을 파악한 도멤이 제 머리를 싸쥐며 탄식했다. 나는 조용히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슨 명령 불복종?”
“아냐, 진짜 별거 아냐.”
『혐의를 쓰고 구금되어 있던 널 탈출시키려 했잖아. 그때 선장 자격은 그 금발 항해사가 갖고 있었으니까 그의 말에 불복종한 건 즉 선장 명령 불복종이지.』
“발카…….”
키이엘로가 한탄했다. 도멤은 그 반응을 보고 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더니 악, 하고 말했다.
“그래, 명령 불복종으로 벌 좀 받았어! 그래도 큰 문제는 아냐, 지금 네 혐의는 벗겨졌으니까 선상 반란 정도의 처벌은 피했어!”
“뭘 했다고 그 정도의 벌을 받는데?”
발카가 또 묘하게 도멤과 키이엘로, 텐에게 맞춰주는 것이 걸렸으나 나는 일단 눈을 가늘게 뜨며 도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도멤은 음, 음, 하며 질질 짤 때도 잘만 나불대던 입을 딱 다물었다. 내가 붙잡았던 탓에 벌어진 셔츠 안으로 꼼꼼히 감긴 붕대가 얼핏 보였다.
키이엘로가 결국 털어놓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지금이야 선장님이 널 인정해주셨다지만 당시에 우리가 무턱대고 행동한 건 사실이고, 기강을 잡지 않고 넘어가면 간부진도 곤란해지니까…….”
그 말에 나는 속이 엉키는 것을 느꼈다. 보통 선장 명령에 불복하는 선원은 본보기 삼아 채찍질을 당하거나, 심하면 선상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죄로 처형당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물론 평범한 배였다면 불복종으로 치부하는 일도 거의 없을뿐더러, 그냥저냥 유야무야 넘어가는 일이 허다했지만, 해적이나 해군은 그런 규칙에 엄격했다.
그러니까, 도멤과 키이엘로는 혐의가 있던 포로를 선장의 명령을 어기고 탈출시키려 했고, 거의 선상 반란에 맞먹는 죄였으나 디겔이 실제 선장이 아니고 선장 대리였던 점, 클루스도가 뒤늦게나마 내 혐의를 없애준 점을 감안해 그나마 가벼운 처벌로 끝냈다는 것이 둘의 의견이었다. 나는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이마를 짚은 나는 속이 울렁거리는 감각이 끔찍하다고 느꼈다.
“그래. 그랬단 말이지. 됐다, 난 일단…… 좀 씻어야겠어. 찬물 좀 맞고 정신 좀 차려야지.”
“정말 별일 아니었으니까 걱정 마. 그리고 네가 봐야 할 문제란 건 정말 있어.”
“알았어, 알겠으니까. 일단 사흘간 쳐 자서 그런지 좀 머리가 둔한 것 같거든. 그리고 찝찝하고. 씻고 올게.”
내가 손을 내저으며 말하자 키이엘로와 도멤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숨을 쉬다가 일어나 발카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그제야 날아와 내 어깨에 앉은 발카는 머뭇머뭇 내 머리에 고개를 기대고는 얇게 숨을 내쉬었다.
씻으러 들어가는 와중에도 선원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동안은 앞을 뻔질나게 지나다녀도, 있나 없나 모르더니 인제 와서 주시는 과한 관심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샤워실로 들어가 문을 잠근 나는 다시 한번 이마를 짚었다. 키이엘로와 도멤이 피해 본 것은 결국 또 내 탓인가?
내가 배에 올라서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도 없지……. 혹자는 바다새 덕에 이득을 보지 않았느냐 물을지 몰라도 그건 내 능력이 아니었다.
그건 발카의 힘이지 내 힘이 아냐……. 눈을 질끈 감았던 나는 문득 발카에게 물었다.
“처벌이 심했어? 붕대를 감고 있을 만큼?”
『채찍질을 좀 당했지……. 알잖아, 해적들이 손속에 자비를 두겠어? 그래도 튼튼한 놈들이라 수벌 후에도 저들끼리 농담 따먹기나 하던걸. 난 그보다 네가 걱정이야……. 정말 괜찮아?』
발카가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엔 이제 슬슬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나는 발카의 문맥 사이로 생략되었을 만한 것들을 상정하다가 부질없다 느껴 관뒀다. 대신 다친 팔을 주의하며 몸을 씻기 시작했다. 물에 젖어 달라붙는 머리칼이 좀 덥수룩해졌단 생각을 하다가 물었다.
“내 꼴이 어땠기에 그래?”
『말도 마! 저 녀석들 말대로 정말 죽는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 열이 끓었다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치료하고 해독하는 과정에서 네가 얼마나 비명을 질러댄 줄 알아?』
대견하게도, 그런 것치고는 목이 안 쉬었군. 나는 한가롭게 생각하며 눈을 굴렸다. 저주의 통증에도 비명을 삼키는데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다면 그 이상으로 아팠거나 정신을 잃은 상태라 그랬거나…….
어찌 되었든 그 감각이 상기되지 않으니 괜찮았다. 그나저나 해독이라고? 세운이 눈물의 바다에 사는 괴물들에게 독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알았지만 해독까지 가능할 줄은 몰랐는데…….
하긴 어떻게든 그가 해독했으니 내가 멀쩡히 살아있는 거겠지. 한 번 죽을 뻔한 일을 겪어서 그런가, 그들이 말하는 심각성이 좀처럼 와 닿지 않았다. 그냥 그랬나보다, 싶기만 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세운이 해독제를 알아냈어?”
『인어가 왔어.』
“그건 나도 알아……. 그 인어들이 날 물었잖아.”
『그 인어 말고. 진짜 인어 말이야.』
나는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발카가 이어 말했다.
『기억 안 나? 네가 인어에게 물렸을 때, 웬 여자 인어가 나타나서 널 끌어안았어.』
그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냐……. 인어들의 개껌이 된 셈이군. 그러다 퍼뜩 내 목을 감싸 안던 하얀 팔뚝이 떠올랐다. 셔츠의 끈을 묶다가 그 생각에 나는 손을 멈췄다.
눈물의 바다에서 보았던 인어들은 모두 탄광에서 파낸 시체처럼 까맣고, 뼈와 가죽만 남은 몰골이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이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당시 내 뒤는 난간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옷을 모두 입고 발카에게 물었다.
“진짜 인어?”
『응.』
확답을 들은 나는 당장에 문을 박차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직 약간의 물기가 남은 머리칼을 대충 수건으로 털며 키이엘로와 도멤이 있는 곳으로 간 나는 대뜸 소리쳤다.
“인어가 있어?!”
“……내가 네가 봐야 할 문제가 있다고 했잖아.”
키이엘로가 어색하게 대꾸했다. 이런 미친! 나는 황당함과 어이없음 중간의 표정을 하고 도멤을 보았다. 도멤은 실컷 운 탓에 눈이 띵띵 부어있었지만 날 보더니 하하 웃었다. 로트, 표정 웃긴다. 열불 나는 말이었다.
네가 더 웃긴다, 이 자식아. 나는 오랜만에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폭력 반대! 그것 때문에 안 그래도 우리 배가 지금 싱숭생숭해. 그러니까, 눈물의 바다에서 그 괴물들은 진짜…… 너무 끔찍했지만, 그 인어는 흔한 뱃사람들이 말하는 인어 같은 모습이거든. 음, 어느 쪽이 정상인지 판단하기 힘들지만, 말하자면 해골보단 사람에 가까운 형태였고.”
“근데 왜 그걸 나보고 보래? 너네 다 짜고 쳤지? 인제 와서 인어한테 다시 물려 뒤지라고 이러는 거지? 내가 속을 줄 알아?”
“사람을 좀 믿어 봐…….”
“믿겠냐?”
내가 어물쩍 딴죽을 거는 키이엘로에게 버럭 외치자 도멤은 이때다 싶었는지 자신 있게 자기 자신을 양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아니지, 우릴 믿어!”
“죽어라, 그냥. 죽어!”
나는 우헤헤 하고 바보처럼 웃는 도멤의 머리를 괜히 딱딱 때리다가 관두고 해먹에 수건을 내던지며 자리에 성큼성큼 가 앉았다. 키이엘로가 얼른 비켜주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인어가 좀 특이해서 그래. 내가 그 인어 목소리를 들었거든……. 그런데 나랑은 별로 대화를 안 하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아마 내가 들은 만큼 너도 그 인어랑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인어가 말을 해?”
“정확히는 굳이 너희 같은 특별한 방식이 아니어도 말은 해.”
도멤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는 키이엘로 말고 자기 쪽에 드러누워 있는 텐의 털을 만지작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발카는 좀 전에 내가 도멤에게 휘두르는 손찌검 탓인지 어깨에서 내려와 도멤 옆 탁자에 앉아 있었다.
동물에게 둘러싸인 도멤의 꼴이 지나치게 행복해 보였다.
“그 인어가 오니까 다른 인어랑 세이렌이 물러가더라. 뭘까, 대체? 인어들의 왕? 어쨌든 그 인어랑 몇 번 의사소통을 시도했는데, 간단한 제스처랑 단답은 받아냈어. 특히 세운이 애썼지.”
“그 인어 도움으로 독을 해독했구나.”
“그렇지. 어쨌든, 키이엘로 말로는 그 인어가 좀 더 길게 말을 해댔대. 그러니까, 보통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거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부선장 씨가 들어버렸지.”
“참고로 이건 비밀이야.”
키이엘로가 끼어들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이엘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텐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으니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나저나 인어라고? 대뜸 등장한 존재의 이야기에 나까지 불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인어를 보면 그 배는 침몰한다는 등의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건 미신이니 차치하고.
그 인어가 돌변해서 죄다 물고 다니면 어떡해? 세운까지 물린다면 선원들 치료해줄 사람마저 사라질 테니 말 그대로 전멸이었다. 나는 손끝으로 미간을 문지르다가 물었다.
“아직 결론 도출이 완벽하지 않은데. 그 인어가 뭐라고 했길래 내가 직접 봐야 한다는 거야?”
“음.”
키이엘로는 고개를 기울이고 어색하게 말했다.
“푸른 꿈을 보았어, 길을 잃지 않았어, ‘네’가 필요해.”
그렇게 말하며 키이엘로가 나를 가리켰다. 그러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마쳤다. 그 세 마디만 반복하더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