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16)
바다새와 늑대 (115)화(116/347)
#115화
바다의 거인이여, 자네의 그 큰 팔은 거친 파도를 불러오는가?
바다의 거인이여, 자네의 그 큰 입은 세상을 삼키던가?
바다의 거인이여, 자네의 그 큰 꼬리는 배조차 뒤집던가?
그의 서글픈 울음 널리 퍼지니 그제야 알겠더라.
거대한 그대들은 그저 유영하는 것만이 삶의 의미였음을.
사냥하는 자에게 닿지 않는 울음, 흘리는 눈물.
그 자리엔 고릿적 약속만이 남아있구나.
* * *
셋이 머리를 맞대고 짜낸 논리는 간부진 회의에서 7할쯤 통했다. 물론 키이엘로의 말에 따르면 요한이나 우투그루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도 정확히 모르는데 굳이 이런 걸 건의하는 이유가 무어냐 하고 반박하긴 했지만, 어쨌든 디겔과 클루스도는 우리의 말에 설득되었다.
항로를 따로 바꾸진 않지만, 목표 자체는 언젠가 만나게 될지 모르는 바다의 마녀를 상정하라는 정도의 의견이었으니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에 우투그루도 어느 정도는 수긍했지만, 요한만은 그게 정말 통하는가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키이엘로를 통해 건의한 사항은 간부진에게 받아들여졌다. 사실 그들 입장에야 일종의 정보였을 뿐 정확히 어디로 향해야 한다는 건의가 아니었으니 더 쉽게 수락한 것 같았다. 나는 어쩌면 그들의 수긍이 있어야 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에 전전긍긍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어쨌든 그렇게 거인의 바다를 향하며 나는 용케 디겔의 허락을 받은 헤더에게 검술을 알려주면서 며칠을 보냈다. 갑판 위에서 헤더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내내 선원들의 미묘한 시선들이 따라왔지만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원들의 같잖은 시선보다야 디겔의 사나운 눈초리가 가장 따가웠다.
그는 종종 내가 헤더에게 위험한 일을 시키지는 않는지 도끼눈을 뜨고 있었는데, 내가 겪었던 일과 엄마가 알려줬던 것을 기반으로 헤더에게 알려주는 중인 나로서는 굉장히 성가신 일이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도멤이 말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정석적인 기사의 검술이구나.”
“그렇지, 뭐. 하지만 정석도 응용만 잘한다면 충분히 유연하게 활용이 가능해. 우리 엄마도 항상 그걸 강조했지. 언제나 기초와 경험이 쌓은 요령이 중요한 법이라고 말이야.”
대충 그에게 대꾸해주는데, 헤더는 목검으로 갑판을 짚고 숨을 헐떡였다. 그래도 생각보다 정원 일로 쌓인 체력이 튼튼해서 다행이었다. 헤더의 체력은 적어도 백사장을 수없이 뛰어다니며 지구력을 키워야 했던 나보다는 훨씬 나았다. 게다가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헤더는 검술을 꽤 빠르게 습득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만큼 그녀가 스스로 노력을 하는 이유도 컸다.
“너무 힘들다……. 그러고 보니 프라세도 와서 배우면 좋을 텐데.”
“아, 그러게. 요 며칠간 프라세랑 베제를 마주친 적이 없네.”
도멤도 마침 생각난 듯 헤더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가 손가락을 튕기며 그녀를 흘겼다. 누나, 지금 혼자만 당하기 싫어서 물귀신 작전 쓰는 거야? 그 말에 헤더는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들켰네. 둘의 한담을 듣던 나는 눈썹만 치켜올렸다. 내가 가르치는 게 그렇게 힘든가?
곧 숨을 돌린 헤더는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내고 말했다.
“로트 너도 대단하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었던 거야?”
“뭐요? 뱃일? 아니면 검술? 안타깝지만 둘 다 잘하는 일이었던 건 아니에요. 그냥 좋아하는 일이었지. 유별날 정도였죠.”
“그럼 너는 검술을 얼마나 배웠는데?”
“열다섯이었나, 엄마한테 검을 선물 받았던 게……. 지금까지 쭉 했다고 보면 되니까 오 년간이죠.”
그러고 보면 엄마에게 선물 받았던 검도, 아빠에게 받은 배도 지금은 남아있는 게 없었다. 대단하네! 잠시 회상하는 내게 짤막하게 감탄한 헤더가 고개를 설설 저었다.
“나는 그 나이 때 뭐 하고 지냈지……. 따분하게 살았던 것 같은데.”
“누나만 그랬겠어?”
“으이구. 됐네요.”
도멤이 헤더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냈지만, 그의 사정을 제일 잘 알고 있었을 헤더는 헛소리 말라는 듯 그를 흘겼다. 헤더가 다시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나는 목검으로 헤더의 발과 어깨를 바로잡아주고 말했다.
“그래도 헤더가 배우는 게 빠른 편인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이렇게 금방 익힐 거라곤 기대 안 했거든요.”
“막무가내로 배에 올랐는데 이 정도라도 해야지.”
헤더가 굳건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검을 잡고 휘두르는 시범을 보이기 위해 뒤로 조금 물러났다. 벼르고 있던 바다의 마녀는 며칠이 지나 거인의 바다에 맞닿을 때까지 보이지 않았고, 검은바다는 거인의 바다를 횡단하려 하고 있었다.
선택을 하라고 등 떠밀어 놓고 정작 선택해도 아무런 변화도 오지 않으니 은근히 짜증이 치솟고 있던 때였다.
뒤로 물러나던 내 등에 누군가 툭 부딪쳤다. 짧게 사과하며 뒤를 돌아보는데, 보라색 머리털이 시야에 들어왔다. 네토르였다. 나는 단박에 떫은 표정을 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네토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내 표정을 보고 그 역시 해괴한 얼굴을 했다.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구는군.”
“아닌 줄 아냐?”
“…….”
네토르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내저었다. 그러다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내 근처에 발카가 없는 것이 의외였는지 내게 물었다.
“네 바다새는 어디에 있지?”
나는 그 물음에 딱 잘라 대꾸했다.
“뭔 상관이야.”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꺼져.”
“바다의 주인에 대해 궁금한 거야!”
이 새끼는 빌어먹을 학자라도 된단 말인가? 예전에 네토르가 책을 많이 갖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책을 아무나 사진 않지. 랄티아나 브레딕 같은 공부에 미친 괴짜가 아닌 이상 잘 보지도 않고, 애초에 비싸고…….
나는 네토르를 무시한 채 헤더에게 계속해서 시범을 보이려 했다. 사실 발카와 나는 다시 어색한 사이로 돌아갔다. 위기가 아교풀이 된 것처럼 우리 사이의 괴리를 잠시나마 붙여두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며칠 사이, 발카와 다시 대화를 시도했었다. 발카는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키이엘로와 텐, 도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해줬지만 내가 궁극적으로 묻고 싶었던 아버지와 관련한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발카는 그 이야기를 자세히 하는 것을 꺼렸다. 내가 화를 낼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행태였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나는 발카의 생각을 알아내는 것을 반쯤 포기했다. 얘기하기 싫어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사실 이쯤 되자 뭐 얼마나 대단한 생각이 있겠나 싶기도 했다.
다신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만 수없이 받아낸 뒤 적당히 대화를 끝마쳤지만 나는 속으로 조소했다. 내게 다음이 있기야 하겠는가? 만약 한 번 더 그런 일이 있다면 그땐 그냥 파도에 휘말려 물고기 밥이 되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할 것이다.
그러나 물 흐르듯 이어지던 시범은 네토르의 손에 의해 끊겼다. 목검을 든 내 손목을 탁, 쳐서 흐름을 끊은 그가 다시 말했다.
“바다의 주인에 관해 물어보고 싶다고.”
“어쩌라고, 망할……. 야, 이유라도 알자. 뭔 놈의 바다의 주인을 그렇게 찾아대?”
“내 형제와 한 약속이 있거든.”
네가 형제도 있냐? 나는 얼굴 표층으로 떠오른 생각을 숨기지도 않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우홉피아주에게 네토르가 갖고 있는 원한도 형제와 관련된 것이었던가. 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형제가 아니라 ‘형제 같은 사람’ 아니었어?”
“맞아. 그거나 그거나 나한텐 똑같아.”
“어, 그래. 그리고 나한테도 그거나 그거나 똑같지. 결론은 ‘싫다’거든.”
나는 부러 짜증 나라고 씩 웃어주고는 몸을 돌려 헤더를 보았다. 방금 보여준 거 할 수 있겠어요? 내가 묻자 헤더는 깜짝 놀라더니 어설프게 따라 하기 시작했다. 집중 안 했구나, 헤더…….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때 무시하고 있던 네토르가 뒤에서 계속 칭얼대기 시작했다.
“시간 많이 안 뺏어. 그 새가 바다의 주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만 물어봐 줘. 난 형제에게 바다의 주인에 대해 열심히 알아내기로 약속했다고.”
“거 빌어먹게 눈물 나는 형제애구만. 그 우애 좀 이 배 부선장들한테 나눠줘라.”
내 말에 가만히 딴청 부리던 도멤이 웃음을 터트렸다가 재빨리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왜 갑자기 나한테 와서 이러는지 모르겠네. 나는 네토르에게 더 말하지 않고 헤더의 자세를 교정해주고 지켜보기만 했다.
내 시선이 갑자기 매섭게 느껴졌는지 헤더의 몸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손뼉을 치고 헤더에게 말했다. 긴장 풀어요, 헤더. 그러나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네토르가 다시 말했다.
“내 형제도 우홉피아주 때문에 나와 떨어졌어. 난 우홉피아주를 찾는 동시에 형제를 찾고 있는 거야.”
“…….”
나는 어쩌라고, 하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벌린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우홉피아주에게 잡혀 있을 랄티아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네토르 놈 사정이 딱하든 말든 난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네토르가 알고 있던 내 약점은 이제 와 약점도 아니게 되었으니 켕길 것도 없고, 애초에 이 녀석 뭐가 이쁘다고.
그러다 나는 돌연 미심쩍은 점을 발견했다. 전에 네토르는 형제 같은 사람이 사라진 이유가 우홉피아주와는 별개인 듯 굴었는데. 워낙 예전 일이고 네토르의 사사건건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그의 이야기를 중요하게 담아두고 있지 않아 정확하지 않았다.
나는 네토르를 돌아보고 물었다.
“우홉피아주를 찾는 검은바다가 이곳저곳 많이 가니까 동행한다는 거 아니었어?”
“정확히는 아냐, 로트. 네토르는 우홉피아주에게 형제가 끌려갔었거든.”
도멤이 말했다. 나는 더더욱 알 수 없어졌다. 그때 헤더가 검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사실…… 전에 섬에서 깜짝 놀랐어. 네토르 네가 아직도 그 형제란 사람을 찾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
그 말에 섬에 있을 적 정원에서 헤더가 깜짝 놀라던 것이 기억났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네토르를 바라보았다. 네토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날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슬슬 그의 정신머리가 의심되기 시작했다. 우홉피아주에게 형제가 끌려갔었다는 도멤의 말을 듣자면 아마 그 형제의 끝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형제를 찾으면서 형제가 우홉피아주를 벗어나 다른 곳에 따로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그런 이유로 검은바다와 여태 함께 항해 중이라고? 나는 헤더가 경악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등골에 오한이 스쳤다. 정말로, 그의 일이 남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랄티아가 잘못되면 어쩌면 나도…….
“다른 얘긴 됐어. 그래서 바다새에게 물어보게 해 줄 거야?”
“……그걸 나한테 왜 물어?”
“그 바다새의 말을 전해줄 수 있는 건 너뿐이잖아.”
생각해보니 그랬다. 키이엘로도 말이 통한다는 건 도멤과 나만 알고 있었다. 나는 앓는 소리를 내다가 입을 다물었다.
“좋아, 나중에 발카랑 있을 때 와서 물어봐. 대신 오래 붙잡고 성가시게 하면 무시한다.”
“그래. 고마워.”
네토르는 내 말에 퍽 산뜻하게 반응하더니 할 말은 끝났다는 듯 휙 돌아 가버렸다. 그러자 도멤이 내게 가까이 오더니 나를 생경한 것 보듯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
“로트, 어디 아파?”
“빡치게 하네?”
“어휴, 우리 로트 맞구나.”
나는 도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했고, 그사이 얍삽하게 피한 그는 손을 훨훨 내저으며 꿍얼거렸다.
“하여간 폭력적이야! 아니 그런데 네토르를 웬일로 그냥 봐줘? 나 순간 누가 네 얼굴 뒤집어쓰고 흉내 내는 줄 알았잖아!”
나는 그를 흘기고 헤더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도멤이 에휴, 하며 과장되게 혀를 찼다. 이상한 곳에서 마음이 약해, 로트. 도멤이 무어라 떠들든 나는 다시 헤더에게 검술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검을 도로 들고 휘두르는 헤더를 지켜보며 나는 찜찜하게 눌어붙은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애써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